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실눈 캐릭터의 종말

원래는 제로스가 되려고 했었다. 보라색 단발머리에 실눈을 하고 “그건 비밀입니다♡”(←이 하트가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제로스. 사실은 리나 일행을 견제하는 고위 마족의 중간 관리직이면서 그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도와주고 친구인 척 능글대는 제로스. 겉으론 실실 쪼개면서 속으론 음흉한 음모를 꾸미는 명실상부 세계관 내 최강 ‘복흑(腹黒, 뱃속이 검다는 뜻)’ 캐릭터인 제로스. 하지만 나는 열세 살 무렵 미용실에서 진지한 얼굴로 “제로스처럼 잘라주세요”라고 한 이후부터 제로스가 되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물론 내가 되지 못한 게 제로스 하나뿐인 건 아니다. 참고로 그때 본인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며 맞장구쳐준 미용사 선생님께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시기를 전후로 겪은 오타쿠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제로스는 칸자카 하지메가 쓴 라이트노벨 원작의 TV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연기한 성우들 역시) 국내 동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슬레이어즈> 동인 안팎으로 가장 높은 인지도와 지지율을 보유한 캐릭터를 꼽으라면 역시 제로스다. 1996년 처음 <슬레이어즈>가 <말괄량이 전사>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방영된 이후 PC 통신을 매개로 부흥한 <슬레이어즈> 팬덤 문화의 역사를 다룬 장은선의 책 『한국 슬레이어즈 팬픽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능글맞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뒤에 마성(魔性)을 감춘 강자’라는 개성을 지닌 칼단발머리 마족 제로스. 이런 캐릭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닐 테고 엄연히 계보가 존재하겠지만, 제한적으로 일본의 문화 산물을 접해왔던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있어서 제로스는 정말로 참신하고 신비로운 캐릭터였다. (...) 그가 처음에 가장 많은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장은선은 <슬레이어즈> 국내 팬덤 문화의 초창기에 ‘제로피랴’(제로스X피리아) 팬픽이 큰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피리아라는 캐릭터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쓰기도 한다. “결국 사람들은 제로스가 연애하는 모습이나 변화하는 모습,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뿐일까?” 맞다, 최소한 인생 첫 동인지로 모든 캐릭터가 골고루 다뤄지는 ‘올캐러’를 표방했지만 실은 ‘제로제르’(제로스X제르가디스)가 메인이었던 만화를 구매한 내 경우에는 그랬다. 요즘 말로는 ‘남미새’라 불릴 만한 이 같은 전국적(?) 제로스 편애는 점차 부상하던 ‘쿨데레’ 제르가디스의 인기와 함께 그 에너지가 분산되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실눈 캐릭터는 흑막(내지는 복흑)”이라는 클리셰의 원조로 호명되며 캐릭터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슬레이어즈>의 다른 누구도 아닌 제로스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1세대 판타지 라노벨의 정전인 <슬레이어즈>만큼이나 상징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은 것이다. 

제로스 이후, 그러니까 TV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가 등장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비평가 우노 츠네히로에 의하면 “소년만화의 끝”이라 언급되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인기를 끈 작품들에서 ‘실눈 캐릭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내 서브컬처 커뮤니티가 키운 아픈 손가락 나무위키에 ‘실눈 캐릭터’를 검색하기만 해도 그 목록이 꽤나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만 언급해보자. 먼저 『테니스의 왕자』(1999년 연재 시작, 코노미 타케시)의 후지 슈스케. 주인공인 에치젠 료마와 같은 학교 소속으로 늘 실눈을 하고 웃는 표정에 자타공인 ‘천재’다. 『헌터×헌터』(1998년 연재 시작, 토가시 요시히로)의 히소카. 아군에도 적군에도 속하지 않는 건 고사하고 인간조차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2000년 연재 시작, 우스타 쿄스케)의 주인공 재규어. 순정만화의 풍성한 속눈썹 묘사를 그대로 이식한 그의 실눈은 그 자체로 작품 전체의 작화와 불화하며 (이제는 거의 사어가 되었지만) ‘아스트랄’한 매력을 풍긴다. 『강철의 연금술사』(2001년 연재 시작, 아라카와 히로무)의 린 야오. 누가 봐도 ‘실눈 캐릭터’로서 응당 갖춰야 할 ‘외유내강’의 속성을 갖춘 인물이다. 비록 그가 내 차애긴 하지만, 작중 몇 안 되는 동양인으로 등장하는 그의 실눈에서 인종주의적 함의를 완전히 제거하기란 어렵다는 점 역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정통’ 실눈이 아닌 ‘유사’ 실눈으로 확장하면 언급할 수 있는 ‘실눈 캐릭터’의 목록은 더 늘어난다. 요컨대 『환상마전 최유기』(1997년 연재 시작, 미네쿠라 카즈야)의 저팔계. 한쪽 의안에 모노클까지 장착한 그는 외형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실눈 캐릭터’의 스펙트럼에 속한다. 서클렛으로 한쪽 눈을 가린(아니 봉인한) 『나루토』(1999년 연재 시작, 키시모토 마사시)의 하타케 카카시와, 안경의 수상한 반사광 연출을 통해 자주 시야가 가려지는 『명탐정 코난』(1994년 연재 시작, 아오야마 고쇼)의 오키야 스바루 역시 마찬가지로 ‘유사’ 실눈에 해당한다. 눈이라는 기호를 통해 대부분의 감정 표현을 묘사하는 만화라는 장르에서 캐릭터의 눈이 안경이나 안대, 두건이나 마스크와 같은 소도구를 통해 가려질 경우 독자들은 곧장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다시 말해 ‘비밀’을 품고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유사) ‘실눈 캐릭터’의 표리부동한 양면성은 ‘갭모에’를 불러일으킨다. ‘갭모에’란 격차를 뜻하는 영어 단어 ‘갭(gap)’과 특정 대상을 향한 강한 이끌림(주로 ‘덕질’로 이어지는)을 뜻하는 일본어 ‘모에(萌え)’를 합친 조어로, 외모와 불일치하는 행동, 능력, 사고를 보이는 캐릭터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긍정적인 가치평가이다. 제로스와 같은 ‘실눈 캐릭터’ 부류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숨겨진 무언가를, “연애하는 모습이나 변화하는 모습, 망가지는 모습” 등을 보고 싶다는 능동적인 욕구를 부추긴다. 실제로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실눈 자체가 비밀을 생산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실눈만 뜨고 있어도 독자들은 알아서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어쩌면 존재하지조차 않는 그의 비밀은 물론이고, 작가가 여러 이유로(주로 귀찮아서) 아직 설정하지 못한 그의 사연까지 척척 ‘착즙’해준다. ‘실눈 캐릭터’는 자신을 둘러싼 온갖 매력적인 소문들을 그러한 소문들의 진원지인 실눈으로 모조리 다시 빨아들인다. 마치 풍혈처럼…

이처럼 적극적인 ‘캐해석’을 자극하는 ‘실눈 캐릭터’의 수동적인 성질은 작품 내에서 경제적인 기믹(gimmick, 소위 ‘눈속임’)으로 작용한다. ‘실눈 캐릭터’가 등장만 해도 작품은 갑자기 보이는 것보다 더 깊고 어둡고 무거운 비밀, 작가가 설치해놓았으리라 기대되는 궁극적인 세계관의 ‘흑막’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 자체가 ‘떡밥’인 ‘실눈 캐릭터’는 단 하나의 의미심장한 대사, 눈빛, 연출만으로 작품 내에 비일상적인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한마디로 느슨해진 전개의 ‘기강’이 잡히는 것이다. 요컨대 제로스가 리나 일행으로부터 자신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늘상 눙치듯 답하는 관용구인 “그건 비밀입니다♡”를 떠올려보자. 도대체 뭐가 비밀이라는 걸까? <슬레이어즈>가 끝날 때까지 제로스가 언급한 비밀의 정체는 속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가 언급한 비밀이라는 단서를 통해 <슬레이어즈>의 세계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앞질러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제로스는 알지만 우리는 ‘아직’ 모르는 비밀의 존재로 인해 <슬레이어즈>의 세계는 낯설어지고, 그만큼 신비해진다. 이처럼 제로스를 포함한 ‘실눈 캐릭터’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미스터리를 매개하고 유통하는 “중간 관리자”이자 ‘트릭스터’다. 그들은 실눈이라는 최소한의 장치를 통해 스스로의 비밀뿐만 아니라 작품의 최종장과 관계하는 세계의 비밀 역시 생산하는 최대한의 효율을 낸다. 이렇게나 유능한 ‘실눈 캐릭터’들의 고용률이 두드러지게 높았던 시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1990년대다. ‘뉴 밀레니엄’ 2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그들의 임무는 작품을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현재를 의심하게 하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비밀은 장기 구독을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홍보 전략이었다. 

그로부터 훌쩍 시간이 흘러 2024년에 접어든 오늘날, 예전처럼 살아 있는(‘살아 있는’?) 비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실눈 캐릭터’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실눈 캐릭터’들이 유지하고 보수하던 세계의 ‘흑막’ 역시 더는 낯설지도 신비롭지도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2010년대 중반 이후 급부상한 장르인 이세계물, 회귀물, 책·게임빙의물(독자·플레이어가 책·게임 속 세계로 전이되는 장르) 속에서 ‘흑막’은 다름 아닌 주인공, 즉 ‘나’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가장 최근에 본 게임빙의물이자 백합물인 『내 최애는 악역 영애』(아오노시모)에서 주인공 오오하시 레이는 여성향 게임의 히로인 ‘레이’에 빙의한다. 남성 캐릭터를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성향 게임 속에서 레이는 게임의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자신의 최애, 히로인의 라이벌, ‘악역 영애’ 클레어를 향해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레이는 게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게임 내 현실에서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바깥’ 세계의 지식과 상식 역시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레이의 미션은 게임의 엔딩이라는 최종장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이건 너무 쉽다!), 바로 주어진 선택지의 ‘빈틈’을 조작해 정해진 시나리오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성장을 주제로 한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전개 같지만, 『내 최애는 악역 영애』의 세계는 1990년대의 소년만화를 가득 채웠던 희뿌연 비밀 대신, 투명한 정보로 가득차 있다. 과거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 비밀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세계 전체와 싸워야 했다면(“‘나’는 모른다”), 게임빙의물에서 주인공들은 익히 아는 정보를 이용하고 재배치해 세계 전체를 길들인다(“‘나’빼고 모두 모른다”). 짐짓 심각한 척 ‘떡밥’을 흘리는 ‘실눈 캐릭터’가 이런 세계에서 실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에게 양도되었던 악(evil), 비밀, 미스터리의 “중간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이제 전부 ‘나’, 주인공에게 ‘몰빵’되었기 때문이다. ‘나’만이 모든 것을 아는 이 세계에서는 더이상 낯선 공포도 신비도 작동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철학자 한병철처럼,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삶의 형식 속에서 서사가 스토리로, 비밀이 정보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음을 한탄하며 여러분을 은근슬쩍 겁박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이세계물, 회귀물, 책·게임빙의물이 주는 ‘빠른 보상’에 적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실눈 캐릭터’가 전담하던 비밀의 위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껍질 벗기기나 베일로 감싸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한병철, 『서사의 위기』) 아니다, 나는 그냥 상황이 이렇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마치 이 사실 바깥에 무언가가 더 있는 것처럼 짐짓 폼을 잡으면서. 그래서 결국 내가 던진 ‘떡밥’을 누군가가 물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어쩌면 결국 나는, 돌고 돌아 이런 식으로 제로스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