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우리집은딸부자. 나는 3 1남 중 둘째 딸이고, 1988년생이며, 아버지는 경상도 장남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막내로 자라다가 연달아 셋째, 넷째가 태어나 중간에 낀 아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딸이 많은 엄마를 부러워한다. 딸이랑 카페에 가서 좋겠다, 딸은 친구 같잖아요, 딸이 많으니까 엄마 마음을 잘 알아주네…… 친구 같지 않은 딸이면 어떡하려고?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 대를 끊는다고 친척들이 쑥덕거렸다. 사촌을 데려다가 양자 삼으라는 소리도 대수롭지 않게 했다. ‘딸로 태어난 나는 실망스러운이고,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어린이였던 내가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결연하게 다짐할 만큼 노골적이고 집요했다.

 

1971 6, 대한가족계획사업의 공식 표어가 바뀌었다. 이전의 표어였던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회는 사회적으로 두 번으로 제한되는데 남아선호사상은 공고했으니, 대대적인 성별감별낙태가 이루어졌다. 동시에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의 변화가 일어난다. 전통적으로 딸은출가외인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동등한 자식으로 대우하면서 키우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던 과거와 달리, 딸만 있는 가족이정상가족에 편입된 지 50여 년이 지났다. ‘아들 낳으면 기차 타고,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를 거쳐 최근의딸 바보열풍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사이에 태어난 무수한 딸들의 이야기가 나는 늘 궁금했다.

 

농경사회에서 생산재였던 자식은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이제 소비재가 되었으나, 딸은 여전히 아들보다 촘촘하고 미세한 역할기대의 그물 속에 있다. 늙은 부모의 돌봄 노동이나 집안 내 분위기 메이커, 아빠를 딸 바보로 만드는 애교 등 장착해야 하는 옵션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은 집안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하는 딸에게 머물렀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잉여이자으로 취급되는차녀말이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보자면 나처럼 밑에 남동생이 있는, 아들을 낳기 위한 여정에 잘못 도착한 택배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낀 딸일 수도 있겠다.

 

개인은 개별적이고 고유하지만, 보편적인 프레임의 영향으로 어떤 면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기도 하다. 딸과 엄마의 구질구질하게 얽힌 감정, 초등학교부터 경험하는 위계와 폭력, 헤어지면서 친구에게 보내는조심히 가, 집에 가면 연락해같은 메시지처럼. 나는 순서로도, 성별로도 새롭거나 특별한 게 하나도 없어 양육자에게 그저 그런 존재로 인식되는 둘째 딸의 경험이 어떤 공감의 핑퐁을 만든다고 느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장녀나 장남에 비해 둘째 딸은 자신의 성격적 특성을차녀라서라고 해석하면 낯설어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내면의 중립 기어, 뭐라도 해야 나를 봐준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키운 관종력, 제일 좋은 것을 선뜻 요구하지 못하는 머뭇거림, 나의 부모가 늘 다른 형제의 이름으로 불리는 서운함 같은 사소하고 미묘한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잘 이야기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사소하고 미묘해서, 치사하고 유치해서. 하지만 원래 그런 것들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법이다.

 

꼭 차별과 학대가 아니라도, 가정 내에는 차등대우가 존재한다. 양육자도 사람이기에 더 마음 가는 자식이 있고, 한국은 (그리고 전 세계는) 오랫동안 첫째가 모든 특권과 부담을 가지는 장자 독식 세계관이었으며, 경제적정서적 자원은 칼로 자르듯 깔끔한 1/n로 나뉘지 않는다.

 

『차녀 힙합』은 이러한 가족 역학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둘째 딸의 위치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모든 딸의 이야기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나 같은 딸에게여기여기 붙으라고 내미는 엄지손가락이다. 한 번 남은 부모의 자식 뽑기 기회를딸로 태어나 허무하게 날려버렸다는 죄책감이 혈관을 타고 은은하게 흐르는 둘째 딸, 언니보다 뛰어날까봐 걱정하는 양육자의 눈을 기억하는 둘째 딸, 위로는 언니 밑으로는 남동생 사이에 낀 둘째 딸,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말이 귀에 딱지로 앉은 둘째 딸…… 그리고둘째 딸이 아니더라도 끝없이 순서가 밀리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소외당했던 누군가들, 여기여기 다 붙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