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차라리 잠든 밤(1)

지난 십 년간 방송국에서는 단 한 명의 퇴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나이든 PD 중 하나가 자랑스레 말했다. 작가나 성우는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PD들에 한해서만 유의미한 통계였다. 그 정도로 좋은 직장이라는 말이지. 나는 두 가지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간만의 전체 회식이었지만 조기 종영 통보를 받은 직후라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PD는 PD끼리, 성우는 성우끼리 모여 대화를 했다. 하필 내 근처에 PD는 나까지 두 명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각선에 앉은 재하가 술을 주는 대로 받아먹기 시작하자, 경직된 분위기가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재하는 잠시 후 환으로 된 숙취 해소제를 사서 돌렸다. 시종일관 수줍게 굴어서 능청 같은 건 못 떠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술에 취한 선배 성우들은 무슨 염소 똥 같은 걸 사왔냐며 장난스럽게 구박했다. 굵은 목소리 때문에 실없는 말도 만화 대사처럼 들렸다. 나는 숙취 해소제의 포장을 뜯지 않고 식탁에 올려두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배 PD가 내게 안 먹느냐고 물었다.

알약을 못 먹어서요.

내 고백에 사람들은 애기네, 애기,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목청 큰 남자 성우가 그럼 아플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병원에다 부탁하면 빻아줘요.

애들이나 해주지 않나? 어른도 해줘요?

성인이나 돼서 유난 떤다고 생각할까봐 나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왜냐하면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동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다급하게 〈슬램덩크〉, 안 보셨어요? 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음료수라도 마시라며 맞은편 선배가 친절하게 콜라를 주문했다. 그러고는 공평하게 나눠 따른 콜라를 재하와 내게 건넸다. 그러나 재하는 단칼에 거절했다.

제가 콜라를 못 마셔요.

주위가 단숨에 조용해졌다가 금세 어수선해졌다. 콜라 못 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 와중에 누군가 자기는 콜라를 먹으면 취한다고 하자 야유가 쏟아졌다.

어렸을 때 콜라 먹고 탈 난 적이 있어서요.

콜라는 원래 소화제 아니야?

선배들의 호들갑이 난처하지도 않은지 재하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확실히 탄산의 자극은 별로였지만, 무사히 삼키고 난 후의 상쾌한 느낌은 좋아했다. 그 기분을 맛보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재하의 몫까지 두 개의 잔이 내 앞에 놓였다. 콜라 표면에 보글보글 올라오던 기포가 가라앉고 있었다. 잔에서 시선을 떼자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저 신경쓰지 말고 드세요.

그렇게 말해놓고 재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정말로 마실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나는 콜라를 마시려다 말고 저, 그럼…… 하고 운을 뗐다.

슈팅스타는 먹을 수 있나요?

떠들썩한 웃음과 외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누구도 우리 쪽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바순처럼 낮게 깔리는 남자 성우들의 목소리 위로 재하의 목소리가 가볍게 얹어졌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요.

재하의 목소리는 여자치고는 낮고, 남자치고는 가늘었다.

엄마가 싫어하시거든요.

 

요즘에는 텔레비전 잘 안 봐. 처음 참여한 방송의 시청률을 확인하고 실망하자 선배들이 위로랍시고 던진 말이었다. 하긴 나만 해도 OTT의 시대가 도래하고 정기적으로 구독료를 납부하면서부터는 더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금년부터 인상되는 월 사용료에 이용자가 빠져나가는 상황에도 나는 구독을 해지하지 않았다. 자주 이용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OTT를 이용할 때라고는 늦은 밤, 보지도 않을 영화를 이것저것 눌러볼 때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꿋꿋이 구독을 유지하는 이유는 매번 해지일을 잊어버리고 마는 성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OTT의 충성스러운 고객이었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아침드라마부터 막장 전개로 유명한 일일드라마, 엄청난 제작비를 퍼부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텅 빈 강정이더라는 오리지널 시리즈까지, 온갖 종류의 콘텐츠를 섭렵했다. 좀비물이 유행하자 얼마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를 종류별로 시청하기도 했다. 취향의 스펙트럼이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취향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그런 것들을 보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하나같이 잔인하고 괴랄했다. 주로 범죄에 휘말려 피해를 입은 젊고 무고한 여성이 법의 심판을 피해간 범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잔인하게 복수하는 내용이었다. 용인에 방문할 때마다 엄마는 내가 없는 동안 본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해주었다. 그런 대화는 주로 식사중에 이루어졌다. 밥때가 아니면 내가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건성으로 대꾸하는 동안 엄마는 잔인하게 해체된 여자들의 시체와 생존자가 감행하는 더 잔인한 복수를 상세히 묘사했다. 가끔은 텔레비전을 켜서 그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너무 징그럽지 않니? 몸서리를 치면서도 엄마는 어딘지 개운해 보였다. 그 영화들의 어떤 점이 엄마를 매료시켰는지 궁금했다. 제목을 기억했다 나중에 찾아보기도 했지만―주기적으로 시청 기록을 정리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치밀하지 못했다―잔인하기만 할 뿐 몰입의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열띠게 설명하다가도 식사를 마치고 나면 대화는 단숨에 종결되었다. 마치 사용 기한이 정해진 구독제 같았다. 이제까지의 대화는 없었던 것처럼 엄마와 나는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나는 식기를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거실 텔레비전 앞에 남았다.

거실의 텔레비전은 종일 켜져 있었다. 밤늦게까지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면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애국가가 나오고 있었다. 전원을 끄자 순식간에 집안이 고요해졌다. 문틈으로 안방을 들여다보니 엄마가 손바닥만한 핸드폰 화면으로 비명과 저주와 광기의 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이불을 반쯤 덮은 엄마의 둥근 옆모습이 무덤처럼 솟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에는 깨끗하게 관리된 침구와 바닥과 옷장이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 서서, 언제 올지 모르는 나를 위해 주기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환기를 하고 계절마다 이불을 가는 엄마를 상상했다.

내가 상암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엄마는 아쉬운 내색을 했다. 자고 가지……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아쉬운 한편으로 어서 나를 보내고 B급 슬래셔 무비에 파묻혀 혼자만의 여가를 보내고 싶은 것 같았다.

현관까지 따라 나온 엄마는 붙박이 신발장 문에 매달려 내가 신발을 신는 걸 지켜보았다. 엄마가 움직일 때마다 끼익, 끽, 하는 소리가 났다.

다음번 방문은 언제야?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나는 손가락을 넣어 구겨진 신발 뒤축을 꾹꾹 눌러 펴면서, 역시나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요.

그러면 엄마는 웃었다. 아무런 걱정 없다는 듯이. 내가 이 집을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불구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내가 떠날 때까지도 엄마는 신발장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었다. 마치 엄마를 배웅하는 어린애 같았다. 무심코 돌아보자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엄마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인사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혔다.

비상계단을 걸어내려가는 동안 누적된 피로가 차차 가셨다. 층마다 두 가구가 마주보는 구조가 반복되었다. 낡은 새시와 손을 갖다대면 한기가 느껴지는 칠이 죄다 벗어진 난간, 깨를 쏟은 것 같은 층계 바닥의 무늬―어린 시절 내가 그렇게 말한 걸 두고 엄마는 아직도 웃었다―가 낯설지 않았다. 계단에 쌓인 무단 적치물과 현관문에 달린 십자가, 철 지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여기가 몇층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일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다른 층보다 길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걷는 기분은 공동 현관에 도달해서야 끝이 났다. 나는 그곳을 나서서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성우이면서 지난 이 년간 ‘꼰대’의 AD로 일해왔다. 〈꼰대〉는 목요일 오후 다섯시 반에 편성된 〈근데 꽁지야, 근대?!〉를 제작진들끼리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초등학생 꽁지가 한국사 교사 윤선생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한국 근대사를 직접 경험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교육용이라고는 하나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구석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방송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막을 내린 건 〈꼰대〉만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더이상 전속 성우를 뽑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몇 해 전부터 성우 공채가 격년제로 바뀐 걸로 모자라, 좀처럼 내년 공채 일정을 공지하지 않던 탓에 방송국 내부에서는 일찌감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재하가 전속 일 년 차에나 맡는 AD를 이 년이나 한 것도 후배가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전속 기간이 끝나면 성우들은 강제로 프리를 달아야 했으므로, 재하의 기수를 끝으로 방송국에 남는 성우는 없었다.

그 시기 재하는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성우극회실에서 보냈다. 전속 성우들은 당번제로 극회실에 상주하며 전화 응대를 했다. 전속 막바지에 이르자 성우 중 일부는 외주 녹음을 하거나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원칙적으로 전속 기간에는 방송사 외부 업무를 할 수 없었지만 다들 알게 모르게 봐주는 분위기였다. 상주 시간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고, 그때그때 시간이 비는 사람이 극회실에 남는 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우로서 뚜렷한 업무가 없던 차에 극회실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화 응대는 자연스럽게 재하의 몫이 되었다.

이따금 극회실에 들를 때면 유선전화기 앞에 재하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마치 거기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인 것처럼. 재하는 군데군데 솜이 터진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꼼짝없이 오후를 보냈다.

재하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건 〈꼰대〉의 종영을 삼 주 남긴 시점이었다. 퇴근길에 극회실 앞을 지나가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소등을 잊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 누군가 소파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재하였다. 두 손을 가슴팍에 모으고 시선은 천장을 향한 모습이었다. 재하가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별안간 물었다.

선배님.〈슬램덩크〉, 좋아하시죠.

그렇게 좋아하지는……

일전에 실패한 농담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채고 내가 아, 하는 소리를 내자 재하가 슬쩍 웃었다.

그럼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전화 응대를 할 때와 같았다. 재하는 모든 전화에 성실하게 응했다. 호들갑을 떨지도 무심하게 굴지도 않았다. 타고난 소리 자체가 평균 남성보다 높기도 했지만, 전화를 받을 때면 목소리부터 깔고 보는 남자 동기들과는 달랐다.

강PD님 소개로 다음달에 오디션 하나 보기로 했거든요.

무슨 오디션이요?

〈슬램덩크〉요.

강선배는 〈꼰대〉의 메인 PD였는데, 나이가 지긋하고 굽히는 법을 몰라서 다들 어려워했다. 〈슬램덩크〉의 신작 극장판이 제작되는 것도, 그 강선배가 더빙판 오디션 기회를 주선해준 것도 뜻밖이었는데, 이어지는 재하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그런데 제가 살면서 〈슬램덩크〉를 본 적이 없어서요.

얼빠진 얼굴로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하 앞에 서자 꼭 마이크가 된 기분이었다. 순박한 인상과 유순한 성격 탓에 간과하기 쉬웠지만, 재하는 키가 꽤 컸다. 녹음을 할 때면 재하는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뒷짐을 지고 섰다. 마이크 높이에 맞추느라 다리는 넓게 벌리고 기다란 목은 숙여야 했다. 그러고 있으면 꼭 잘못된 거리에 도착한 사슴처럼 보였다.

나는 더듬거리며 OTT 서비스 몇 군데를 알려주었다. 재하는 그중 어느 것도 구독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보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그때 도서관 전자정보실에 가서 본다고.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요.

그럼 그냥 원작으로 봐요. 그게 평이 더 좋으니까.

선배는요?

나 뭐요?

어느 쪽이 더 좋냐고요.

그게 오디션과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저는…… 티브이 판을 더 선호해요.

그럼 저도 그걸로 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재하는 다시 벌러덩 누웠다. 신장에 비해 소파가 너무 아담해서 팔걸이 밖으로 다리가 튀어나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숙직실이라도 가라고 하자, 재하는 태연하게 극회실에서 밤을 새우고 첫차를 타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어디 사는데요?

남양주요.

재하는 처음처럼 두 손을 가슴 위로 다소곳하게 모았다. 천장을 보면서 어디 사냐고 묻는 재하에게 나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가까워요. 여기서 금방이에요.

 

우리집에서는 식사할 때면 텔레비전을 보았다. 엄마는 간단히 차려 먹을 때도 반찬을 반드시 식기에 옮겨 담았고, 밥그릇과 국그릇을 구분 없이 쓰는 걸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플라스틱 용기째로 반찬을 퍼먹고 있으면 엄마는 장난스럽게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하고는 덜어먹을 그릇을 꺼내주었다. 그런 엄마지만 식사 장소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게 굴지 않았다.

언젠가 동화책에서 그런 장면을 읽은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음식을 식판에 담아 먹는 가족을 몰상식하게 묘사하는 장면. 나는 의아했다. 우리집에서는 오랫동안 그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화성에서 일곱 살 무렵까지 살았던 집이 공간 구분이랄 게 없다시피 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화성을 벗어나 용인의 신축 아파트 단지에 입성하고 나서야 나는 집에도 구조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용인에 살면서 비로소 나에게도 방이 생겼다. 아빠에게는 서재가, 엄마에게는 침실이 생겼다. 거실과 부엌은 물론 부엌과 식사 공간도 구분되어 있었다. 그 집, 마침내 나만의 공간이 생긴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정해진 시각에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그 시기에는 아빠도 일찍 퇴근해 저녁을 함께 먹었다. 물론 그런 생활이 지속된 건 단 몇 달뿐이었다. 아빠의 퇴근은 조금씩 늦어졌고, 엄마와 나는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냈다. 성인이 되어서는 경기도를 벗어나 성북구의 작은 빌라에서 홀로 살았다. 혼자 살 때는 간단히 요기를 하거나 배달 음식으로 식사를 때웠다. 구매할 여유도 감당할 공간도 부족했으므로 당연히 텔레비전은 없었다. 대신 빨간 국물 자국이 무늬처럼 남은 협탁에 핸드폰이나 태블릿 피시를 세워두고 밥을 먹는 동안 밀린 드라마를 시청했다.

내가 성북구에 사는 동안 엄마는 용인에서 동탄으로, 동탄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다시 용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내가 어릴 때 살던 곳과 같은 동이다. 용인과 동탄과 광주의 집에는 모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밥때가 되면 엄마는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으로 갔다.

나는 그걸 천박하거나 못 배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살다보면 그런 일은 흔했다. 아빠는 여전히 밤늦게나 퇴근했고 주말에는 등산을 다니느라 바빴다. 내가 독립한 이후 사실상 엄마는 혼자 사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상암에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닐 무렵 엄마가 은근히 적적한 내색을 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나도 따라갈까.

그럼에도 엄마가 넌지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아빠는? 하고 물었다. 엄마는 냉정한 투로 아빠는 알아서 하겠지, 했다. 황혼이혼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그동안도 따로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엄마의 태도에서 이혼을 결심한 사람의 체념이나 결의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모두 처분했지만 처음 용인에서 살 때는 집에 침대가 많았다. 이사오면서 새로 장만하기도 했고, 친척이나 지인에게서 꾸역꾸역 받아온 것도 있었다. 안방에는 복고풍의 퀸 사이즈 침대―나는 그걸 여왕님 침대라고 불렀다―가 있었고, 내 방에는 흰색 까사미아 침대가 있었다. 그 외에도 어디선가 구해온 이층 침대―아마 분리수거장이었을 거다―를 분리해 안방과 옷방에 하나씩 두었다. 그런 식으로 엄마는 집안의 남는 공간을 어떻게든 채우려 했다. 화성에서 쓰던 물건은 텔레비전뿐이었다. 더 크고 최신식인 텔레비전이 거실에 있었지만, 엄마는 안방에 둔 옛날 텔레비전을 더 자주 봤다.

들떴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내가 새로 생긴 방에 머무는 시간은 점차 줄어갔다. 나는 낮 동안 그 방에서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피아노 레슨―일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엄마는 내게 피아노, 해금, 논술과 주판 등 여러 종류의 과외를 붙였다가 그만두길 반복했다―을 받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복도 끝, 안방 맞은편의 옷방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철 지난 옷들과 짐들에 둘러싸여, 더이상 이층이 아닌 이층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 방은 아빠의 서재와 붙어 있었다.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내가 큰 소리로 책을 읽거나 노래를 흥얼대면 아빠가 문을 양쪽으로 밀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소리 좀 낮춰라. 짧게 경고한 뒤 아빠는 다시 미닫이문 너머로 사라졌다.

화성 집에 살 때는 방이랄 게 없었으므로 온 가족이 거실에서 잤다. 현관 쪽에 아빠가, 벽 쪽에 엄마가, 둘 사이에 내가 누웠다.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깨면 아빠를 넘어가야 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나는 늘 아빠를 깨웠다. 아빠는 잠결에도 사람 넘어 다니면 수명 깎인다, 했다.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내가 수없이 깎은 아빠의 수명을 가늠해보곤 했다.

용인으로 이사한 뒤로 방도 침대도 훨씬 많아졌지만, 그 많은 침대가 아빠의 서재에 놓이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퀸 사이즈 침대를 홀로 썼고, 아빠는 서재에 이불을 깔고 잤다. 내가 옷방으로 자러 가자 아빠는 내 침대를 쓰기 시작했다―아동용이라 누우면 발목이 튀어나와서 모로 웅크려야 했는데도―. 밤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벗어나 내 것이 아닌 공간에 몸을 구기고 잠들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엄마와 아빠가 말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상황에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각방을 쓰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거였고, 두 사람은 한 공간에 있으면 반드시 다퉜으므로 각방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아빠가 미닫이문을 밀고 건너오면, 나는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낮 동안 내 공부방이었던 공간은 밤사이 변신 로봇처럼 아빠의 침실이 되었다. 나는 거실과 부엌을 나누는 복도를 따라 걸어 옷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옷들에 둘러싸여서야 나는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 문 너머에서는 아빠가 코를 골고―아빠는 눕자마자 잠드는 편이었다―엄마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모든 소음과 소란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이상 나는 안전할 수 있었다. 누구도 나를 헤칠 수 없고, 구해낼 수도 없는 온전한 나만의 시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