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하루키를 봄날의 곰만큼 좋아하십니까?” : 무라카미 하루키

교수님은 하루키를 싫어했다. 90년대 중반이었다. ‘문학의 이해’라는 강의를 들으러 갔다. 내 전공은 행정학과였다. 행정학과라니 나는 대체 왜 그렇게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전공을 택했던 걸까. 행정학은 가장 이과적인 사회학이다. 당신이 거기서 배우는 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국가를 과학적으로 운영하는 법’이다. 1학년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구입해야 하는 전공 책은 다음과 같다. 『행정학원론』, 『재무행정론』, 『인사행정론』, 『도시행정론』. 나는 전공 수업을 들으며 마음이 약간 황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대다수의 대학생들과 같았다. 수능점수에 맞춰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전공 중에서 가장 취업하기 쉬운 전공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행정고시라도 쳐서 4급 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사회적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림없지. 나는 그런 사람이 애초에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비전공 교양 과목을 더욱 신중하게 골랐다. ‘문학의 이해’를 고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게 대학이란 도시의 어느 곳에 육교를 지어야 교통이 원활해질 수 있는지를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을 읽고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해서 논하는 곳이었다. 그런 것이 대학이어야만 했다. 그렇다. 나는 모두가 조롱하는 ‘인문충’이자 ‘문청’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21세기적 혐오 발언이라고 조금 짜증을 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문충의 인문충 타령이다. 혐오 받는 당사자의 자기 비하다. 다른 인종은 N워드를 쓸 수 없지만 흑인은 쓸 수 있듯이 인문충은 인문충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 없이 인문충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말이다.


‘문학의 이해’ 수업은 첫날부터 흥미진진했다. 교수는 단상에 올라가자마자 갑자기 엑스세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해도 본다고? 한 편의 시가 있는 전시회장을 간다고? 이래서 느그 엑스세대들이 안 되는 기다.” 당시 유행하던 마로니에의 노래 <칵테일 사랑>의 가사를 두고 그는 우리를 싸잡아 비난했다. 나는 속으로 발끈했다. 마음 울적한 날엔 화염병도 던져보고 향기로운 최루탄 가스에 취해도 보고 한 편의 민중가요가 있는 노래패 공연에 가야 대학생인 것인가? 그랬다. 사실 모두가 그렇게 믿던 시대였다. 학생운동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대학생은 정치적으로 깨어 있어야 마땅했다. 선배들은 노래방에 가면 마로니에의 노래가 아니라 민중가요를 불렀다. 민중 노래패 ‘꽃다지’가 나오면서 민중가요도 약간은 세련되어지던 시기다. 그래봐야 민중가요는 민중가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은 <칵테일 사랑>에 더 가까운데 <바위처럼>만 부를 수는 없었다. 나는 바위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바위는 지나치게 무겁고 무뚝뚝하다. 나는 칵테일처럼 살고 싶었다. 이것저것 섞어서 마구 흔들어내는 칵테일처럼 가볍고 알딸딸하게 살고 싶었다.


교수의 다음 짜증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인공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하루키 좋아하나?” 학생들은 익숙한 친구의 이름이라도 들은 듯 큰 소리로 “네!” 하고 외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교수는 하루키를 좋아할 상이 절대 아니었다. 내 예상은 맞았다. 그는 더욱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폭격을 쏟아냈다. “하루키는 문학이 아니다. 그거는 두부 같은 글이다. 폭신폭신하고 맛있을 거 같은데 씹으면 별맛도 없이 막 으깨지는 두부 같은 기라.” 그 순간 나는 그의 강의가 나와는 사맛디 아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은 막 베스트셀러가 되어가던 『상실의 시대』와 몇 권의 에세이였다. 같은 동아리에 다니던 여자 친구는 그 책을 선물하며 물었다. “하루키 좋아해?”


누군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어디서 늙고 낡은 엑스세대가 추억에 문학적 양념을 치냐’며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 시절은 정말로 그랬다. 오죽하면 이후에 하루키 책을 낸 출판사가 “하루키를 좋아하십니까?”라는 문장을 홍보 문구로 썼겠는가 말이다. 9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배꼽티와 오버사이즈 팬츠를 입고 닥터마틴을 신은 여학생이 오버사이즈 폴로 셔츠와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를 입은 남학생에게 “하루키 좋아해?”라고 묻는 일은 정말로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세상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 문학적 클리셰처럼 보이는 법이다. 


나는 하루키가 좋았다. 두부 같아서 좋았다. 당대의 한국 문학은 지나치게 사회적이었다. 나는 86세대가 아니었다. 학생운동이 죽어가던 시기에 대학에 들어갔다. 『상실의 시대』는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학생운동이 끝나가던 시기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강의실로 쳐들어가 정치적 연설을 하는 전공투 학생들을 보며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자’고 중얼거렸다. 90년대 중반의 한국 캠퍼스에서도 그런 일은 종종 벌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운동권 선배들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학우 여러분. 나가지 마시고 잠시 저희 말을 들어 주세요”라고 입을 뗀 선배들은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법했다. 농민들과 연대하는 것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는 데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열창했다. 한 선배가 손을 들고 말했다. “농산물도 중요하고 농민과의 연대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침범당할 광범위한 저작권 문제 아닌가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그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교단 위에 올라가 있던 선배들은 모두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노려봤다. 감히 조선의 영혼인 쌀을 지키자고 하는데 저작권은 어디서 감히 튀어나온 자유주의자의 리버럴한 토픽인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우루과이 라운드가 무엇인지 저작권 문제가 무엇인지 대체로 아는 바가 없었지만 대담하게 운동권 주류의 토픽에 약간의 반기를 들고 나선 그 선배가 꽤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와타나베처럼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자. 쿨하게. 


그런 시기였다. 2020년대의 대학생들이 힙을 부르짖는다면 우리는 쿨을 부르짖었다. 나는 그때부터 더욱 하루키를 파기 시작했다. 『양을 쫓는 모험』과 『태엽 감는 새』는 정말이지 쿨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상실을 다루는 『상실의 시대』는 가장 많이 팔린 하루키 책이었지만 그건 어떤 면에서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하루키 책이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쿨한 ‘초현실주의 문학가’였다. 『상실의 시대』를 제외한 하루키 소설들은 일종의 판타지였다. 살바도르 달리가 ‘환상특급’ 에피소드를 연출하면 하루키 소설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몇몇은 지금 입을 삐죽이며 “『상실의 시대』도 판타지잖아. 남성 섹스 판타지”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내놓을 반론이 없다. 맞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초현실주의적으로 섹스를 많이 한다.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는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내가 얼마나 좋아?”라고 묻는 여자에게 “봄날의 곰만큼 좋아”라고 답한다. 나는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한국 남자들이 여자를 꼬시기 위해 “봄날의 곰만큼 좋다”는 문장을 오용하고 과용하고 남용했는지에 대해서 누군가는 사회학 논문을 쓸 수도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만약 지금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도망쳐라. 달려서 도망쳐라. 뺨을 후려치고 도망쳐라. 하여간 문학 구절을 이용해 작업을 거는 남자는 절대적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지적은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90년대 중반의 하루키는 나에게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20대 초반의 나는 언제나 머릿속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상을 펼치곤 했다. 도대체 내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으니 상상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을 몇 주일 앞둔 스물한 살이었다. 당분간 대학을 졸업할 가망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학을 그만둘 만한 확실한 이유도 없을 때였다. 기묘하게 얽혀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을 앞 둔 스물한 살이었다. 당분간 전공을 좋아할 가망은 없고, 그렇다고 대학을 그만둘 만한 확실한 이유도 없었다. 기묘하게 얽혀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몇 달이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군대에 갔다. 나처럼 신체적으로 유약하고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간이 군대라는 조직에 왜 필요한 것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신체검사 1급이 나왔으니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일병이 된 이후부터였다. 이등병에게는 책을 읽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 책을 읽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첫 휴가를 나간 뒤 몇 권의 책을 사 들고 복귀했다. 검문소에 있던 장교가 내 짐을 뒤지다가 그 책들을 발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카프카의 『성』이었다. 그는 내가 가져간 책들이 보안에 위배되는 불온서적이 아닌지를 궁리하더니 내가 있던 중대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병장을 불렀다. 그는 그 책들이 불온서적이 아니라고 장교에게 말한 다음 혹시나 책을 뺏길까 벌벌 떨고 있던 나를 데리고 내무반 건물을 향해 걸었다. 병장은 말했다. “군대에서는 이런 책은 읽지 않는 게 좋아. 염세적이잖아. 군 생활만 힘들어진다고.”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루키 책은 그냥 두부 같은 책인데요.” 병장은 웃었다. 상실의 시대도 끝났고 양을 쫓는 모험도 끝났고 세계의 끝에 지어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미소였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