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오타쿠와 열정

알다시피 요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오타쿠의 열정은 전에 없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고 있다. 약 14년 전 〈화성인 바이러스〉(tvN 방송, ‘특이한’ 사람들이 ‘화성인’이라는 콘셉트로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에 ‘오덕페이트’가 출연해 모든 서브컬처 커뮤니티를 일제히 얼어붙게 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는지? 비평가 서찬휘는 『키워드 오덕학』(생각비행, 2018)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결국 2010년 1월 27일자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방영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조롱처럼 돌아다니던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형 인물을 화성인(=상식 밖 인물)의 대표주자 ‘덕후’의 표상으로 정립시켰다. 욕처럼 들리고 실제로도 욕을 덧붙여 만든 멸칭을 방송용으로 억지 순화한 ‘십덕후’란 표현과 함께 말이다.” 확실히 현재에 이르러 상황은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젊은 세대에게 널리 알려진 패션 브랜드가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과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내놓고, 유튜버 마이너 리뷰 갤러리는 자신의 저서 『오타쿠의 욕망을 읽다』(메디치미디어, 2024)에서 “서브컬처가 대중문화를 끝내버릴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했으며, 온갖 매체들이 특정 분야의 깊이 있는 전문가로서 ‘성덕(성공한 덕후)’을 (재)조명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내 경우 이런 변화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장소는 한 주에 한 번씩은 꼭 들러 신간을 확인하는 인터넷 서점 사이트다. 가볍게는 저자의 취향과 취미를 소재로 한 『아무튼』 시리즈부터, 보다 ‘하드’하게는 아이돌․스포츠․드라마․만화․게임 오타쿠로서 저자의 경력과 경험을 내세운 비평과 에세이까지, 이른바 ‘덕질’ 장르가 유행이 된 지는 꽤 오래다. 대세까진 아닐지 몰라도 뭔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힘의 긍정적인 역량을 홍보하는 ‘덕질’ 장르가 어엿한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오타쿠는 사실 엘리트 문화였다 : 그들의 사랑을 혐오하십니까”(이병철, 2023.09.18.)라는 제목의 한 기사는 심지어 오타쿠가 ‘부럽다’고 고백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이렇듯 하나의 분야에 몰두하는 오타쿠적 역량은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정보의 범람 속에서 어려워진 선택과 집중, 혹은 ‘도파민 중독’이 만연한 세태 속에서 오타쿠가 괜스레 부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당신은 이토록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광해보았는가. 어떤 분야에 열정을 쏟아야 할지 고민만 하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진 않았는가.” 그렇다, 답은 ‘열정’에 있다. 특정 대상을 향한 선택적 몰입을 뜻하는 ‘열정’은 오늘날 오타쿠를 ‘갓반인’과 구별할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그리고 유일한 ‘장점’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이는 한때 근시안적이고 폐쇄적이라는 이유로 오타쿠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불렸던 것이다. 본래 오타쿠를 ‘정상사회’에서 유리하고 탈락시킨 원인인 열정은, 이제 멀쩡히 사회생활도 잘하면서 취미까지 즐길 줄 아는, 달리 말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뭔가를 좋아할 수 있는 역량이자 능력으로 변용되어 받아들여진다. 오타쿠는 더이상 ‘히키코모리’와 같은 수동적이고 부정적 이미지로만 재현되지 않는다. 오늘에 이르러 오타쿠는 한편으로 ‘성덕’이라 요약되는, 진부한 스타트업 창업 서사 혹은 자기계발 서사의 주체적 모델로 제시되거나(“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돈까지 벌게 되었어요”), 또다른 한편으로는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든 스스로의 재미를 찾는 능동적 소비자, 혹은 향유자로 묘사된다(“이러려고 돈 법니다”). 이처럼 “오타쿠적 역량”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타쿠는 자신의 열정을 연료로 삼아 시키지도 않은 창조 혹은 노동–요컨대 2차 창작(원작에 기반한 창작)과 굿즈 제작, ‘캐해석(캐릭터 해석)’과 ‘과몰입(특정 캐릭터에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현상)’–을 마다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러한 노동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더이상 ‘갓반인’ 미만의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 자신이 ‘파는(덕질하는)’ 분야의 질적, 양적 성장에 기여하는 생산적인 ‘능력자’로 거듭난다.

‘덕질’의 (재평가를 넘어선) 고평가 현상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드니 그 어떤 척박한 조건에 처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제 좋을 대로 ‘착즙(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파는’ 작품에 관해서라면 지갑 사정과 관계없이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소비를 멈추지 않는 이 특수한 문화적 부족인 오타쿠가 일종의 대안적인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건 거의 시대적 요구나 다름없다. 더욱이 오타쿠는 알아서 강도 높은 자기 착취적 노동을 수행하는 습성을 지녔다.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이들은, ‘창조 경제’가 원하는 투자 대비 생산 가치가 높은 고부가가치 산업의 모범적인 지식․정동 노동자의 모델과 닮았다. 그 결과 오타쿠는 각종 매체에서 ‘기회’만 적절히 잡는다면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아직-프로가 아닌-아마추어로 홍보된다. 반복하지만 이런 세태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동의하기는 싫다. ‘덕질’의 코어란 모름지기 그 대상을 좋아하는 주체를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끔 생산적으로 파괴하는 힘–즉 고통과 기쁨, 또는 비평가 이희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배움과 실망’을 동반하는 그런 힘에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덕라밸(덕질과 삶의 균형을 뜻함)’을 갖춘 ‘갓생(성실하고 생산적인 삶을 뜻함)’만을 치켜세우는 작금의 ‘덕질’ 유행은 그저 불만스럽기만 하다. 마치 이 세상이 일에 도움이 되고 일상을 즐겁게 할, 딱 그만큼만 뭔가를 덕질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아서다. 아니면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의 일치를 뜻함)’를 통해 덕질을 금전적 가치로 환원하라고 종용하거나. 

그런데 덕질이 ‘파괴적’이라고? 아무리 거기에 기쁨과 고통, 배움과 실망이 동반된다고 해도 동의하기 어려워할 오타쿠, ‘나’의 덕질은 ‘너’랑 달리 전혀 파괴적이지 않고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고 반박하고 싶어할 오타쿠가 분명 어딘가에 있으리라. 이쯤에서 나는 오타쿠적 열정이 발휘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지배적인 차이란 바로 ‘성차性差’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백 명의 오타쿠가 있다면 백 개의 제각기 다른 덕질이 있겠지만, 순전히 나의 관심이 성차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백 개의 제각기 다른 덕질에 대해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미리 일러두건대 이 글에서 성차란 남자와 여자의 해부학적,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직 행동 양식의 극단적인 두 경향을 가리킨다. 즉 여성‘적인’ 오타쿠와 남성‘적인’ 오타쿠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이자 비평가인 사이토 다마키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황금가지, 2005)에서 만화가이자 비평가인 에노모토 나리코(노비 노비타)의 논의를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다소 낡긴 했지만 기초적인 ‘일반론’으로서 언급할 가치가 있어 길게 인용해본다. “예를 들자면 많은 남성 오타쿠는 여주인공의 조형造形, 즉 마음을 빼앗는 그 외모에 매료된다(‘모에’한다). (...) 그러면 여성 오타쿠 즉 동인녀들은 무엇에 매료되는가. (...) 에노모토에 의하면 동인녀들은 ‘위상位相 [관계성] 모에’라는 것이다. (...) 에노모토는 이런 차이의 원인을 ‘남성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확실히 정하지 않으면 매료되지 않기 때문’으로 간주한다. 이 지적은 오타쿠와 동인녀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녔다. 바꿔 말하면 남성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 한편 여성에게 있어서 그런 우려는 그다지 절실한 것은 아니다. 여성이 뭔가를 욕망할 때에는 자신의 주체적 위치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오로지 대상에 몰두해서 자신을 비우고 빠져든다. 이러한 주체의 위치적 가변성은, 예를 들자면 대상에 대한 동일시로 마음껏 발휘된다.” 물론 모든 여성적인 오타쿠가 전부 동인녀 혹은 ‘후죠시’인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위상 즉 관계성에만 ‘매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소위 ‘과몰입’이라 불리는 오타쿠의 행동 양식 중 하나가 기실 인용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대상에 몰두해서 자신을 비우고 빠져드는 (...) 동일시”와 정의상 일치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렇다면 ‘과몰입’을 모든 오타쿠가 아니라, 여성적인 오타쿠에게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덕질 성향이라 간주하면 어떨까. 겪어봐서(?) 알겠지만, ‘과몰입’은 일상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을 기쁨과 고통으로 거의 반드시 파괴하고 만다. 

‘과몰입’은 덕질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위험하고, 쾌락적인 행위다. 게다가 중독적인 행위기도 하다. 단순히 ‘최애캐’ 굿즈를 사 모으는 것과, 하루종일 ‘최애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겪어보면 알겠지만 꽤 고통스럽다. 도대체가 아무런 일도 생활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 삶 전체에서 가장 ‘과몰입’이 심했던 작품은 순서대로 『원피스』(오다 에이치로), 『강철의 연금술사』(아라카와 히로무), 『진격의 거인』(이사야마 하지메), 『송곳』(최규석)이다. 각각의 작품은 메뚜기떼처럼 내 삶을 초토화시켰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과몰입’의 시기를 눈물나게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몰입’의 경험이 없다면 대체 그게 뭔데 싶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잠깐이지만 당시 등장인물들과 ‘실제로’ 함께 살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말 그랬다! 나는 지금도 ‘그때 ○○○가 그렇게 했었지…’라며 반복적으로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내 삶의 지침(혹은 반反지침)으로 삼는다. 아직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자기만의 방을 두고 있는 이 등장인물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언제라도 내 삶에 끼어들며 친구나 선생이 그러듯 훈수를 두기도 한다. 이처럼 ‘과몰입’의 경험은 그 안에 있을 때나, 빠져나왔을 때나 언제고 강렬하고 또 충만한 것이(었)기에, 나는 때로 내가 또다른 ‘덕통사고(불현듯이 덕질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뜻함)’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다.

흔히들 처음 덕질을 시작할 때 ‘○○○에 치였다’란 표현을 쓴다. 비록 물리적으로 덕질하는 작품 속 등장인물에 치이지는 않았겠지만(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치였다’라는 비유는 덕질이 곧 일상의 시간을 절단하는 예외라는 의미로 ‘사건’이자, 또한 바라지 않았는데 뜻밖에 당하는 ‘사고’이기도 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과몰입’하는 여성적인 오타쿠란 바로 이런 ‘덕통사고’의 충격에 중독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덕질’ 대상을 중심으로 재편하게 만드는 ‘덕통사고’. 그것의 충격이 생산하는, 반드시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복잡한 풍미는 오타쿠의 마음에 새로운 기관을 설치한다. ‘휴덕’은 가능해도 ‘탈덕’은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기관의 이름을 임시로 ‘덕질기관’이라고 불러보자. 현실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덕질’ 대상을 향한 풍요로운 감정을 먹이 삼아 살찌우는 ‘덕질기관’은 포만감을 모른다. 그저 더 크고 많은 감정을 요구할 뿐. 극단적으로 말해 오타쿠는 ‘덕질기관’의 숙주다. 그들이 지속적이고 만성적이고 반복적으로 제발 누가 자신을 ‘치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리비도를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행위 전반을 아우르는 덕질의 주체인 오타쿠는, 유용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의 능동적인 생산-소비-향유자이며, 주인 의식으로 ‘덕질’ 대상이 속한 분야를 성장, 발전시킬 역량을 갖춘 문화 산업의 역군이다. 

그러나 이처럼 세간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포장하건 간에, 오타쿠가 덕질을 하는 까닭이 단순히 ‘과몰입 중독’에 불과하다는 부분적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덕질이란 별다른 수 없이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뿐인 편향의 양태이자 중독의 증상일 뿐이다. 아무리 ‘올려치려’ 해도, 여기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곤 별로 없다. 덕질의 이런 무용함을 알면서도 덕질을 계속하기를 선택하는 건 ‘성덕’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갓생’을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과몰입’ 속에서 ‘나’를 비우고, 그 자리를 온전히 ‘최애캐’에게 양도하는 기쁨, 그러면서 ‘현생(현실의 삶)’을 반강제적으로 포기하는 고통을 위해서다. 아마도 나는 오타쿠의 (자기)파괴적이고, 몰아적이고, 편파적인 열정이 바로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덕질 역시 잠시 주체를 살아 있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덧붙이는 말. 각종 매체가 호들갑 떨며 ‘성덕’이라 부르는 ‘아저씨 오타쿠’ 혹은 ‘오타쿠 CEO’들의 성취가 오타쿠 전체를 과대표하는 현실은, ‘과몰입 여자 오타쿠’ 무리의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열정’ 노동을 지우지는 않을지라도–아니, 뭐든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다, 커피 자국만 생각해도 그렇다–그 노동을 폄하 내지는 무시할 때에만 유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성적인 오타쿠의 ‘감정’과 언어가 공적으로 더 많이, 더 깊이 재현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런 현실을 오염시키기 위해서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