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머리에 쓰고 걷는다

금요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머리에 쓰고 걷는다. 멋진 페도라군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여자가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오늘은 많은 말을 들어야 할 거야. 자기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일수록 들어야 할 설명이 많다. 최소한의 존재를 흉내내기 위한 정보처리만으로도 매번 벅차다.


“부작용(side effect)은 치료 효과 이외의 부수적 효과라는 의미입니다. 좀 부정적으로 들리죠. 그냥 부가 효과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건 또 너무 긍정적으로 들린다. 내가 세상의 부작용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음, 뭐, 싶은데 내가 뭐라고 세상의 부가 효과씩이나 되겠어요? 글쓰기의 부작용이 책, 여자의 부작용이 뱀, 코끼리의 부작용이 페도라…… 부정의 결과로 형성된 긍정적인 관계를 연쇄적으로 떠올리다가 의사의 말에 정신이 든다.


“보통은 금방 지혈이 되긴 하지만 한참 후에도 피가 멈추지 않고 올라올 수 있어요.”


내 눈이 커진 모양이다. 입도 벌어졌겠지.


“아니, 그럴 일은 거의 없어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거의 없어요”와 “혹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선으로 의사를 바라봤다. 그는 내 눈을 피하면서 내가 서명해야 할 서류를 내밀었다. 거의 없지만 혹시 몰라서, 모든 책임을 내게 전가하는 내용들을 읽으며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쓰다듬었다. 그는 나를 작은 모니터가 여러 대 달린 방으로 안내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은 휴대폰과 함께 방 입구의 작은 바구니에 넣었다. 목구멍 마취제를 삼 분쯤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목구멍 주변으로 마비되는 느낌이 서서히 퍼졌다. 마비에도 느낌이 붙다니. 죽은 나무처럼 뻣뻣해지는, 그 기분 나쁜 감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저절로 엉덩이가 조였다. 며칠 전 뱀 삼킨 여자를 봤다. 러시아의 한 여자가 잠든 사이에 뱀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기괴한 일이긴 해도 사람의 몸에 난 구멍이란 열어둔 문 같은 거니까요. 그렇지만 이 뱀은 괜찮아요, 하고 하얀 가운의 남자가 목안으로 뱀머리를 푹 집어넣었다. 나는 뱀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근육을 움직여 삼켰다. 그 움직임을 타고 뱀은 더 깊이 좀더 깊이 들어갔다. 뱀의 몸이 점점 부푸는 것도 같았다. 


방향을 바꿉니다. 남자가 뱀의 말을 전하고,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뱀을 삼킨 상태에서 대답하려고 애썼다. 대답, 대꾸, 반응, 반동, 반성은 나의 부작용이었다. 트림이 두어 번 났고, 뱀은 몸을 틀어 반대편 벽을 응시했다. 뱀의 눈이 닫혔다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감각이 적응하는 시점을 지나 큰 이물감 없이 몇 초가 지난다 싶으면 뱀이 다시 꿈틀, 몸을 틀었다. 그러면 위가 빵빵해졌고 뱀이 지날 길이 넓어졌다. 뱀 삼킨 여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서 그것이 빠져가는 순간을. 그것이 사라진, 수축되기 전 잠시 텅 비어버릴 공간의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길이 조금 더 넓어졌는지, 의사가 잡아당기는 힘이 센 건지 뱀은 들어갈 때보다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메두사의 머리를 삼킨다면 몇 개월 후 우리는 입으로 아이를 낳을 거야. 딸이겠지. 트림이 끄윽, 나왔다. 마취된 적 없이 마취에서 깬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티슈 몇 장을 내 왼쪽 뺨에 대주면서 나를 일으켰다. 두리번거려봤지만 뱀은 재빨리 사라지고 없었다. 믿어도 되는 걸까. 나는 들어오는 뱀의 머리도, 나가는 꼬리도 보지 못했다. 모두 나를 속이는 건 아닐까. 내 몸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과정이 그런 식으로 무지에 갇혀 있었다. 나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몸 어딘가를 찍은 사진을 판독할 수도, 피와 수분 상태를 분석할 수도 없었다. 내 몸이라면서. 뱀을 삼킨 순간, 나는 좀더 거대한 무언가에 삼켜진 건 아닐까 의심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머리에 다시 쓰면서는 확신했다. 이곳은 누구의 뱃속일까. 



토요일

 

그 슬픔은 이미 사라졌어요. 나의 슬픔 또한 그러하길. 


<데오르의 슬픔The Lament of Dear>에 나오는 후렴구다. 시의 각 절 끝에 반복되는 이 동일한 시구는 고대 영시에서 유일한 것으로 다른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데오르의 비가’라고도 알려진 이 시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낭독할수록 긴 기도문의 음조가 생기는 건 저 후렴구 때문이다. 내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겨우 나 밖의 슬픔을 돌볼 여유가 생기는 게 보통인 인간에게는 후렴구가 낯설고 어떤 인간성을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제의 선창기도, 영매의 주술문, 낭송자의 후렴이 다르지 않다. 그 슬픔이 이미 사라졌으니 나의 슬픔 또한 그리되길 바란다는 기원은 무엇보다 그 슬픔과 나의 슬픔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된다. 후렴구의 아름다움 역시 그런 연결성에서 기인한다. 나 밖의 슬픔과 나의 슬픔을 매개하는, 시인은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겠고. 


견딘다는 게 종종 후렴구를 만드는 일 같았다. 반짝이는 사탕 껍질을 모으는 것처럼.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복구와 치료, 재생만을 떠올리는 시간의 후렴구는 ‘오랜만’이었다. 뭘 하든 오랜만이 되었다. 혼자 외출을 하는 것도 오랜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도 오랜만, 살고 싶어진 것도 오랜만,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은 것도 오랜만. 마치 몇 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배되어 있던 사람처럼. 고작 몇 개월이었을 뿐인데. 하지만 내 후렴구는 나를 무엇과도 연결하지 못했다. 그저 나의 몸을 사샤의 털공처럼 동그랗게 말아두는 주술의 힘이 아주 조금 있을 뿐이었다. 다른 후렴구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보라색 계열의. 그런 마음도 오랜만이었다. 



일요일


싸늘한 추방의 상태에 있다. 매일 조금씩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고통에 대해 벤야민은 처음엔 “증오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기도의 오르막길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오 년 후 이 문장은 “슬픔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저항의 오르막길이 되어야 한다”로 바뀐다. 나라면 증오보다는 슬픔을, 저항보다는 기도를 고통과 이을 것이다. 그의 고통이 내 고통과 얼마나 가까울지는 모르겠으나 오르락내리락 하는 운동성은 비슷했나보다. 오늘은 추방의 내리막길. 저녁약 복용 후 침대에 누워 친구가 알려준 음성 입력 기능을 시험해본다. 


음성 입력: 암이면 어쩌나 했는데 

문자 출력: 밤이면 어쩌나 했는데


음성 입력: 아니, 암이면

문자 출력: 아니, 맘이면


암이 밤으로 맘으로 흘렀다. 창밖은 어둡고 추웠다. 밤으로 돌아올 무언가, 맘으로 쓰일 어떤 것을 떠올렸다. 달이 흐릿하게 보였다. 슬픔도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껏 부풀어 남의 것인 양 눕혀놓은 몸도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음성입력.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자 출력. 누구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어흥) 



월요일

 

소문은 삶의 덫이었다. 정말이지 끔찍해요. 그는 번번이 소문에 걸려 넘어져 다쳤다. 소문의 자장 안 사람들에게 소문의 진위 여부가 중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다쳤는가, 더렵혀졌는가, 훼손되었는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소문의 진원지를 아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설사 알게 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엔 덫이기만 하던 소문이 사람들의 입과 입, 악의와 질투, 뒤틀린 마음을 흡수하며 뼈가 조립되고 살이 붙었다. 그 모든 게 뒤섞인 괴물의 모습으로. 괴물은 길들여지지도 누군가 한 사람이 책임질 수도 없었다. 결코 쉽게 죽지도 않았다. 그들의 혀를 다 잘라놓고 싶어요. 나는 이해했다. 그들은 겉으론 점잖고 품위와 품격을 스스로 발음하는 사람들이다. 혀를 자르되 소설 안에서. 내가 십여 년 전 받은 조언이자 내가 그에게 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속이 시원해졌어요?

아니요. 

그럼 뭐 하러 써요?

재밌어졌어요. 소문에 들러붙은 욕망들이. 


그것은 너무나 세속적이고 원초적이어서 매번 웃음이 났다. 결국 세속적이고 원초적인 대응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 대응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그런 소문들을 여전히 어쩌지 못하고 다만 그것 역시 나를 어쩌지 못하도록 유독 발열하는 욕망을 멀리할 뿐이다. 


소문을 달고 오는 손님을 조심하세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래요.

소문을 들은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정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아, 그래요. 그러네요.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소문을 달고 오지 않아요. 끊어내고 오지.


이제 이런 지상의 소문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가 없다. 동이 트기 전에 사라지는 소문, 누구도 다치지 않는 우연이 세 번쯤 겹치는 소문, 오해이지만 이해이기도 한 소문 등을 듣고 싶다. 꿈의 조각들, 분절된 언어의 파편들, 차단된 시선과 서툰 변신……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소문을 이제 우리 써보면 어떨까요. 


어쨌든 혀는 잘라도 되는 거죠?

기대되네요.



화요일


“그게 전이(轉移)가 잘 된다면서요?”


고관절 수술 때문에 입원했다는 옆 병상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투약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컨디션이 괜찮았다. 그렇다고 들었다 정도로 대답을 했다. 공교롭게도 소설 쓰기를 어원적으로 일종의 ‘메타포 하기’라고 설명한 샹탈의 글을 곱씹는 중이었다. 노인은 더 묻지 않고 한숨을 낮게 쉬었다. 칠십대 노인의 입에서 듣게 된 ‘전이’는 좀 이상한 느낌이긴 했다. 메타포라(Metaphora)는 전이, 옮겨감, 이사, 이전 등의 의미를 안고 있었다. 소설 쓰기가 ‘메타포 하기’라면 한 세계가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것이 소설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삶을 저 삶으로,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이 시선을 저 시선으로. 이것은 우연히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세계의 이사는 몸안에서도 진행중이었다. 


“뭐 좋은 거라고 그런 걸 묻고 그래요, 눈치 없이.”


맞은편 병상의 무릎 관절 수술 환자가 노인에게 퉁을 줬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나름의 생태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숨이 곧 존재인 이들끼리 날카로울 이유는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노인이 미안해요, 했다. 뭔가 꾹꾹 눌러둔 감정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커튼 너머로 감정이 옮겨지는 건 별로였다. 메타포라 메타포라.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을 조금 열었다. 고통을 이해받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일반화는 거부하는, 곁에 있는 타인의 짧은 한숨이 거대한 지뢰가 되는 이 복잡하고 기만적인 관병의 시간. “전이가 잘 된다면서요”를 소설의 세계로 옮겨놓고 일단 지나가본다. 메타포라 메타포라. 



수요일


약 후유증으로 시각에 문제가 생긴 후 종종 오류가 일어난다. 어느 오후 비비안 고닉 선집 리스트를 카톡으로 받았다. 


“두번째 책 제목 좋네요. 『책 없는 여자와 도서관』.”


리스트를 보내준 사람이 웃었다. 


“와, 원래 제목보다 잘못 읽은 게 더 좋다니.”

“네?”

“『짝 없는 여자와 도시』예요.”

“세상에.”

(중요도에 있어 ‘책 없는 > 짝 없는’ 세계의 오류라는 분석이 차후 붙게 된다)


이런 오류도 있다. 삶의 재창조 욕구, 다시 살기의 욕구가 글쓰기를 추동하네 마네 이야기 나누다가 친구가 문득 그랬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일이기도 한 것 같고.”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힘에 더 가깝지 않아?”

“내 말이 그 말이잖아.”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것하고는 좀 다른……”

“사랑. 사랑이라고, 사람 말고. 좀!”

(사람과 사랑에 관한 오류의 역사는 길고 흔해서 추후 분석이 붙지 않았다)


전에 없었던 일은 아니지만 나를 드러내는 일 곳곳에서 더 자주 오류가 발생한다. 낯선 시간과 장소에 배치되어 적응과 익숙함을 강요당하는 내내. 그게 삶이 시작되고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 뚝 떨어뜨려놓고 어디 살아남아봐, 하는 거. 겨우 안전한 모방을 시도할 뿐이다. 자기 이상화에 부합하는 셀피를 계속 찍어대면서 ‘솔직하게’를 해시태그하는 오류를 반복하는 자화상으로. 약 오 개월을 이어온 이 일기야말로 그런 자화상의 공공연한 오류이기도 하겠다. 


“파란색이 잘 어울리네요.”

“응? 파란이 잘 어울릴 것까진 없잖아요.”

“큭큭. 파란 말고 파란색…… 근데 파란도 어울려서 난감하네요.”


그리고 오류는 계속된다. 파란곡절하게.



목요일 


안녕하세요. 


써놓고 한참 가만히 있는다. 실비아씨가 보낸 편지를 다시 꺼내본다. 그는 맨 윗줄에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라고 썼다. 안녕하세요를 지우고 ‘나의 안녕을 바라는 당신에게’라고 고쳐 쓴다. 작년 10월쯤 프리힐리아나의 실비아씨에게 메일로 간단히 근황을 전했다. 마음이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그의 답장을 여러 번 읽었다. 이제 그도 칠십대가 되던가. 더 자주 안부를 묻고 전하고 되돌려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우리는 서로를 향한 메일에 참회하듯 썼다. 우리는 모두 안녕하지 못했으므로. 여행자의 발길이 끊긴 작은 섬에 실비아씨가 아주 어릴 때 봤던 작은 새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작년 이맘때, 그사이 오랜 친구 둘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들을 위한 촛불을 밝히는 장소 옆에 내 이름을 적은 초도 두었다고 쓴 뒤, 그는 혹시 이런 일이 너의 문화권에서는 부정한 일이 될까 물었다. 그렇다면 꼭 알려달라고. 


실비아씨,

꽃을 사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어제까지는 집밖에 나오지 못했거든요. 붉고 노란 튤립을 세 송이 샀어요. 꽃잎 끝으로 갈수록 노랗게 번지는 색이 예쁘더라고요. 시들 즈음에 꽃잎을 따서 책 사이에 넣어두었다가 실비아씨가 보낸 편지봉투 안에 함께 담아두려고 해요. 고립된 몸으로 걸으면 어디든 섬이 돼요. 프리힐리아나만큼 아름답지도, 파랗게 눈부시지도 않은 섬에서 줄곧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구조선이 올 것 같진 않아요. 

내가 행복한가 혹은 불행한가. 살아 있나 실은 죽은 건가. 그런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상태를 불안하게 지나온 것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뚜렷하고 분명한 사실에 짓눌려 있어요. 너는 불행하게 살아 있어. 그 사실이 매일 나에게 당부해요. 그러니까 돌아보지 마. 대체 그것 말고 약에 취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또 있다고. 앞으로 걷지 못하면 뒤로라도 걸어야 해요. 기억이 고갈될 때까지 멈추면 안 돼요. 노인이 되면 밤새 기억을 뒤로 걷는다고 실비아씨가 그랬죠. 그래서 아침이면 무릎이 아픈 모양이라고. 그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따로 적어뒀어요. 노인이 될 수 있다면 꼭 누군가에게 전할 거예요.

여섯 살 어린 도둑도 잘 있나요? 친구의 상점을 대신 봐주다가 초콜릿을 숨겨 달아나려는 아이의 팔목을 잡고 실비아씨가 한 말이 “그거 가지고 되겠어?”였다는 게 정말이지. 그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떠올랐어요. 친구 K가 육 개월째 월급을 주지 않는 출판사를 그만두면서 한 일요. 그날도 월급 이야기를 꺼냈다가 사장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사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 열 권을 훔쳐 나왔다는 거예요. 집에 와 곧장 잠이 들었는데 깨고 보니 “이 도둑년아!”라는 문자가 와 있더라고요. 못 받은 월급이 몇십 배는 될 텐데요. 훔쳐 나온 책 중에는 『딕테』도 있었어요. K는 가져온 책들을 하나씩 책장에 꽂은 다음 답장을 했대요. “나한테 욕하지 마세요. 이 사기꾼 새끼야!”

친구가 훔친 『딕테』는 지금 내 침대 머리맡에 있어요. 실비아씨가 여섯 살짜리 도둑과 공범이 된 것처럼 나도 그걸 돌려주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더 큰 도둑이 누구인지 아니까요. 그런 식으로 친구들이 악질 도둑들에게서 훔쳐온 것들을 나는 대신 보관하고 있어요. 값이 나가는 건 별로 없지만 재미있고 웃긴 게 많아서 나는 기꺼이 공범이고 싶어요. ‘좋은 사람은(좋은 글은)’으로 시작되는 말은 전혀 신뢰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글)이고 싶다’로 끝나는 말은 믿고 싶어지는 것과 같아요. 실비아씨, 우리는 바람으로만, 간절한 방향으로만 진심일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도 당신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언젠가 공범이 되어도 괜찮겠어요. 내가 아는, 이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게 슬픔의 의지를 지켜온 사람. 그래서……


해가 진다. 이제 겨우. 몸이 기차처럼 늘어진다. 통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병상과 혈액이 부족하다는 말을 오늘도 듣는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삶이 잔인해진다는 의미다. 사랑하는 사람들마저도 서로에게 잔혹해지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더는 너의 시선이 나에게 닿지 않는다. 서로를 보지 않고 분노하거나 잔인해진다.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대고 등을 맞대던 감각이 희미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라요. 실비아씨는 썼다.


작은 새들이 돌아왔고 아이들은 포옹과 키스 없이도 자라요. 그들에게 희망을 빌려봐요. 


아픈 하루 끝에도 내일의 기대가 매달린다. 답장을 마저 써야겠다. 희망을 좀 빌려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