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자매라는 서바이벌

카카오톡 메시지를 쓴다.

펌을 하고 싶사옵니다.

답장이 온다.

안 돼.

굴하지 않고 다시 읍소한다.

그러면 오랜만에 앞머리를 내볼까?

답장은 더 빠르다.

절대 안 돼.

 

세상에는 많은 언니 보유자가 있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언니 없는 여자들이 보통 부러워하는 타입의 언니를 가졌다. 내가 갖고 싶은 걸 사주는 언니? 나를 엄마처럼 돌봐주는 언니? 아니, 가장 인기 있는 언니는 바로 옷장 공유할 맛이 나는언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잘 꾸미고 다녀서 나에게도 콩고물이 좀 떨어지는 언니 말이다. 옷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아편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은 자매의 숙명이다.

 

나는 아직도 옷을 사거나 머리를 바꿀 때면 언니에게 결재를 올린다. 내가 스타일을 바꾸면 친구들이 으레 물어본다. “언니가 허락해줬어?” 나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단발머리 역시 언니가 정했다. 언니는 나의 비주얼 디렉터로 35년째 무급 노동중이다. 뭐가 예뻐 보이는지도 모르고 잘만 살아가는 여자 위에 태어난 죄다. 미용실에 가면 언니가 시킨 대로 줄줄 읊는다. “층 없이, 일자로 잘라주세요.” 층 있는 단발과 층 없는 단발의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미용실에서 커트를 망쳐놔도 모른다. 언니와 나는 중학생 때 같은 과외 선생님에게 수학을 배웠다. 그 수학 과외 교실은 공부를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작은 개그 콘서트장에 가까웠는데, 선생님이 신들린 말발을 뽐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선생님은 언니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니만 예쁘게 입고 다니지 말고, ? 니 동생도 좀 어떻게 해줘봐라.” 선생님은 당시 사춘기라면 사춘기인 나의 옷차림을 두고 거지같다고 표현해도 모욕감을 안기지 않고 웃기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거지같이 입고 다니지 마라.”

언니가 말했다.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는 당황했다. 알아야 그렇게 안 입지. 세상에 거지같이 입어야지~’ 하고 옷장을 여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거지같다는 건 혐오 발언이다. 패션 세계에는 뭐 그런 룩이 있다고도 하던데…… 그런지 룩인지 뭔지…… 여하튼 나는 아니었다. 깨끗이 씻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 무렵의 여중생이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도 머리를 터는 동안 얼굴의 모든 모공에서 피지를 분수처럼 뿜어내긴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우리의 코디에서 어느 정도 손을 뗀 참이었는데, 언니가 버스를 타고 다른 시까지 넘어가서 쇼핑할 만큼 옷에 열정적이었던 데 반해 나는 일찌감치 패션계에서 도태했다. 언니에게 옷을 사줄 때면 엄마는 항상 말했다. “같이 입는 거야, 송아랑.” 하지만 송아는 같은 옷도 좀더 후줄근하게 입는 재주가 있었다!


애초에 모든 종류의 꾸미기에 재능이 없던 나는, 못생긴 건 어쩔 수 없다며 포기했다. 언니는 그런 나를 앉혀놓고 눈썹 깎는 칼로 앞머리를 내줬고, 속눈썹 사이사이 점막을 아이라이너로 채우는 법을 알려주고, 비용이 합리적인 피부과와 커트 솜씨가 끝내주는 미용실을 추천해주고, 엉망으로 맨 목도리를 고쳐주었으며, 내 책의 표지를 골라주었다. 덕분에 나는 좀 덜 추레하게 다녔고, 언니랑 같이 살 때는 옷을 잘 입는다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언니는 나에게 자주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살 좀 빼라, 화장 좀 해라, 피부가 그게 뭐냐, 그런 옷을 돈 주고 샀냐…… (당연하지. 그럼 훔쳐왔겠냐?) 직접적인 공격은 언니가 했지만, 그 공격을 가능하게 한 건 당연하게도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어째서 외모 비교는 유독 자매에게 더 가혹할까? 언니는 체구가 좀 작고 여리여리한 편이라, 기골이 장대하고 먹성이 좋은 나는 자연스럽게 아씨 옆 장군감이 되었다.

언니는 예쁘고, 센스가 있었다. 혼자서 옷을 사면 언니의 평가가 두려워 감췄고, 어쩌다 언니가 내가 산 옷을 입고 나가면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언니의 감각은 자신을 치장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고 여기저기 뻗어나갔다. 선물을 살 때, 식당을 고를 때, 함께 살 집을 알아볼 때 등등. 반면 나는 뭘 해도 좀 구렸다. 얼마나 구리냐면, 우리집 에피소드 톱3 안에 드는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당시 아홉 살이던 동생에게조차 패션을 지적받았다. 그때 나는 여행을 떠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러 창원에 갔다. 동생들을 데리고 외출하려는데 셋째가 중얼거렸다. “언니는 그 가방이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면세점에서 산 버버리 가방 하나를 365일 메고 다니던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언니는 어떤 게 어울리는데?” 동생이 머뭇거렸다. “언니는 좀……” ? 나는 업어 키운 금쪽이에게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한 칭찬을 기대하며 내려다보았다. “초라한 게 어울리는 것 같다.” 아마 수수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아홉 살 인생 최대의 어휘력이었을 것이다.

 

타고나길 덜 떨어지는 분야가 있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데, 하필 바로 옆에 그 능력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있다. 쟤만 아니었으면 나의 구림이 좀 덜 두드러졌을 것 같은데, 왜 하필 저 인간은 내 언니여서 해가 져도 집에 가지 않고 자다가 깨면 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있는가. 언니는 인기마저 그럭저럭 있어서,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더니 언니를 아는 남학생들 몇몇이 나를 보러 왔다. 그리고 에이, 하고 돌아갔다. 안드로이드였으면 얼굴에 붙은 라벨 넘버가 AC8이었을 것 같은 자식들이 잘도 그런 짓을 했다.

 

그렇다. 언니에 대한 내 감정 중 많은 부분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언니가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자매가 철없던 시절 개싸움, 말 그대로 기술도 없고 윤리도 없는 개싸움 하던 이야기까지 글로 써서 팔아먹는 동생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언니 기준, 저 잘난 맛에 사는 기세등등한 년이고 언니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의 중요한 부분 역시 열등감이기 때문이다. 동성의 또래, 그리하여 비교 가능한 존재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 잘 때도 먹을 때도 웃을 때도 울 때도 쉴 때도 쌀 때도 그 존재가 내 시야에 얼쩡거리며 신경을 살살 긁는다는 것. 그 존재와, 어린 시절 유일한 에너지 공급원이자 삶의 전부인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굶주린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상대의 자존감을 바각바각 갉아먹고, 또 그만큼 파먹힌다는 것. 세상 모든 자매는 태생적으로 생존자일 수밖에 없다. 자매들이여, 우리가 살아온 모든 과정이, 엠넷은 명함도 못 내미는 서바이벌이었다.

 

나에게 최초의 열등감은 색연필 세트의 모습으로 왔다. 여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언니와 나는 똑같은 색연필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자매니까. 똑같은 걸 안 주면 싸우고, 더 좋은 것을 언니가 가지니까. 크레파스의 뭉뚝함과는 차원이 다른, 연필깎이로 깎아서 쓰는 색색의 색연필이 열두 자루가 넘게 들어 있었다. 가느다랗고 화려하고 의젓했다. 내가 이렇게 어른스러운 필기도구를 쓸 수 있게 되다니! 심장이 뛰었다. 나는 색연필을 애지중지하며 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함께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똑같은 연필깎이로 색연필을 깎는데 언니와 나의 색연필 세트가 점점 다른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언니의 색연필 세트는 내가 보기에도 더 예쁘고 정갈했다. 매일 밤 색연필의 요정이 언니의 색연필에만 축복의 가루를 뿌려주고 가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여전히 근사해 보이는 내 색연필도, 언니의 것과 나란히 놓으면 단번에 초라해졌다. 나는 K-어린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쓰는 비기를 썼다. 나 안 해!(물론 혼자서 하는 경쟁이었기에 내가 그만둔다고 해봤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항의 금붕어조차도.)

언니는 중학교 때 미술을 시작해서 미대에 갔고 디자인을 전공했다. 패션 쪽 일을 하다가, 시각디자이너로 이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딘가 남달랐던 색연필 세트의 비밀도 재능의 떡잎이었던 것 같다. 색상을 어울리는 순서대로 놓을 줄 알고 여러 색을 골고루 쓰니 색연필이 닳는 속도가 고만고만했다. 보기 좋을 수밖에. 나에게 살 빼고 화장하라고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죽도록 미웠지만, 덕분에 이 나이에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소리는 좀 덜 듣는다. 안 듣는 건 아니지만.

언니처럼 예쁘고 잘 꾸미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교와 조롱은 괴로웠고 아차 하는 순간 자괴감이 곰팡이처럼 슬었다. 색연필을 엎어버리듯 내 인생도 엎어버리고 싶었다. 언니가 나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고통을 호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왜 자매로 태어났을까. 왜 한배에서 나와 이토록 다르고,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까. 언니와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싫었던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다. 미친듯이 싸웠고 최선을 다해 싫어했다. 그런데 더 강렬한 것은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다. 수술이 끝난 뒤 기진맥진해서 누워 있는 내가 울컥 피가래를 토할 때, 앞에 서 있던 언니가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내던 순간 같은.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같이 무딘 애는 영영 몰랐을 것이다.

 

오늘도 카카오톡을 켜고, 읍소하는 메시지를 쓴다.

탈색을 하고 싶은데 검토 바랍니다.


이러다가 일흔 살까지 결재를 요청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니는 일흔한 살에도 패셔너블한 할머니일 테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