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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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전날은 몹시 흐렸다. 이심은 팀장이 보낸 공지사항 때문에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깼다. 찌뿌둥한 몸으로 출근을 준비하면서는 오늘 한 시간 일찍 퇴근해도 된다고 전한 사람이 팀장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휴가를 낸 채 메시지로만 공지를 전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명확한 사유조차 밝히지 않고서 일주일씩 휴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점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식탁 앞에 앉은 이심이 퇴근 시각을 이야기하자 모영이 겨우 한 시간 일찍 보내주느냐며 혀를 찼지만, 이내 환한 얼굴로 오늘 저녁식사를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말했다.

월말의 식재료 사정이야 빤했으므로 이심은 너무 애쓰지 말라고 응수하고 집을 나섰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과 매캐한 먼지 냄새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지하철에 오르자 자발적으로 테크노 비엔날레 개막식의 객석을 채우겠다고 뜻을 모은 공무원들을 향한 각계각층의 응원 메시지가 공영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엽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응원 영상은 왕진을 보며 이동하는 중에도, 퇴근길에도 이어졌다. 손에 손을 잡고 애국가를 부르는 경기도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심은 뉴스 화면 위로 단단하고 귀퉁이가 날카로운 돌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한가운데를 맞혀서 산산조각을 내버리면 잠시나마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돌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조차 까마득했다. 바뀐 화면에 경총이 등장했으므로 이심은 단념하고 고개를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이심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집안을 가득 채운 것은 갓 지은 밥 냄새가 확실했는데, 풍미가 평소에 먹던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절로 군침을 삼키는 이심 앞으로 달려온 아이가 낭랑한 음성으로 뭐 만들었는지 맞춰보세요!” 하며 웃었다. 이마와 콧잔등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모영은 집안에서 뛰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며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더니 맞춰보세요!” 하고 아이의 말을 따라 했다. 모영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앞뒤로 나란히 서서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심은 새삼스레 둘이 얼마나 닮았는지 실감했다. 그러자 급작스럽게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모영이 자신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인 결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심이 아이의 얼굴에 밴 땀을 닦아주자 모영은 힌트가 필요한가봐하면서 검지 끝으로 아이의 볼을 건드렸다.

힌트는, 콩나물이에요!” 아이가 이심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콩나물무침이라고 답하자마자 !”이라고 말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이 즐거워 보여서 이심은 일부러 오답을 쏟아냈다. 아이는 콩나물볶음, 콩나물튀김, 콩나물부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신나게 땡! 을 외쳤다. 모영이 아이를 번쩍 안아들더니 우리집에 콩나물 바보가 사네. 그치?” 하며 눈을 맞췄다.

밥솥을 열기 전에 모영은 자기 집에서 백 년 동안 이어진 레시피로 지은 밥을 공개하겠다고 하더니 평소에는 면기로 쓰는 대접에 밥을 푸기 시작했다.

어머, 그만 줘.” 이심이 모영의 어깨를 짚으며 웃었다. “무슨 밥을 그렇게 많이 퍼.”

먹어보면 더 달라고 할지도 몰라. 이건 진짜 쭉쭉 들어간다니까.”

소복하게 푼 밥 옆으로는 콩나물 냉국과 간장종지가 놓였다. 싱싱한 생 깻잎 위에 양념장을 얹은 깻잎 반찬도 있었다. 깻잎은 또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묻자 모영은 , 너무 마지막 만찬 같아?” 하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이심은 모영을 따라 아무것도 끼얹지 않은 밥 한술을 입에 넣었다. 듬뿍 든 콩나물과 사이사이에 씹히는 고기는 부드러운 식감으로 밥알과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졌다. 구수하고 담백한 밥 안에서 묵은지가 주는 개운함이 의외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때요? 맛있어요?”

모영이 곧잘 그러듯 한입을 뜨기 무섭게 두 눈을 반짝이며 감상을 재촉하는 아이를 향해 이심은 정말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도대체 이 재료를 다 어디서 조달한 거야? 밥 먹고 나서 양심 고백 할 거면 차라리 지금 해.”

나왔다. 언니의 일단 잠깐만’!”

모영이 깻잎 한 장을 아이와 이심의 밥 위에 차례로 얹어주며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깻잎은 자못 근사해 보일 만큼 짙은 녹색을 과시했다. 향기로운 쌉쌀한 맛은 콩나물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모영은 걱정할 것 없다고, 그저 아이에게 감사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얘가 나 닮아서 인사성이 바르잖아. 윗집 어르신들이 얘가 인사하는 거 보더니 얼마 만에 어린애 보는지 모르겠다면서 잘 먹이라고 배양육이랑 김치랑 다 나눠주신 거야.”

콩나물도요!” 아이가 말했다.

맞아, 콩나물밥에서 제일 중요한 콩나물도.” 모영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깻잎은 새로 생긴 스마트팜 직판장에서 반값 세일하길래 딱 오늘 먹을 양만 조금 샀고.”

이심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인 후에 밥 위에 간장을 살짝 끼얹었다. 그러고 나자 콩나물밥의 간이 완벽해졌으므로 모영의 자신감 어린 태도에 납득이 갔다. 따끈한 밥을 넘기는 사이에 입고 있던 티셔츠가 등허리에 달라붙을 정도로 땀이 났다. 종일 더위에 시달리며 땀을 흘린 몸이 다시 한번 흠뻑 땀에 젖자 묘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이열치열이라는 말에 담긴 감각인가보다 실감하면서도 이심은 냉국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정말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말에 미소 짓는 모영의 얼굴에도 연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심은 아예 수건을 가지고 와서 모영에게 건네고 아이의 이마도 닦아주었다. 숟가락을 든 채 이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아이는 이심의 손길이 목덜미를 향하자 간지럼을 타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식곤증으로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후에도 식탁 위에는 낭랑한 웃음소리가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에 이심은 반복해서 그 웃음소리를 떠올렸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묘한 불안감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의식되기 때문이었다. 피곤한데다 배까지 불렀지만 아이처럼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자리에 누워봤자 뜬눈으로 몇 시간이고 뒤척일 게 빤했으므로 이심은 카페인 성분이 없는 차를 찾아 찬장을 뒤졌다. 그러자 곁에 다가온 모영이 얘기할 게 있다며 이심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영은 이심의 침대에 걸터앉더니 그대로 옆으로 몸을 기울여 침대 위에 모로 누웠다.

밥 잘 먹여놓고 이러면 무섭단 말이야.” 이심이 모영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뭔데 그래.”

모영이 입을 닫은 채 자기 옆자리에 누워보라며 이부자리를 툭툭 건드렸으므로 이심은 침대 위로 올라가 모영과 마주보고 누웠다. 그러자 모영이 한차장 있잖아하고 입을 열었다.

머리에 칩 심었다는?”

. 어제 한차장이 다시 면담하자고 불렀어.”

면담이라……이심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 이제 그만 회사에서 나가달래?”

결국은 그 얘기나 마찬가지야. 지금 하는 교재 업무가 이달로 끝나니까, 그거 말고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직무가 있을지 스스로 한번 고안해보래. 기획안을 써내면, 최대한 인정을 발휘해서 검토해보겠대. , 어찌되든 약속대로 양육비는 끝까지 준다더라.”

인정을 발휘해?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모영이 기운 없이 웃었다. “그래도 나 대신 화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네.”

제대로 화를 내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미친 새끼들, 너 몰래 그런 일을 막 벌여놓고 이제 와서 뭐?”

그러게.” 모영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진짜 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는데 말이야. 막상 오늘 한차장 앞에서는 그냥 얌전히 알았다고 하고 나왔어.”

그나마 양육비도 안 줄까봐?”

, 그렇기도 한데……

어느새 밤이 되었지만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옅은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므로 이심은 창을 닫고 다시 모영 옆에 누웠다.

쓸모없는 사람한테 돈 주는 회사는 없고, 회사 입장에서 이제 내가 필요 없는 건 맞지 않나 싶어서. , 그런 생각은 입사할 때부터 했으니까 새삼스럽지는 않았다고 할까. 애초에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싶어서 그냥 맥이 탁 풀려버렸어. 어디 가나 그렇지 뭐.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아이고, 왜 그래.” 이심은 한숨을 내뱉으며 모영의 어깨를 짚었다. “, 설마 집에서도 그런 생각 하는 건 아니지?”

하는데.” 모영이 대답했다. “그래도 집에서는 내가 쓸모없다는 생각으로 한참 동안 우울하지는 않아. 그럴 때는 얼른 언니 상태가 어떤지 보거든.”

스팀 타월도 가져다주고, 어깨도 문질러주고 하려고?”

.”

모영이 즉시 대답하자 이심이 웃었다. “다 네가 나한테 해주는 거잖아. 너한테는 뭐가 남아? 너무 너만 손해보는 거 아니야?”

너만 손해보는 거 아니야? 하고 진지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남잖아. 그런 사람이 가족으로 항상 내 옆에 있다는 게 안심이 돼.”

빗발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조금씩 더 또렷해졌다. 창 너머가 연이어 번쩍거리자 옆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모영이 아이에게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이가 먼저 달려와서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집안에서 뛰면 안 된다니까.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모영이 주의를 주었지만 모나지 않은 어투였다. 한번 더 번개가 치자 이심은 움찔거리는 아이의 작고 동그란 어깨를 끌어안았다. 모영은 양팔을 활짝 벌려서 아이와 이심을 한 번에 감싸안았다.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이렇게 모여 있으니 함께 작은 배 위에 있는 것 같다고 아이가 말했다.

배 타고 가고 싶은 데 있어?” 모영이 물었다.

아이가 잠시 고민하는 동안, 이심은 배에는 돛이 필요한데라고 말했다. 모영이 돛을 달아야겠다며 아이의 왼손을 잡고 번쩍 들어올리자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튿날은 맑았다. 공영 뉴스에서는 테크노 비엔날레 기간 동안의 냉방비는 감세해준다며 온 가족이 다 함께 개막식을 시청하라는 캠페인이 이어졌다. 동시에 이심의 메이드에는 무단 불참시 받게 될 불이익에 관한 알림 메시지가 매 시간마다 왔다. 출발하기 전부터 기가 질린다고 푸념하는 이심에게 모영은 막연한 불안감을 토로했다.

얘 데리고 이렇게 사람 많이 모이는 데 가는 거 처음이잖아.”

슬럼에 갔을 때도 별일 없었는데 뭐.”

모영은 이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도, 외출복을 갈아입히면서도 아이에게 자기 곁을 떠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오늘 몇만 명이 모인대. 명심해야 돼. 항상 내 손을 딱 잡고 있어.”

걱정 마세요. 말썽 안 피울게요.”

아이는 얌전하게 대답했지만, 모영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집에서 나서는 길에 다시 한번 절대로 혼자 움직이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저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박수 부대 노릇을 하는 일에 걱정이 지나친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모영을 다소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던 이심은 여의도로 향하는 지하철 안을 발 디딜 틈 없이 채운 사람들 사이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로소 오늘 모일 인원의 규모를 실감했다. 원래 여의도에 사는 사람들을 놔두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구시렁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만 좀 밀치라며 신경질을 내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처음 겪는 인파에 어깨를 움츠린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이 되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는데, 진정한 고난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후에 시작됐다. 행사장 안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오후의 땡볕 아래 늘어선 긴 줄 끝에 서서 짐 검사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내리쬐는 직사광선에 정수리가 따끔거렸고 은근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미열이 나는 것 같아서 이심은 손등으로 자기 이마를 짚어보았다. 모영이 괜찮느냐고 물으며 가방 안에서 물병을 건넸다. 그러고는 땀이 밴 손바닥을 손수건으로 닦은 뒤 잽싸게 다시 아이의 손을 쥐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크기로 흐릿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싶더니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울린 후에 이번에는 지나치게 큰 소리로 나왔다. 세 살 이하의 유아와 함께 참석한 가족은 줄의 앞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세 살이 안 되는 아이들까지 동원령 안에 포함시켰다니. 이심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뜨거운 숨을 내쉬었을 때, 긴 줄의 어딘가에서 경총에 대한 원색적인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옳소! 이심은 속으로 즉시 그렇게 외쳤다. 분명 속으로 외쳤건만 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돌연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이심은 일순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었다. 표정으로 짐작건대 돌아선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는 이심 또래로 보였는데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낀 채 이 모든 게 미친 짓이며, 이런 미친 짓에 동원되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거라고 이심은 말하고 싶었다. 만일 이 순간 그녀가 먼저 불만을 표현한다면 아무것도 재지 않고 목소리를 보태고 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얼굴에 담아서 드러냈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앞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세계가 주목하는 테크노 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시민 스스로 언행에 품위를 지켜달라는 내용이었다. 모든 행동을 굽어보고 있다는 듯 단호한 음성이었다. 고작 서너 발자국 앞으로 이동했을 때 안내 방송이 한번 더 반복됐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심이 왜 그러느냐고 묻는 것과 거의 동시에 등뒤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도입됐다는 치안 유지 전용 안드로이드였다. 기존의 경찰 제복보다 다소 흐릿한 색감의 청회색 제복을 입은 이 존재를 이심은 며칠 전에 공영 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아나운서는 안드로이드와 악수를 나눈 뒤에 악력이 정말 대단 한데요!”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설령 뉴스를 통해 본 적 없다 하더라도 그간 흔히 보았던 안드로이드와는 쓰임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챘을 거라고 이심은 생각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안드로이드들이 불필요한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지 않도록 일반 성인보다 작달막한 체형에 밝은 표정과 태도를 갖추어 대체로 둥근 원의 이미지를 가졌다면, 눈앞에 선 존재는 길쭉하게 뻗은 직사각형처럼 보였다. 덩치는 웬만한 성인 남성을 압도할 만큼 컸으며 표정과 어조는 지극히 건조했다. 아이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이심은 더워서 그럴 거예요하고 둘러댔다. 청회색 유니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몇 초쯤 이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행사장 앞쪽으로 향하며 다시 안내 방송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무게 잡으러 온 거야, 뭐야.” 모영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니폼도 되게 촌스럽네.”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이심은 피식거렸다. 저토록 칙칙한 제복을 달갑게 받아들일 만한 존재는 안드로이드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 점을 되새겨본다 한들 불볕더위 아래 동원된 처지가 나아질 리 없었다.

이심의 가족이 행사장 안으로 입장하여 지정된 자리를 찾고 의자를 펼쳐 앉기까지는 이후로도 한 시간이 더 걸렸다. 행사장 내부라고는 하지만 테크노 비엔날레라는 이름과 견주면 실소가 터질 만큼 초라한 모습이었다. 국회의사당과 B 타워를 마주한 공원과 공터에 줄을 맞춰 접이식 의자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한 공간에는 냉방은커녕 그늘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차양이 있는 자리는 오직 행사장 앞쪽의 외신 기자석뿐이었으나, 그곳에 있는 기자들도 더위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여느 때처럼 B 타워의 이십층 건물 전면에 흐르는 공영 뉴스에서는 테크노 비엔날레 기간 동안 평소보다 저렴해지는 전기세와 데이터세를 홍보하기에 바빴다.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심은 목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언젠가 서안의 집 베란다에서 B 타워를 마주보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 역시 고작 몇 해 전이 아니라 먼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지독한 더위 속에 모든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의자가 수평이 맞지 않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도 몇 차례나 자세를 바꿔 앉아본 후에야 확신할 수 있었다. 모영이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했으나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양볼이 빨개진 아이가 이심의 손목을 쥐었다.

저 할 얘기가 있어요.”

네 의자도 흔들리니?” 이심이 멍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팔이 자기 몸에 달린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요. 그거 말고요.”

그럼, 우선 물 한 모금 먹고 숨 좀 돌리자. 오 분만 있다가.”

이심이 겨우 물 한 모금을 넘겼을 때, 막 자리를 찾아온 박선생이 이심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선생, 보니까 이 줄에 아예 팀장 자리가 없어요. 잘렸다는 말이 사실인가봅니다. 생전 가지도 않던 휴가를 일주일이나 쓰는 게 영 이상하다 싶더라니만은.”

잘리다뇨? 팀장님이 왜요?”

아들 얘기 들었잖아요.” 박선생이 주위를 살피며 이심에게 바짝 다가섰다. “아래층에 구선생 알죠? 소아과 전공.”

, 알죠.”

구선생한테 조용히 자기 애 좀 봐달라고 빌었답디다.”

그런다고 잘려요?”

구선생이 위에다 보고를 했나보죠. 아니면 팀장이 위에 불려갔을 때 개겼거나.” 박선생이 이심의 어깨 너머를 향해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김선생 여기에요!”

김선생네는 반대쪽 출구로 들어와서 헤맸다며 청백색 제복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녀는 청백색 제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깐 기다리자는 듯 눈짓을 하더니, 의자를 펴자마자 비딱하게 앉아서 화살표 게임에 열을 올리는 자기 아들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아유, 지겨워. , 도대체 이 단순한 게 뭐가 그렇게 재밌냐.”

이건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심은 이런 대화를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백색 제복의 등이 멀어지자 김선생이 제복 꼴은 또 저게 뭐냐고 한마디 던졌다.

그러게. 아주 국회의사당 지붕 뜯어다 만든 줄 알았어.” 박선생이 거들었다.

일리 있네.” 김선생이 피식거렸다. “아무튼 저것들이 옆에 있어서 알은체를 못했는데, 나 여기 입장하면서 저기 앞에서 얼핏 선민이를 본 것 같아. 아니, 걔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지?”

그녀의 입에서 선민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아들이 쉼없이 움직이던 손동작을 멈췄다.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심은 필시 저 아이가 어떠한 형태로든 선민을 알고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묻는다고 해서 답을 줄지는 알 수 없었는데, 고민하는 사이에 공영 뉴스에서 모두 착석해달라는 안내가 흘러나와 때를 놓치고 말았다.

청회색 제복들이 서 있는 사람들을 꼼꼼히 단속하여 자리에 앉히고서도 개막식은 꼼짝없이 땡볕 아래 앉아 사십 분을 더 기다린 후에야 시작되었다. 타워의 중앙에 노을이 반사되어 황금빛 띠를 두른 듯 번쩍이는 순간, 웅장한 음향과 함께 개막식 첫 무대의 주인공인 아이돌 그룹이 노을빛을 가르고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본격적인 공연은 B 타워 표면의 아래쪽에서 이루어졌다. 일몰에 맞춰 연출한 듯 그들이 마지막 곡을 마치고 퇴장하는 시점에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조금 전까지 황금빛을 튕겨내던 B 타워의 표면이 검게 물든 것과 동시에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주변의 건물과, 객석이 위치한 공원의 가로등까지 모두 꺼지며 사위가 어둠으로 덮였다.

곧이어 새까맣게 물든 B 타워의 표면 위로 한 점의 희미한 푸른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지구의 형상으로 구현되었다. 이심은 아이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고 어깨를 감싸안았다. 마치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듯한 홀로그램 속 지구의 푸른빛이 이번에는 태극 문양으로 탈바꿈하며 타워의 표면이 거대한 태극기로 변했다.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가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서울의 랜드 마크들로 변화하며 화려한 빛을 뿜어냈다.

객석의 곳곳에서 감탄사가 비어져나왔으나 오직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뿐이었다. 덥다며 칭얼거리는 소리, 얼마나 울었는지 쉰 목소리로 우는 소리도 섞여서 들려왔다. 넋을 잃고 신기해하는 아이나 괴로워하는 아이 모두 이 자리에 타의로 끌려온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심은 입이 썼다. 얌전히 볼모로 잡혀 있는 사람들 앞에 경총의 홀로그램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총은 타워의 표면에서 반짝이던 서울의 랜드 마크 중 한가운데 위치한 국회의사당의 둥그런 청회색 지붕을 가르고 튀어오르듯 등장했다. 싱글거리는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넨 그는 개막식에 참석한 국내외 기업가들을 직접 소개하고 박수를 유도했다. B 타워 내부의 카메라 앞에 서 있을 경총을 포함하여 그가 소개하는 국빈 중에서 이 무더위 속에 직접 자리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참석이라는 말을 써도 되는 것일까. 이심은 부당하다고 여겼다. 행사장을 메운 사람들 역시 엇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는 듯 경총이 유도한 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경총은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일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터였다. 이 쇼의 실제 관객은 방금 경총의 입으로 한 명 한 명 언급한 기업가들이라는 사실을 이심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경총은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내빈 소개를 마친 그는 이번 행사를 위해 대한민국에 최초로 도입된 치안 유지용 안드로이드를 직접 소개하겠다며 획기적인 효율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경총은 쇼호스트라던 최선생의 말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쇼의 진짜 관객들에게 자기가 이끄는 정부는 언제 어디서 누구든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고스란히 소비자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 이런 맥빠진 행사를 열었을 것이다.

이십층 높이의 B 타워 표면을 가득 장악한 경총. 객석과 무대가 뒤바뀐 자리 중심에 선 쇼호스트인 그는 거대했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이심은 아득한 무기력감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로 그때였다.

언니, 저기 좀 봐. 경총 머리 위에.”

모영이 가리킨 곳에는 빛무리가 떠 있었다. 여러 빛깔의 홀로그램이 섞인 채 이지러진 타원형을 띤 빛이었다. 천사의 후광을 연출하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이심은 기가 질렸는데, 이내 빛무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총의 입에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언급된 순간, 이심은 그의 머리 위에서 깜빡이는 홀로그램의 형상을 비로소 파악했다.

그것은 화살표였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경총이 국가의 미래 비전과 기술을 하나로 잇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오색 화살표가 같은 색끼리 겹쳐지며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객석에서 웅성거림이 번져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커다란 검은 화살표가 경총의 입을 가리듯 그의 얼굴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새빨간 화살표는 마치 그의 몸을 두 동강 내기라도 할 것처럼 정수리부터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 파란 화살표가 뒤를 따랐다. 행사장을 메운 수만 명의 사람들 사이로 박수와 웃음이 터져나왔다. “화살표가 더 필요해!” 앳된 목소리를 가진 몇몇이 메이드를 찬 손을 번쩍 쳐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회색 제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깃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머뭇거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자신의 메이드 위로 화살표를 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갔다.

이심 주위에서는 맨 먼저 김선생의 아들이 손을 뻗었다. 김선생과 그녀의 남편은 위험을 무릅쓰지 말자며 자기 아들을 자리에 앉히고자 필사적이었다. 경총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홀로그램 화살표 가지고 창피를 주는 것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그들은 애원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고작 망신을 주는 데 힘을 보탠 후에 테러범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객석을 둘러싼 청회색 제복들이 물리력을 행사할까봐 떨 필요는 없으리라고 이심은 추측했다. 단지 팰로앨토 합의에 의거한 믿음은 아니었다. 지금껏 경총이 직간접적으로 벌인 일들을 고려하면 그에게는 제2의 팰로앨토 합의를 요하는 참사를 일으킬 만한 자질이 차고 넘쳤다. 다만 오늘은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경총이 방금 소개한 기업가 중에 치안 유지용 안드로이드를 만든 회사의 대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외신이 보도하는 행사장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한 이곳에서 청회색 제복들이 무자비한 진압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선 목적이 분명한 이상 경총은 어느 정도의 망신과 소요를 감수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심이 아이의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되뇌는 동안 김선생의 아들이 뻗은 손 위로 녹색 화살표가 떠올랐다. 그 빛의 일렁임은 이심에게 더이상 참고만 있지 말라며 손을 내미는 듯했다.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은 모영이었다. 모영은 한 팔로 단단히 아이를 끌어안은 채 왼팔을 뻗어 녹색 화살표를 띄웠다. 마침내 이심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띄울 수 있는 화살표 하나를 더했다. 이심의 것까지 더해지면서 녹색 화살표는 주먹만한 크기가 되었다. 이내 박선생이, 뒷줄에 있던 사람들도 합류하자 화살표는 얼굴 크기가 되어 솟아올랐다.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화살표를 타워 쪽으로 밀어올리는 일이 객석 전체로 번졌다. 조금 전까지 행사를 견디고 있었던 사람들이 축포를 쏘아올리듯 홀로그램 화살표를 머리 위에 띄우고 합치고 밀어올렸다.

경총은 그제야 사태를 보고받은 듯 질서를 강조하고 엄단을 입에 올렸다. 그는 예상대로 관객석의 행위를 테러로 못박았다. 그러나 얼굴 전체가 화살표로 뒤덮여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결국 개막식은 중단됐다.

청회색 제복들이 개개인을 제지하기를 포기하고 B 타워와 국회의사당을 사수하려는 듯 객석 앞쪽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은 그 시점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자극받은 더 많은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객석 뒤편에서 국회로 향하자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집에서 개막식을 시청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경총이 화살표에 뒤덮여 사라진 화면 하단을 비롯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인터넷에 게시된 웹페이지에 접속해서 링크된 자료를 열람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국가의 용인하에 이루어진 바이오 프로젝트의 전말을 비롯하여 임의적인 죄목을 기준으로 구금되어 있는 수천 명의 명단, 지도상에는 지워져 있는 사설 격리 시설의 주소와 시설 내부의 실체가 공개돼 있었다.

후에 이심은 시설 내부의 상황을 낱낱이 전하기 위해 자청하여 구금되는 길을 택한 최선생에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선생은 질 게 빤한 선거에도 투표하러 가잖아. 정말 찍을 사람 없다 싶을 때도 한 표 던지러 가고. 그거랑 비슷한 거지, 라더니 빙긋 웃으며 결국 핵심 아이디어는 우리 선민이 머리에서 나왔잖니하고 딸 자랑을 시작했다.

최선생의 가족과 조력자들은 불을 끄거나 문만 닫아도 접속이 원천 차단되는 라이파이LI-FI가 아니라 와이파이WI-FI가 일반적인 시대였다면 진작 더 폭넓게 해킹을 시도했으리라는 안타까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선생을 따라 무도회에 간 선민이 그곳에서 들은 수십 년 전의 음모론에 힌트를 얻어 타개책을 떠올렸다. 나노 로봇 크기의 공유기를 캡슐에 넣어 삼킨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움직이는 와이파이로 기능하는 방안을 고안해냈다는 것이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인간의 몸에 와이파이가 잡힌다던 과거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에 착안해 해킹할 방도를 떠올렸다는 사실. 그 점이 곱씹을수록 재미있어서 최선생은 구금 시설 안에서도 곧잘 히죽거렸다고 했다. 그 안에서 웃음이 나다니, 이심은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최선생은 진정으로 놀랄 만한 일은 그런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천재의 유전자에서 탄생한 선민이 랩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일.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한 채 금치산자를 연기해야만 했던 일이야말로 충격적인 것 아니겠냐고 최선생은 강조했다. 또한 랩실에서 방출된 직후에 자기 눈에 띈 선민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희수가 빠져나온 랩실의 상황은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한동안 쉬이 입을 떼지 못할 만큼 열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민이나 희수처럼 온전하게 태어나지 못한 수천 명의 소위 실패작들이 받은 취급은 의료 폐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까지 접한 이후에 최선생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띄게 되었다. 그러다 객사당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조차 위협이 되지 못했다. 샘플로 들여와서 이미 테크노 비엔날레 개최 전부터 암약하고 있었던 청회색 제복에게 잡혀가는 순간에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에 그간의 팽팽한 긴장이 풀어지며 웃음이 다 나더라고 했다.

최선생이 구금되었던 시설은 중간 규모였다. 그곳의 수감자는 갈등 조장 방지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잡혀들어온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존재감이 큰 쪽은 단연 바이오 프로젝트에 가담한 후 토사구팽당한 사람들이었다.

조직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수술을 받았으나, 활용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버려진 이들은 구금 시설 내에서 제법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몸담은 기업의 성격에 따라 어떤 이들은 뇌수술 이상의 요구를 받아 안구나 손, 팔다리의 일부 등 신체의 여러 부위를 내맡긴 후에 내쳐지지도 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외려 알아보지 못할 도리가 없었다고 최선생은 말했다.

밤마다 옆방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어. 박이사라고, 소규모 스타트업 중역이었는데, 뇌랑 안구를 세트로 수술했다는 거야. CEO가 단순 저장소 이상을 원했다나. 눈꺼풀을 깜빡이는 걸로 사진도 찍고 클릭까지 할 수 있는 몸이 됐는데, 그럼 뭐하니. 뇌를 잘못 건드렸는지 점점 두통이 심해지더래. 두 달쯤 되니까 아예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정도가 됐고.”

살아 있는 중앙 컴퓨터를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며 환호하던 CEO는 박이사가 격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업무중에 기절한 직후 내빼듯 해외 출장을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재수술 약속을 받고 다시 수술대에 누웠을 때 받은 처치라고는 회사의 데이터를 포맷하고 진통제를 놓아준 것뿐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업무상의 사소한 누락 사항을 빌미삼아 배임죄를 뒤집어쓴 처지였다. 신체적 고통과 배신감에 치를 떨던 그는 이곳에서 보고 들은 기억의 데이터를 해킹하여 세상에 알리도록 자신이 지닌 와이파이에 접속해달라는 최선생의 제안을 반기며 눈물마저 흘렸다.

최선생의 가족은 그간 해킹하여 취합한 자료를 공개하는 시점을 테크노 비엔날레의 개막일로 정한 뒤,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따져보면 긴밀히 연결된 자료를 덧붙이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은밀하지만 폭넓게 자행되었던 일들을 전 국민에게 신속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총이 화살표의 테러를 받고 사라진 후 B 타워의 하단에 명시되며 전국으로 송출된 웹페이지의 주소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함께 적혀 있었다.

부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객석에서 국회를 향해 나아가자고 소리치던 이들 사이에도 재빨리 해당 웹페이지에 접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 보라고, 상속세와 증여세가 폐지되고 비밀 유지 각서의 비호를 받는 부자들이 여태 이렇게 살고 있었다고 외쳤다. 전체 국민의 채 오 퍼센트가 되지 않는 소수가 차고 넘치고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소모하는 재화와 에너지의 면면을 보고 분노했으며, 그럼에도 그들이 내는 세금이 자신들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범인을 끝내 검거하지 못했다며 수사가 종결된 강력범죄 중 엄연히 국가가 묵인하여 부유한 피의자를 방면해준 사건들의 실체도 속속들이 드러났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경총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외침, 경총이 물러나야 한다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심도 목소리를 더했다.

그 순간 느낀 후련함은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형태로 이심을 압도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두려움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B 타워와 국회를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이심은 모영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까?”

모르겠어.” 모영이 대답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은 방향을 따라 걸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마구잡이로 미는 사람은 없으니까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방향이든 눈길이 닿는 곳마다 성난 인파가 끝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 자리에 동원되기 전부터 오랜 기간 누적된 분노를 품은 사람들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의 흐름을 손쉽게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을 촉발시킨 분노를 간단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인파의 움직임에 발을 맞춰 걸음을 옮기며 이심은 깨달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쉰 후 이심은 촉촉하게 땀이 밴 아이의 손을 좀더 꼭 쥐었다. 그러자 아이가 이심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해도 돼요? 제 이름이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모영과 이심을 따라 지은 듯 외자로 된 것이었다. 언젠가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게 될까. 그리하여 아이가 고민을 거듭하여 직접 정한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불릴 수 있을까. 모영이 낭랑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 아이가 집에는 언제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모영은 오늘 집에 갈 길이 멀겠지만, 걱정 안 해도 돼. 우리가 양쪽에서 네 손을 꼭 잡고 있으니까하고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앞으로 아주 많은 게 바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심이 모영의 말을 받아서 한번 더 반복했다. 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필시 바뀌어가리라고. 우리 세 가족의 삶 또한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변해갈 것이라고.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에는 연재 후기가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