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백합 폭식

여러분은 일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떤 딴짓을 합니까? 나로 말하자면 주로 트위터와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사놓고 한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뒤적거립니다. 그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즉, 조급해지면 조급해질수록 결코 시작해서는 안 될 일에 손을 대는 위기의 순간을 자주 맞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리디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리디는 전자책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사이트로 특히 만화 전자책 분야에서 온라인 3사(알라딘, 교보문고, 예스24)를 제치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합니다. 2009년 창업 이래 14년간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 작은 악마 들린 사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거의 무제한으로, 무려 집안에서 만화책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범죄적 발상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모든 게 좋았어요. 리디에서는 만화방에서 풍기는, 같은 흡연자로서도 참기 힘든 담배 쩐내 대신 아무 냄새도 안 났거든요. 그리고 리디는 수백 권의 만화책을 무한한 네트에 저장할 수 있게 해줬어요. 지난 십수 년간 부동산 문제로 거의 한 트럭은 꽉 채워 내다 버렸을 만화책들에게는 이제 와서 미안한 소식이죠. 그 덕에 약 육백 권의 만화책을 구매하게 된 저에게는 슬픈 소식이고요. 리디 이전에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북새통이라는 대형 만화책 전문 서점에서 만화책을 구매했어요. 과연 어떤 작가의 작품을 나 혼자서도 꽉 차는 좁디좁은 원룸에 들여놓을지 고민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썼죠. 앞으로는 잠도 그 작품과 같이 자야 할 테고 그러면 그 작품이 자는 사이에 제 꿈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요.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 역시 우리가 자는 동안 책들을 이루는 지식 원자들이 우리의 피부를 통해 흡수된다고 주장한 바 있잖아요. 

하지만 이제 나는 더이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리디에 접속해요.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진짜 최악인 점인데, 나는 곧장 GL 카테고리에 들어가 어떤 신작이 나왔는지 확인합니다. 곧이어 어차피 한 방에 있을 필요도 없으니 무절제한 마음으로 폭식하듯 GL, 즉 백합에 속하는 작품들을 구경하고 구매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성적인 지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쓸모가 없을 뿐더러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백합을 고를 수 있다는 감각이거든요. 내가 백합을 고를 수 있다니! 나는 감히 다이소에 입장한 소비자처럼 전능감에 도취됩니다. 『카미이나 보탄, 취한 모습은 백합의 꽃』(헤이)과 『전국 여자 고등학생 용과 호랑이』(이쿠타 하나)가 새로 올라왔네요.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제목이 점점 길어지기는 이쪽도 사정이 마찬가지입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제목이 길면 길수록 인내심을 시험하는 경향이 있지만 때로는 『내가 인기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타니가와 니코) 같은 전무후무한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짧은 제목 쪽이 낫죠. 오늘도 하나 발견했어요. 제목은 『물밑에서』(후유무시 카이코).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괴물(이 경우 인어)과 그를 둘러싼 다른 괴물(이 경우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서너 번의 잇따른 실패 후 이 작품을 건져 올렸을 때 나는 작가의 전작을 전부 읽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덕에 잠깐의 딴짓이 갑작스럽게도 오후의 충만한 미적 경험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도요…

그런데 누가 백합을 폭식할까요? 아니 누가 백합을 폭식하고 싶어할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만성적인 백합 허기에 시달려온 사람일 것입니다. 백합이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성 간 사랑(혹은 성애)을 다룬 서브컬처의 한 장르입니다. BL(Boys Love)과 HL(Hetero Love)에 비해 최근 등장한 백합의 또다른 이름인 GL(Girl’s Love)은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적습니다. 그 때문에 이 장르에 소속감을 느끼는 많은 이들은 적당한 포만감이라는 감각을 모릅니다. 그래서 포장도 내용도 따지지 않고 백합이라면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어대는 거겠죠. 가끔은 이런 행위가 자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중인 레즈비언 업소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그중에서도 『아스미는 레즈비언 업소에 흥미가 있습니다!』(이츠키 쿠로)와 같은 작품을 보는 건 정말이지 견디기가 어려운 경험입니다. 단지 레즈비언 업소를 다뤄서, 그래서 비도덕적이라서가 아닙니다. 레즈비언 업소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생활도 없는, 좋게 말해 단순하고 나쁘게 말해 혐오스러운 주인공을 보고 있자면 이것도 백합이라고 먹고 있어야 하는 내 처지, 이것도 백합이라고 그리고 싶었던 작가의 처지가 내장 깊숙이서부터 비주류 장르의 역사적 울분을 일깨우는 탓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어디서나 인기 있는 먹방물에 속하는 작품들, 그중에서도 최대 아웃풋이라 할 수 있는 『만들고 싶은 여자와 먹고 싶은 여자』(유자키 사카오미)는 속상할 정도로 지루한 작품입니다. 여성 간 섹슈얼리티의 생명력은 이 작품에서 지나치게 많은 밥을 짓고 먹는 생활의 일부로 녹아들어 사라진데다, 설상가상으로 여성 차별의 공통 경험은 이들을 뜨뜻미지근한 자매애로 결속합니다. 오랜 백합 허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품들은 끝까지 씹어 삼키기가 어렵습니다(그래도 정 없으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내가 건강과 지갑을 생각하는 대신 몰취향한 백합 폭식을 지속하는 이유는 단지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기 때문입니다. 배달의 민족의 등장 이후 우리를 실망시키고 말 야식을 잔뜩 주문하는 충동 소비의 패턴이 부쩍 늘어난 것처럼, 리디가 부동산 걱정 없이 만화책을 ‘찍먹’해줄 수 있게 해준 덕에 백합 폭식의 가능성이 생겨나게 됐죠. 리디는 미식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당장의 백합 허기를 달랠 수준의 백합 작품 목록을 소장하고 있어요. 심지어 나는 그중에서 선택까지 합니다. 북새통 시절에 백합은 한두 평 남짓의 공간에 그저 주어지는 거였어요. 내가 동거할 작품을 고심하듯 북새통 역시 마찬가지로 한정된 공간 안에 어떤 장르의 작품을 더 놓고 덜 놓을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웹 공간의 수평적 디자인이 주는 착시 효과일지도 모르겠지만 리디에서의 백합은 공간의 가장 구석에 위치해 있지도 않고, 책장 하나에 전부 담기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스크롤은 마치 무한한 듯 내려갑니다. GL 카테고리에 속한 총 작품 수가 215개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기라도 한 것처럼요.

나는 마음만은 부자가 된 것처럼 #GL 해시태그 사이를 자유로이 점프하며 마치 처음 본 작품인 양 이미 ‘소장중’이라 뜨는 작품 아래 등록된 신규 리뷰들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작가도 아닌데 리뷰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당연하지만 그리 활동적이지 않은 백합 분자로서 외롭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물밑에서』의 리뷰에서 아주 훌륭한 백합에 대한 정의를 발견하기도 했어요. 인어를 둘러싼 소녀(들)의 섬세한 감정을 다룬 이 작품에서 통상 백합에서 기대되는 로맨스가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고 “여자 둘이 나오기만 하면 백합이다”라고 주장하는 리뷰였어요. 영화 이론가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말했듯 레즈비언은, 이 경우 백합은 여자 하나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여자 둘, 그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리, 즉 관계가 주제가 되는 작품이라면 백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훌륭한 정의죠. 그 관계는 반드시 긍정적인 감정으로 이뤄질 필요가 없고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친구나 애인과 같은 사회적 단위로 묶이지 않아도 돼요. 

예를 들어 『물밑에서』의 작가 후유무시 카이코의 정식 출간된 전작인 『소녀의 고치』에 수록된 한 단편은 엄마와 딸, 언니와 동생 사이의 사랑 아닌 질투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백합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또다른 단편은 20세기 초 여학교에서 유행했던 ‘S자매’, 즉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소녀를 다루는데, 동반자살에 실패한 이후 이들은 서로를 어마어마하게 증오하게 됩니다. 소위 혐관(혐오관계)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묶인 두 소녀는 이제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 또한 어쨌든 내 안에 그 누군가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잖아요. 그 공간의 냄새와 맛, 모양과 질감은 이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공간의 이름을 상처라고 불러도 좋겠어요. 가능하다면 없었으면 좋겠다 싶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상처요. 여자 하나가 아니라 둘은 서로를 보살펴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서로의 상처가, 이윽고 흉터가 되는 거죠. 아마도 두 연인이 헤어진 이후를 다루는 작품인 『우리가 사귀어도 괜찮을까』(TAMIFULL)가 좋은 예시가 될 것 같네요. 이들이 서로에게 남긴 흉터는 각자의 선생이, 친구가 되어 이들을 돌보고 성장하게 합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해왔어요. 여자들끼리 상처를 주고받는, 그래서 진짜 재미를 보는 이야기들을요. 아마도 열 살 무렵에 할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할 적 몰래 공수해 왔던 레즈비언 포르노를 봐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여자들은 지금쯤 순조롭게 할머니들이 되어서 서로의 젊은 날을 추억하며 잘 지내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또 아마 나는 페미니즘이 말해온 여성성의 긍정적인 가치들이 참을 수 없이 따분했기 때문에 항의라도 하듯 여자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이건 변명이지만 어느 시점의 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누군가를 웃기는 것만큼이나 능력의 범주에 속했거든요. 설마 나는 지금 여자도 그럴 능력이 있는 동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려는 걸까요? 그런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백합이라는, 서브컬처 중에서도 가장 궁핍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장르가 여자들끼리 가능한 재미를 가장 열심히 탐구하려 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강박적인 수준의 남성 혐오를 동력 삼아 멘헤라 백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백합으로 이루는 희망』(나오이마이), 동인계 여성들이 서로에게 품는 선망, 질투, 혐오, 원한과 같은 작고 추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독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동인녀의 감정』(사나다 츠즈루), 지하 아이돌과 그의 절대적 지지자 사이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아기자기하게 묘사한 『최애가 부도칸에 가 준다면 난 죽어도 좋아』(히라오 아우리)와 같은 작품들은 우리가 백합에게 요구할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상기시켜줍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백합에서도 아주 소수에 속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이미 알려진 여성성의 시각적 기호들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뻔한 모에물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작품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나는 때때로 그들과 혐관이라도 맺고 있는 것처럼 단지 거부하기 위해서만 그들을 정기적으로 섭취하곤 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내게 엄청난 안정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백합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리해서 한번 시작되면 세 시간씩은 이어지는 백합 폭식의 말미에 이르러 언제나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도 과장도 아닌 셈입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