9회

특별한 이름

이름은 특이하다. 이름이란 사람에게 평생 붙어다니는 정체성의 표식이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름은 타인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것이다. 아이가 아무개야, 라는 소리를 들을 때, 처음에는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모르다가 ‘아, 아무개가 나를 부르는 소리구나’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누군가 “이름이 뭐야?”라고 물으면 대답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그 질문에 “제 이름은 아무개예요”라고 답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그 아무개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어릴 적 나는 내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내 이름을 가지고 놀렸기 때문이다. 덧버선, 보물섬…… 뭐 그 외에 다른 별명들이 있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그래도 개명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린 나이에도 내 이름이 대충 지어진 것이 아니고 심오하진 않더라도 뭔가 그 안에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소리’로서는 마음에 안 들지만 ‘뜻’은 나쁘지 않으니 감내하고 살자. 대충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친구들이 이름을 가지고 놀려서 어려서 개명을 감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로 성인이 되어 하는 개명은 이름이 지니는 두 가지 성격을 잘 보여준다. 첫째, 자신의 운명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주로 개명을 한다. 작명소를 찾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삶의 흐름과 운명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극히 비과학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에는 이름이 그 사람의 고유한 성격과 상관성이 높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둘째, 개명은 사회적인 이유로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특이하여 도무지 자연스럽게 불리지 않을 때, 모르는 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멈칫하거나 난처해하는 일이 잦을 때, 자신의 이름이 스스로와 타인에게 불편을 야기할 때, 사람은 개명을 고민한다. 그러니 이름은 너무 평범해도 너무 튀어도 안 되는 것이다.

이름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특징을 갖는다. 이름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한 편 있다. <The Grace Lee Project>(2005)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감독은 이름이 Grace Lee(한국명은 이은혜)인데, 그는 미국에 사는 교포 중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여성들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했다. 감독은 사람들이 ‘그레이스’에 대해 갖는 스테레오타입, 즉 그레이스는 선량하고, 똑똑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즉 “모범적 동양계 여성”일 것이라는 사회적 기대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가 보여준 결과는 흥미로웠다. 모든 그레이스들이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그레이스들이 그레이스답게 모범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스테레오타입은 “어느 정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혜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그레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갖는 기대에 부응하는 것일까? 혹은 은혜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그레이스는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일까? 아마도 대다수 그레이스는 은혜로운 삶과 은혜롭지 않은 삶 사이의 어중간에서 혹은 그 사이를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이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하나의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이름의 딜레마, 고유성과 사회성 사이의 딜레마는 일반화된 소통 매체, 즉 언어라는 코드를 통해 이름이 표상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언어는 표기되고 해석된다. 이름들은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과 연관성이 있다. 때로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 왕족에, 성경에, 자연에, 섭리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름들은 거대한 언어적/상징적 질서 속에 위치한 작은 좌표이다. 

그렇다면 비언어적인 재료를 통해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 표현되지만 쉽사리 기록되지 않고, 기억되지만 쉽사리 복제될 수 없는, 오로지 이름을 드러낼 때만 나타나고 바로 사라지는, 어떤 상징적/언어적 분류체계에도 등록될 수 없는 이름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린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소리’로 이름을 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게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내 이름을 알고 싶다면 나에게 컵을 주세요.”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을 들어 나에게 건넨다. 그러면 나는 그 컵에 물을 2/3 채우고 주머니에서 티스푼을 꺼내 컵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이 소리가 제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은 “컵에 물을 2/3 채운 후 그 컵을 티스푼으로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이다. 그런데 내 이름은 그렇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현장에서 내는 바로 그 소리로만 표현될 수 있다.

이 실험에서 내 이름은 ‘의성어’―이 경우, “팅팅”―가 아니다. 의성어란 소리의 언어적 모방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은 아메리칸 원주민의 ‘주먹 쥐고 일어서’식의 이름도 아니다. 그들의 이름은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코드로 표현되며, 그렇기에 뜻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뜻은 그들이 속한 부족사회의 중요 가치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집합적이다. 하지만 소리 이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어떤 분류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만 발생한다.다시 실험을 반복해보자.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이때, 주변에 컵과 티스푼이 없다면,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나는 내 이름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면 내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아쉽지만 제 이름을 들려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요.”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나를 부를 때, 컵과 물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혹여 컵의 1/3에 물을 채우고 스푼으로 두드려 나를 부른다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은 반드시 컵의 2/3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소리 이름이다.

물론 이런 불편 때문에 소리 이름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사회는 이름을 기록하는 기술적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디지털 매체로 이름을 기록해서 명함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기술이 더욱 발전한다면 간편하게 이름을 재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 이름은 더 많은 복잡한 문제를 이야기한다. 출석부에서 이름의 순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온라인 쇼핑을 할 때 본인 확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소음이 많은 공항에서 “‘새벽 두시에 첫눈 내리는 소리’ 손님은 지금 바로 6번 게이트 앞으로 와주세요”라는 말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러한 사고 실험을 통해 대략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러하다. 소리 이름은 한 사람의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흥미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사회의 제반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데 전혀 적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혼돈과 불편을 야기할 것이다. 굳이 소리 이름을 고집하는 사람은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부적응자로 살면서 몸과 정신이 소진되어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사회학적 결론은 너무 빤하고 재미없다. 

소설가라면, 예컨대 보르헤스처럼 집요하고 명민한 소설가라면, 소리 이름을 사용하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세계의 혼란과 평화, 갈등과 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벨기에산 빈 맥주 캔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손톱으로 물푸레나무 식탁을 긁는 소리’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짝짓기에 실패한 소쩍새가 밤새 내는 울음소리’를 나아서 키우면서 벌어지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르헤스처럼 명민하고 집요한 작가가 아니니 소리 이름에 관련한 사고실험은 여기서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어릴 적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나는 내 이름이 가진 장점을 알게 됐다. 일단 성별이 분명치 않다. 나는 이름만 보고 내가 여성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는 내 이름이 남자답지 않아서 좋다.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약간의 놀라움이나 실망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어쨌든 나는 기대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또 내 이름은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비교적 부르기 쉬운 이름에 속한다. 내 이름은 영어 철자로는 Bo Seon인데, 비한국인들은 Bo는 쉽게 발음하지만 Seon을 쎄온, 씨온, 쎤 등으로 발음하며 곤란해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그냥 Bo라고 부르라고 하거나 혹은 Bo라고 한 다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Sun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소개받으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름의 뜻이 뭔지,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 자신도 내 이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단어를 숱하게 반복해서 쓰거나 말하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름은, 범박한 차원에서 보자면, 결국 의미가 사라진 소리인지 모른다. 내가 우리집 강아지 이름을 티베트어로 ‘깊은 지혜를 가진 스승’을 뜻하는 ‘라마’라고 지었지만 정작 강아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을 알지 못하며 다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이해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태성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속으로 ‘아, 큰 별이 나를 바라보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이름과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기억, 그 사람의 개성이 겹쳐질 때는 오히려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없을 때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도구적인 차원에서 사용될 뿐이다. 하지만 눈앞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번 시도해보라. 눈을 감고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내서 불러보라. 이런저런 묘한 느낌이 든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이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김춘수의 시, 「꽃」의 유명한 구절에는 하나의 트릭이 숨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실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게로 오는 꽃은 없다. 만약 이름을 불렀을 때 실제로 꽃이 눈앞에 온다면 사람들은 꽃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어, 진짜 왔네?”, 나중에는 “어, 또 왔어?” 이럴 것이다.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물리적으로’ 내게 올 수 없기에 꽃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게 올 수 없는 존재들, 멀리 떨어진 이들, 헤어진 이들, 죽은 이들, 그들의 이름만이 내게 순수하고 영원한 의미의 가능성을 일깨워준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