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참지 않은 것: 우리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면

참지 않은 것: 우리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면

우리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면

기적을 믿어야 할 정도로 늙어버린다면

 

친구들이 돌아간다. 각자의 집으로. 엉거주춤 일어나 매무새를 대강 가다듬는다. 가만두라고 해도 굳이 함께 앉아 음식을 먹던 내 책상 위를 치운다. 쓰레기를 한데 모으고, 남은 음식을 개수대에 가져다두는 솜씨가 신속해서 나는 애가 탄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아직은 아니다.

 

자고 가면 안 돼?

안 돼. 일해야 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일 같은 거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검정 비닐봉지에 묶어 넣고 바다에 던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간 바다에서 낄낄대며 우리가 놀았으면 좋겠다. 해변의 건물은 모두 해풍에 허름하고 문은 닫힌 채면 좋겠다. 습격이 예고된 날의 풍경처럼. 폭죽을 사려다가 실패하고, 모래 위를 가로지르며 휘청이면 좋겠다. 모래는 산산조각의 증거야. 바다에서 할 수 있는 나쁜 짓을 했으면 좋겠다. 제일 나쁜 짓은 안 했으면 좋겠다. 비밀을 더 만들고 싶다. 그래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으면. 헤어질 수가 없게 된다면. 아니면 우리가 동시에.

 

친구들이 너무 좋다. 너무 좋은 친구들은 나의 집을 떠날 준비를 한다.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 바빠 기약이 어렵다. 언제 우리가 또 만나.(질문 아님) 마음이 너무 슬프고 나만 슬픈 것 같아서 또 슬프다. 애달프다. 사랑은 왜 애달파? 왜 좋기만 하지 않은 거야? 왜 너무 좋으면 또 애달파? 왜 그런 거야?(질문 아님) 자고 가. 제발. 엉엉. 팔다리를 다 구겨 모으고 우는 시늉을 하자 얘가 왜 이래? 이런다. 내가 이러는 거 너네 몰라? 알잖아.

 

있잖아. 우리 옥상은 언제 가는데. 왜 갑자기 옥상이냐면 옥상은 좋으니까. 좁아도 넓고. 낮아도 높고. 세상에 우리만 있지는 않아도 우리만 외따로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우리가 살겠지마는 살아보겠지마는 사라질 수 있는 것 같고. 그렇잖아. 그래. 옥상에 가겠다 약속은 안 했지만. 같이 잠은 언제 자는데. 대답 좀 해줄래. 너네 요즘 내 말에 대답 안 하더라. 얘들아. 예전에는 곧잘 같이 잠들고는 했잖아. 근처에서 다 같이 자취할 때. 다닥다닥 붙어 누워서 천장 봤잖아. 서로 얼굴 말고 천장 보면서 키득키득 몸 언제 떨려보는데. 그거 지금 하면 안 돼? 나한테는 지금이 그 순간 같은데. 반드시 해야 하는 순간. 그거 해야 하는 거 같아. 너네도 그런 순간이 뭔지 알잖아. 제발 대답 좀 해라. 아니, ‘아니면아니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잖아, 지금 내가. 그리고 자꾸 다음에 보자고 하지 마. 조만간이라고 하지 마. 조만간이 언젠데. 참 태평도 하다. 너네 내가 내일 죽어버리면.(여기서 더 가면 안 된다.)

 

친구들이 돌아갔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진짜로 울어버려야지 싶었다. 그런데 눈물이 안 난다. 눈물로 슬픔의 척도를 삼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슬픈데 눈물이 안 나니까 억울하다. 근데 눈물이 날 정도의 억울함은 아니다. 결국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무 슬픈데. 이 슬픔을 어디다가 말해야 해? 나에게 지면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쓰는 산문은 쓰자마자 읽히지는 않는다. 편집자에게 송고도 해야 하고, 내용에 맞추어 그림도 그리고. 무엇보다 『주간 문학동네』 업로드 날짜가 월요일 오후 세시로 정해져 있으니까. 그것을 다행으로 여긴 일이 많다. 너무 날것은 다시 살피고 익혀 내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글은 아무것도 고치지 않을 예정이다. 순간을 소중히 하고 싶으니까. 나는 오늘 너희와 함께 있는 순간을 소중히 했지만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지는 않았고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를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기록하는 것은 기회이자 벌이다. 두 시간 있다가 다시 쓰기로 한다. 메시지 왔다. 〔오늘 만나서 힘났어.〕 나도 힘났어. 힘났는데. 힘난 것보다 슬픔이 더 났어. 콩 고르듯이 슬픔만 골라 던지고 싶다. 그런데 그러면 던진 자리에서 뿌리가 날 것 같다. 싹이 돋을 것 같다.

 

두 시간 있다가 쓰려고 했는데 잠들었다. 침대에서 턱밑까지 이불 덮고 얌전히 잘 잤다. 어이가 없다. 그래. 슬퍼서도 지치나봐. 안 울어도. 지쳐 잠이 드나보다 했다. 이불을 발로 밀고 누운 몸을 바닥으로 세운다. 몸이 휘청한다.

 

휘청휘청.

나는 내가 좀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흔들흔들.

사람이 흔들리는 것은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잖아요.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 공간이 안전할 수도 있고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흔들린다는 것은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잖아요. 나는 대부분 안전한 세계에서 흔들리고 있다. 좌우를 살피고. 안전과 거리를 확보한 후 흔들린다. 흔들고 있다. 친구들 앞에서 흔든다. 아까시나무. 아까시나무. 입에서 아까시나무가 맴돈다. 아까시나무를 잘 말리면 톱도 들어가지 않는대. 그렇게 단단하대. 몸 근육에 힘을 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까시나무일까. 꿈에서 봤나? 꿈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꿈 안 꾸고도 하니까. 꿈에서도 깨어서도 같은 종류의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아서. 무엇보다 친구들이 꿈 이야기에는 대답을 안 해준다. 잘 안 해주는 게 아니라 아예 안 한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종횡. 무진 빠르게 간다. 생각이 지날 때마다 나는 바르르 진동을 한다. 귀가 찢어질지도 몰라. 귀를 막아본다. 제대로 막아. 적당히 덮었다간 파도 소리를 듣게 된다. 파도 소리는 너를 그리운 쪽으로 밀어낸다. 그러다가 전부 가짜임을 깨닫게 돼. 폭죽을 사려다가 실패한 기억 같은 것은 없고. 우리가 함께 모래를 가로지른 일도 없지. 그것을 오해라고 한다면. 어제 친구가 나를 오해하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대충 내가 마음을 다 안 준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마음을 어떻게 다 주고 살아? 마음에는 마음이 있다. 텅 빈 마음에는 텅 빈 마음이 있다. 그러니 마음을 다 주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오해는 네가 하는 것 같다. 나는 가능한 마음을 주고 있다. 너에게는 각별히 아낌이 없다. 순간을 소중히 하면서.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지는 못하면서. 걔가 나를 그렇게 오래 알았는데 또 오해가 남았다는 게 신기하다. 그리고 그게 진짜일 수도 있다는 게. 오해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뿐일 수 있다는 게. 걔는 보는 눈이 정확하고 기억의 힘이 비상하다. 나는 가끔 내 마음을 너에게 아주 조금 남기고 준다.

 

아까시나무. 아까시나무. 콩 고르듯이 슬픔만 골라 던진 자리에서 뿌리가 난 이야기.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 아까시나무였다는 이야기. 아까시나무의 뿌리는 흙을 먹고 캄캄하게 자란다. 자라고 자라서 베어낼수록 자라고 또 자라서 깊이깊이 묻은 죽은 사람의 몸까지 뿌리를 뻗었다는 이야기. 죽은 사람의 목을 감아 돌았다는 이야기. 죽은 사람은 목에 아까시나무를 걸고 산 사람의 꿈으로 간다. 나 좀 살려줘. (이미 죽었잖아?) 산 사람은 톱과 삽을 들고 무덤으로 가. 무덤을 다 파헤쳐. 그래 봤자 나오는 것은 죽은 사람과 아까시나무뿐이다. 죽은 사람은 자리를 옮겨 심어. 아까시나무는 죽인다,고 생각하지만 이듬해 아까시나무가 같은 자리에서 돋아난다는 이야기.

 

휘청휘청. 흔들흔들. 다시 잠들기 전으로 돌아갈게. 아까 너희를 보낼 때는 가슴이 다 찢어질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다른 곳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우리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알겠다. 그건 너희를 사랑하려고. 그런데 나는 나도 사랑해. 그러니까 그냥 너네도 나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태어났으니까. 그러니까 참아야 하는 거지? 나는 억울해 미칠 것 같고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면 친구들은 꼭 말해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한몸일 수 없겠다. 나는 아까시나무를 목에 건다. 칭칭 감기도록 한다. 삽과 톱을 들고 산 너희의 꿈으로 간다. 자고 가.

 

 

참은 것: 우리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면

 

한밤중의 차 소리가 좋다.

지금 사는 집은 대로변에 있고 벽이 얇아서 가만 누워 있으면 밤새도록 차들이 지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달리는 것이 있다. 사람이 있다. 나 말고도 밤을 깨어 있는 채로 달리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달려도 머리맡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달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게 안심이 됐다.

 

내가 가진 오래된 꿈은 모두가 나보다 늦게 잠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일어나기 전에 깨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잠들기 전에 너는 잠들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일어났을 때 잠들어 있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두 번의 기회를 줬다.

 

애인은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사람이었다. 머리가 스크린 터치 버튼도 아니고 대면 잠이 오는 게 어딨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 나는 애인이 먼저 잠드는 것이 몹시 싫었다. 나를 두고 떠나지 마! 큰 소리를 내고 작은 소리로 달래고 몹시 보채고 일부러 침대를 구르며 기척을 냈다. 그러다 마침내 자비를 구했다. 잠들기 십오 분 전에 알려만 준다면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겠다고. 그러나 누가 십오 분 후의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애인의 잠은 자주 갑작스러웠고 종종 예상이 가능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미 잠든 사람을 깨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깊이 잠든 애인의 옆에서 나는 몸의 무게로 침대를 억누른다. 시위하듯 길게 누워 잠을 재촉한다. , 달려. 빛을 젖혀. 막힘없이. 나는 까맣게 될 거야. 깊이깊이 검정으로 갈 거야. 그러나 흰 어둠. 꼭 이럴 때 어둠은 충분히 검지 않지. 길 건너 새로 생긴 건물은 밤새 빛을 뿜는다. 망치를 들고 부수러 갈까? 창문을 깨고 기둥을 동강내고 간판을 끌어내려 박살을 낼까? 분노로 누운 몸이 또렷해진다. 곧 방의 사물들이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모든 영혼이 불시에 일어난 듯 사방이 사납다. 이렇게 좁은 방에서. 영혼이 촘촘히 치솟은 이곳에서 애인만이 누워 잠들어 있다.

 

참아. 눈을 감아. 그리고 잠든 애인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호흡을 맞춰본다. 들숨에 들숨. 날숨에 날숨. 꽤 의식하며 맞춘다고 했는데 자꾸 엇나간다. 합창처럼 되지 않는다. 속이 상했다. 네가 몹시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내쫓긴 것 같았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 무엇보다 난처했다.

 

나는 이러지도 못해. 저러지도 못해. 우리는 지금 다르니까. 다른 세계에 있으니까. 잠이 든 너와 잠에 없는 내가 달라서. 우리가 너와 나로 다르다는 것이 사무친다. 너는 꿈으로 갔고 나는 네 꿈의 세계에서 아무런 용도가 없다. 그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나는 잠이 든 너에게 속해 있지 않다. 너는 너의 꿈에, 나는 지금 여기 있다. 흰 어둠 속에서. 나를 두고 잠드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용서는 우리가 같은 차원일 때 할 수 있다.

 

꿈이 차단하는 세계를 안다. 수면은 애인의 삶에 내가 포함될 가능성을 가로막는 시간이다. 몸을 붙이고도 접촉할 수 없다. 애인의 의식이 접촉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가망이 없다. 그 가망 없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가 마치 하나인 듯 침범할 수 있는 듯했던 가능성이 나는 너무 좋았던 것 같다. 가능성이 나를 착각하게 해주는 게 좋았던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서로를 번갈아 침범하고 있다고. 장난스러움, 사랑이 느껴지는 무혐의의 놀이가 되는 일을. 이제 네가 교류하는 것은 오직 잠뿐이다. 나는 있을 수도 있지만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모습을 본다. 몹시 말랑해 보인다. 가슴이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찰랑인다. 문득 손을 집어넣고 싶어진다. 그것은 유령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아니라면 꿈속에서? 무엇이든 나는 할 수 없다.

  

우리가 동시에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나는 언젠가 너에게 또 나를 두고 떠나지 말라고 할 것 같다.

그럴 땐 이야기해줘.

꿈속에서 만나.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나는 안심을 할게.

 

 

참은 것: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2)

 

학교 주위를 배회하곤 했다. 부지라고 부를 만한 넓은 땅이 대학에 있었다. 강의동 주변으로는 연못이 작게 패어 있었고 백조, 정확한 학명은 모르나 모두가 백조라고 부르는 흰 새 두 마리가 부단히 발을 저으며 수면 위로 매끄러운 곡선을 흘렸다.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반으로 접으면 꼭 맞을 만한 것들, 그런 것들에 쉽게 이끌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인 횡단보도, 높이와 모서리의 각이 균일한 건축물, 짝수로 정렬된 강의실 책상에 안정을 느꼈다. 하늘은 구름의 모양이나 솟은 건물, 나무가 내려앉은 불규칙한 지평으로 좌우와 상하 대칭이 불가했으나 마음에 편안을 주는 몇 안 되는 것이었다.

 

그애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뜻밖의 만남이었으나 그다지 놀라움은 없었다. 간단한 인사가 있은 직후 그애는 가방 지퍼를 거침없이 내렸다. 그리고 속을 뒤집어 까 보여주었다. 과자 한 봉지가 있었다. 자기 가방 안에는 늘 과자가 한 봉지 들있다고 했다. 그애의 동작은 성급하나 뻔뻔하지 못해서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바람이 몹시 잠잠했다. 교실 안처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거나 하는 일도 없이 가만있었다. 가방을 열어 보여줄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그애가 그랬다.

 

너와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는 되는 건가?

 

나는 그애를 대강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와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질문을 함으로써 더는 대강이지 않겠음을 그애가 선언하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깨달은 듯, 그애와 친구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지인? 동료? 학우? 무엇도 꼭 맞지가 않았다. 그애와 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없는지를 빠르게 셈하려다 그만두었다. 그애가 말하는 친구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알 것 같았다. 정확히는 알 것 같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애가 말하는 친구가 될 마음이 나에게 없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애의 친구는 싫은 것은 아니지만 부담이 됐다.

 

그애의 친구는, 아무래도 내가 전보다 그애에게 각별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자신은 자유롭게 친밀감을 표현할 것이며, 나는 순순히 수락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그것은 그애에게 몹시 중요한 일인 듯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나에게 넘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귀가 꼭 맞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애가 원하는 사랑, 친애, 깊고 단단한 우정을 교환할 자신이 없었다. 받고 싶지 않았고,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보였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얼굴. 투시되는 그애의 부끄러움. 도무지 무마할 수 없는 욕망이. 너와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발음 아래로 온힘을 다하던 발짓을. 왜 나는 보고 마는 사람일까? 내 지난 경험 때문에? 나는 이런 건 모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다면 모르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그런데 그게 안 됐다. 나는 안 됐다. 그게 좋고 너무 싫었다. 나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애와는 친구가 되지 못했다.

 

거듭해서 그런 일들이 지나갔다.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그리고 잘 되지 않는 일이. 나는 친구가 되어달라 요청하는 일을 참는 사람이 됐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참지 않아도 참아지는 사람이 됐다. 그것은 나 자신의 창피도 물론 있었겠지만 더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보는 일이 소용없음을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름을 붙이고 부르는 일의 힘은 안다. 그래도 정작 친구라 명명하는 일이 정말 필요한 때가 잘 없었기 때문 같다. 무장한 괴한이 누구를 붙들고 내 앞에서 얘가 네 친구야? 네 친구면 살려줄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아직까진 없었다. 아무튼 나는 친구가 되어달라 권유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약간의 놀라움과 놀랍지 않음이 있었다. 상대와 친구가 되거나 친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친구가 되는 일은 대부분 기쁨을 줬다. 가슴이 충만하고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친구가 되지 않는 일이 전부 슬픔이 되지는 않았다. 친구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은 나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내 착각일 수 있지만. 내가 다정한 오해를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에게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가능한 한 좋은 사람이고자 했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려 의식하고, 상대에게도 좋은 사람의 행색을 갖추려 했다. 실패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존재를 여럿 만들게 됐다.

 

서로 친구라 부르지 않아도 좋았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었다. 오히려 그 거리가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남게 만들기도 하고. 친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친구가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겠지. 나만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그런데 반드시 그 자격을 주고받지 않아도 좋았다. 함께 살아졌다. 친구가 되어줄래?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냥 네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좋았으면 좋겠다.

 

이마가 밝고 큰 소리를 내지만 소란하지 않았던 아이에게 물건을 빌려준 일 있다. 체육복 따위였던 것 같다. 그애는 체육복을 돌려주면서 매점에서 산 작은 간식을 함께 줬다. 그러고는 땡큐, 인사했다. 나도 땡큐, 답했다. 이후로 물건을 빌리고 돌려주는 일은 없었다. 복도에서 종종 그애를 마주쳤다. 반색하며 서로를 껴안는 일은 없었다. 눈인사가 오갔을 뿐이다. 충분했다.

 

하늘다리의 양 난간에는 꽃이 있다.

꽃과 꽃은 마주보고 있다.

정면으로. 조금도 닿지 않고 아름다운 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