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제발 리메이크를 멈추지 마

지난 겨울 내 영혼을 조용히 경악하게 한 뉴스 중 하나는 바로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리메이크 소식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니, 미친놈들인가? 도대체 왜 아직 끝나지도 않은 애니메이션을 또 리메이크한다는 거야? (사실 생각만 했는지 아니면 입 밖으로 소리내어 중얼거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한때 효과음을 입 밖으로 소리내서 말하던 오타쿠였기 때문이다. 때때로 긴장을 많이 하면 아직도 ‘덜덜덜’이라고 나직이 중얼거리곤 한다…) 

오다 에이치로가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 점프》에서 1997년 연재를 시작한 우리 시대 마지막 ‘소년’만화 『원피스』는 현재(2024. 04. 02.) 107권까지 대원씨아이에서 정식 발행되었으며 알다시피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장기 연재 작품이다. 참고로 이와 비슷하게 100권을 돌파하고도 여전히 연재중인 대표적인 만화에는 아오야마 고쇼의 『명탐정 코난』, 모리카와 조지의 『더 화이팅』이 있다. 물론 『원피스』와 비슷하게 90년대 후반에 연재를 시작했으며 마찬가지로 완결도 나지 않았지만 단행본으로 100권은커녕 50권도 나오지 않은 작품 역시 있다. 바로 토가시 요시히로의 『헌터×헌터』다. 뜬금없지만 나는 거의 ‘밈’화된 토가시 요시히로의 허리 디스크와 그로 인한 장기 휴재를 비웃을 마음이 전혀 없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연재 기간 동안 앞서 거론한 작가들의 생명력은 말 그대로 작품에 빨아먹혔을 것이고, 바로 그 생명력을 대가로 한 작품들을 번갈아가며 착즙해온 나로서는 그저 그들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그리고 싶은 것을 계속 그려줬으면 좋겠다고 기원할 뿐이다. 갑자기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어쨌든 다시 애니메이션 <원피스>로 돌아가보자. <원피스>는 현재까지 원작의 전개를 따라 약 1,100회차에 달하는 애니메이션이 제작 및 방영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구태여 지금 잘 있는 애니메이션을 새로 만들겠다는 이유는 추측건대,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실사 드라마 <원피스>의 성공에 힘입어 “사실상 어린이용이었던 기존 애니의 방향성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루피가 해적왕이 되려고 자신을 길러준 후샤 마을을 떠나 이스트 블루로 향했던 것처럼, 리메이크될 애니메이션 <원피스> 역시 더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해 후지TV를 떠나 넷플릭스라는 초국적 OTT 플랫폼으로 향할 예정이다. 이는 진정한 ‘해적왕’이 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일까? 또다시 나는 생각했다.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궁극의 보물 ‘원피스’는 어쩌면 <원피스>라는 작품에 딸려 오는 엄청난 액수의 부가 가치일지도 모른다고. (이번에는 정말로 생각만 했다.) 그렇다면 연재가 끝나지 않는 이유도, 멀쩡한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하는 이유도, 때때로 루피가 보이는 냉담한 사업가적 면모도 전부 이해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대해적시대’를 연 골 D. 로저의 유명한 대사 “내 보물 말인가?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찾아라! 이 세상 전부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를 일종의 수행문으로서 다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요컨대, 보물 ‘원피스’는 “거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찾아라!”라는 명령을 따르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찾아라!”로 개시된 ‘원피스’의 가능성 이후,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원피스’의 존재 유무를 해석 혹은 조소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약 25년이 지난 이후, <원피스>의 판권, 게임, 굿즈, 애니메이션, 단행본 수익은 마치 밀짚모자 해적단의 현상금처럼 파죽지세로 불어나기만 했다. 나는 골 D. 로저가 언급한 “이 세상 전부”가 앞으로 <원피스>가 창출할 미래의 무한한 수익을 선언하는 대사였다고 해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마치 주식이나 비트코인이 그러하듯 ‘원피스’ 역시 자기 예언적인 개념이다. 그 누구도 어디에 있는지, 있기나 한 건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것이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믿음. 그 믿음 하나로 <원피스>는 여기까지 왔다. 실제로 ‘원피스’가 존재한다면 그것에 맞먹을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면서 말이다. 

이미 잘된 작품의 리메이크가 소위 ‘꿀’인 건 맞다.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모두가 리메이크를 좋아한다. 왜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이렇게 실컷 빈정거리고는 있지만 나도 리메이크를 좋아한다. <원피스>를 리메이크한다는 제작 발표에 앞서 공개된 실사판 <원피스>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 푹 빠져서 봤다. 타즈 스카일러가 연기한, 한때의 최애이자 지금은 가족이 된 상디(이 문장을 읽는 데에 부디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가 처음 등장하는 5화는 세 번인가를 다시 보았다. 누군가가 ‘왜 세 번씩이나?’라고 묻는다면 ‘그냥 좋으니까!!!!!’라고 얼굴이 터질 듯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말할 만한 이성적인 답변(변명)도 준비했다. 일단 타즈 스카일러의 상디는 원작의 상디처럼 사랑스러운 외모에 상냥한 성격을 갖추고 있다. 그는 처음 캐스팅이 발표됐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디처럼 말하고 움직인다. 그런데 실사판 <원피스>의 상디에게는 원작의 상디를 초과하는 뭔가가 더 있다. 바로 현실의 인간이 연기했기에 모든 여자 캐릭터들에게 ‘눈알 하트’를 뿜어대며 헤롱거리는(심지어 ‘코피’를 쏟는) 성욕과다증 ‘여미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화적 기호의 표현 불가능성, 그것의 결여가 오히려 정말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진짜’ 같은 상디를 창조해냈다. 이는 다른 캐릭터들뿐만 아니라 실사판 <원피스>의 세계 전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요컨대 원작의 조로가 작품 속에서 어쩌다보니 유색인 혹은 인외종만 처치했기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치욕적인(그러나 틀린 말도 아닌) 별명을 얻은 것을 상기해보자면, 아라타 마켄유의 조로는 충분히 그런 소수자에 자기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인지할 만큼은 똑똑해 보인다. 이지적인 배우의 얼굴이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실사판 <원피스>에 그만큼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사판 <원피스>는 원작의 만화적 기호를 CG나 분장으로 ‘재연’하는 대신, 배우의 개성적인 연기와 신체 그 자체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원작과는 또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는 그간 어설프게 원작을 원작‘처럼’ 흉내내려 했던 여타의 실사판(대표적인 예로 <카우보이 비밥>이 있다)과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 실사판 <원피스>가 묘사하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인종적 다양성으로부터 17~18세기 카리브해를 누볐던 당대 해적들이 실은 지극히 민주적인 공동체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연결 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실직한 해군과 탈출한 노예들로 가득했던 해적선에서 선장은 단지 더 많은 책임을 질 뿐인,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선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원작과 달리 실사판 <원피스>에서 ‘밀짚모자 해적단’ 동료들은 필요하다면 선장과 싸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주관’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 결국 나는 실사판 <원피스>를 응원하게 되는 건가? 그리고 곧 공개될 리메이크 애니메이션 역시 응원하게 될 거고?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나 완강히 저항하다 결국 <트라이건>의 리메이크 <트라이건 스탬피드>를 보고 온몸의 신경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짜릿한 경험을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끌별 녀석들>도, <봉신연의>도, <바람의 검심>도, <샤먼킹>도 리메이크되는 이런 상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이러다 언젠가 <진격의 거인>(2013년 1화 방영, 작년 2023년 마지막 에피소드를 공개했다)도 리메이크되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의 싸움은 굉장히 길고 힘겨워질 것이다…

리메이크가 계속된다는 건 그만큼 안정적인 수익을 낸다는 뜻이다. 21세기를 두렵고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던 소년, 소녀들이 <원피스>가 선언한 ‘대해적시대’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면, 오늘날 좋든 싫든 훌쩍 사회인이 되어버린 (구)소년, 소녀들은 이제 세상에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확실한 즐거움만이 “시간 가성비”를 보장해준다.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오늘날 젊은 세대가 영상을 시청하는 패턴이 바뀐 까닭은 그들에게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위험’을 감수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다. 나는 15년 전 즐겁게 본 드라마 <하우스>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10년 전에도 보고 있던 <진격의 거인>을 여전히 보고 있다. 물론 그건 그만큼 이 작품들이 대단히 풍부한 육즙으로 가득차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작품을 찾아나서는 ‘모험’ 혹은 ‘투기’를 감행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내가 일에 지쳐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일에 지쳐 있다…

과거의 작품에 열광하는, 더 나쁘게는 과거의 작품만을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수용하는 문화적 무기력은 비단 <원피스>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철학자 겸 문화 비평가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미래 어느 한 시점을 그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예시로 들며 오늘날 자본주의가 “미래에는 반복과 재조합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단절도 없고 도래할 ‘새로움의 충격’도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로서 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 역시 『레트로 마니아』에서 오늘날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매혹이 어쩌면 “과거”를 “바닥”내는 “문화 생태적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역사상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사회는 없었다.” 이는 마치 우리에게 ‘미래 없음(“No Future”)’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더 ‘실험’적인, 다시 말해 ‘미래’ 지향적인 작품들을 찾기 위해 넷플릭스를 끊고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청소하고, 일하는 시간을 쪼개어 ‘디깅’에 몰두해야 할까?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리메이크를 거부하고 단 한 번 경험했던 과거의 기쁨과 눈물, 감동과 충격을 상실처럼 품고 살아가야 할까? 마치 금욕주의자들처럼? 여기서 나는 얼마전 트위터(현 ‘X’)에서 목격한 몇몇 오타쿠들의 트윗을 떠올린다. 주로 <원피스> 리메이크 애니메이션 제작 발표를 인용하며 그저 자신이 미는 CP(커플링)가 ‘꼴리게’ 뽑히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내용의 트윗이었다. 아마도 이 오타쿠들은 뭘 봐도 그것만을 바랄 것이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 외에는 결코 억지로 먹지 않는 이 고집스러운 편식 성향이 어쩌면 우후죽순 쏟아지는 리메이크들 속에서 우리가 개발해야 할 유일한 능력이 아닐까. 세상이 제공하는 평준화된 경험에 길들여지지 않는 오타쿠들의 편식은 리메이크가 불러일으키려는 ‘추억팔이’의 낭만을 자신들의 질척이는 욕망으로 실컷 더럽힌다. 과거는 끊임없이 비천하게 갱신된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리메이크 제작 발표처럼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는 이 능력을 훈련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리메이크를, 지금보다 더 빨리 공급해줄 것을 요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익사하지 않고 과거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