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포옹과 펀치

혼비씨에게


혼비씨, 라고 처음 불러봅니다. 우리는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서로를 부를 때는 어디까지나 ‘작가님’이지요. 작가님 선생님, 이렇게 상대를 높이는 호칭은 깍듯하고 예의바르기는 해도 저는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의 대등함이 좋더라고요. 작가님 선생님은 셀 수 없이 여러 명이지만 혼비씨는 유일하기도 하구요. 그러니 친근하게 혼비씨, 라고 한번 불러볼게요. 

혼비씨와 서간을 주고받기로 하고, 참고삼아 다른 작가들이 교환한 편지를 묶어낸 책들을 집중적으로 찾아 읽다가 그만 낭패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독자의 눈으로는 그분들이 하나같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친구인 경우도 있고,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함께 일을 하기도 했으며, 삶의 어느 시기에 머물렀던 시공간이 겹쳐 함께 쌓은 기억도 적지 않더군요. 그분들은 뚜렷하게 서로 공유하는 경험과 그 해석의 맥락 안에서 인사를 건네고 의견을 묻거나 감정을 털어놓았습니다. 편지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각자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이메일이건 문자메시지건 주고받을 테고, 전화 통화를 하다가 당장 나오라며 약속을 잡을 수도 있는 사이로 보였어요. 그걸 확인한 순간 저는 이 편지를 보내도 될까 싶었습니다. 작가님과 서간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내가 있을까? 서로에게 뭔가 묻고 들을 만큼 우리가 친밀하지 않은 사이라는 게 드러나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습니다.

혼비씨에 대해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선 이름은 『피버 피치』의 작가 닉 혼비에서 따온 필명이라는 것. 그렇지만 한글로 발음을 적어두면 어쩐지 ‘혼비백산’ 할 때의 魂飛 같아집니다. 혼이 날아오른다니, 닉 혼비의 힘 뺀 유머 감각과는 반대편에 있는 비장한 느낌이라 두 가지 뜻이 충돌하면서 재미있습니다. 혼비씨는 축구를 보는 일과 하는 것을 다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뛰지 못하는 동안에는 실내자전거를 탔다고 했습니다. 등받침이 튼튼한 자전거를 골랐다고는 해도 한 번에 두 시간씩이나 실내자전거를 타다니 대단해요. 그리고 『아무튼, 술』을 쓸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만 절대 없으면 안 되는 건 커피라면서요? 이 점은 저와 비슷하네요. 관리해야 할 물건이 늘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미니멀리스트이지만 우주와 불상 모티브에만은 관대해서 여러 개의 장식품을 갖고 있다고도 합니다. 저는 그런 카테고리가 수십 가지는 되어서 자꾸만 집에 물건을 들이게 되는 맥시멀리스트이며, 혼비씨가 싫어하는 계절 여름을, 그 더위와 선명함을 특히 좋아합니다. 문득 바라게 되네요. 혼비씨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편지를 쓰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제가 혼비씨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이란 이렇게 얕고 단편적입니다. 친구 사이라면, 그 사람을 지켜보며 나만 알게 되는 점들이 두 사람의 역사 속에 늘어나게 마련일 거예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면들을 친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들키기도 하죠. 그런데 혼비씨에 대해서 제가 안다고 언급한 점들은 대부분 혼비씨의 에세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게다가 글에 붙들린 것은 한 시절의 일부일 뿐, 사람은 계속 흘러 변화하지요. 지금 제가 이 편지에 나열해둔 것들을 보고서도 혼비씨는 이럴지 몰라요.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영화 <벌새>의 대사) 

저 역시도 어느 독자가 지금까지의 제 글을 부분부분 요약 발췌 언급하며 저라는 사람을 정리해버린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할 것 같아요. 그건 나이지만 또 내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어디까지나 혼비씨의 글을 좋아하며 읽어온 독자이고, 더 읽고자 하는  독자라는 얘기였어요. 회사원이기도 한 혼비씨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언젠가는 글을 쓰지 않고 생활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본업이 따로 있는 혼비씨에게는 인생의 긴 기간 가운데 에세이를 쓰는 시기가 아주 일시적인 상태일 수도 있다고요. 저는 그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일만은 없어야 한다고 믿고,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한글 사용자들 전체에게 매우 애석한 상실이 될 거라 생각해요. 혼비씨가 쓰는 글을 더 읽고 싶습니다. 제가 수신자를 자처해 혼비씨가 뭐라도 더 쓰게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제가 세상에 베풀 수 있는 틀림없는 선행일 거예요.  

산문집 『다정소감』에서 혼비씨는 자신의 글에 패턴이 있다고 썼어요. ‘뭔가 힘든 시련을 겪고 있다 → 그걸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이 다정을 베푼다 → 그 다정을 통해서 회복하고 괜찮아진다’는 유형의 경험이 자신의 글에 소재가 된다고요. 그 패턴이 너무 반복되기에 오히려 글을 쓸 때는 피하게 된다고도 했죠.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혼비씨의 글을 읽을 때, 저의 눈에 들어오는 다른 패턴의 무늬들도 존재합니다. ‘어떤 현상이 있다 → 그것을 개탄하거나 일침을 놓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 그 사람들이 오히려 편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오해나 편견을 받아온 사람들을 변호하고 옹호한다’ 이런 식의 패턴입니다. 

혼비씨 글에는 쉽게 단정짓는 판단, 함부로 폄하하거나 낮춰 보는 시선, 때로는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까지도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붙드는 손짓이 있어요. 그래서 읽을 때 상쾌해지나봅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관람하며 팝콘 집어먹고 사이다 마실 때의 시원함을 주는 게 아니라, 읽는 내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그런 글들이에요. 제 안에도 존재하던 어떤 편협함, 치우침, 뾰족함과 완고함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비씨에게 보이는 첫번째 패턴이 포옹이라면 제가 발견하는 두번째 패턴은 펀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맞아요, 안아주다가 또 때려주는 혼비씨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둔감한 저는 좀처럼 가닿기 어려운 다정함과 예민함이 거기 존재합니다. 

안아주고 때려주는 혼비씨 글은 또 한편으로 웃겨줍니다. 혼비씨는 눈이 흐린 사람들이라면 심상하게 지나칠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유머 사냥꾼입니다. 회사를 계속 다니는 이유에 대해 ‘퇴근하는 게 너무 좋아서 출근을 멈출 수가 없다’고 설명하다니 이보다 완벽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주병에서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로부터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청아함을 포착해낼 때면 가려운 등을 누가 긁어줄 때 같은 짜릿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아무튼, 술』). 게다가 말장난의 빌미가 생겼을 때는 양보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죠. 상주 곶감 축제에 가서 곶감 장아찌, 곶감 돈까스, 곶감 육포까지 온갖 음식을 맛본 뒤에 도저히 ‘곶감당’이 안 된다고 할 때 역시 이 사람은 농담의 기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한편 완주 와일드푸드 축제에서는 애벌레 주스와 돼지 코를 먹다가 그만 포기한 참가자를 보면서 “두 명의 몬도가네 벌써 가네”라고 말장난을 치죠(『전국축제자랑』). 혼비씨의 이런 언어유희는 종종 과감한 춤동작 같습니다. 저는 그런 춤을 출 때, 머쓱해 발을 빼기보다 뻔뻔하도록 진지한 사람 앞에서라면 같이 용기를 내서 스텝을 밟아볼 것 같아요. 앞으로의 편지에서 혼비씨를 웃게 만든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지루하거나 고된 순간도 많은 일상이지만, 저 역시 혼비씨에게 답장을 쓰기 위해 웃음의 필터로 바라본다면 삶이 훨씬 흥미진진해질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심지어 감히, 혼비씨를 웃겨볼 수도 있을까 하는 작은 포부를 품어봅니다. 

여러 독자들 중에 첫 독자가 되어 혼비씨의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아직 충분히 친밀하지 않은 우리의 서신 교환이야말로 이제는 사라진 고전 펜팔의 전통에 부합하는 무언가가 될 것도 같습니다. 글을 통해 만나는 우리는 서로가 보여주는 서로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상대가 허락하는 각별함만큼만 쌓아나갈 수 있겠죠. 그건 꽤나 거리를 둔 소통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더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도 느껴집니다. 웃다보면 사람은 각을 잡고 앉아 있던 자세며 근엄하던 표정을 무너뜨리고 옆 사람에게 몸을 기대거나 치기도 하면서 긴장을 풀게 되니까요. 

서로를 웃긴다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 중 하나일 거예요. 

혼비씨, 오늘은 무엇이 당신을 웃게 했나요? 


2022년 5월 29일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