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차라리 잠든 밤(2)

매주 수요일 오후, 〈꼰대〉의 출연진은 다 같이 모여 대본 리딩을 했다. 신인 성우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라곤 구두공이나 시민1, 회사원3 같은 것이 전부였지만, 도무지 활약할 기회가 없는 전속들에게는 그마저도 소중했을 것이다.

전속 성우로서 재하가 처음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것도 그 리딩 현장에서였다. 재하는 대통령의 비서실장 역을 배정받았다. 재하가 호기롭게 입을 열자마자 강선배가 연기를 중단시켰다. 아니지. 자꾸 숨잖아, 지금. 재하는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목을 가다듬고 다시 연기했다. 그러나 두번째 시도도 금방 저지당했다.

부끄러움을 이겨내야 해.

그건 격려도 조언도 아닌 명령에 가까웠다. 그 말을 지표 삼아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

호흡해야 하는 구간과 아닌 곳을 구분하란 말야.

아가미가 달린 것도 아니고 호흡을 해야 할 곳과 아닌 곳을 어떻게 구분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호흡은 힘들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건데. 오히려 의식하기 시작하면 지금껏 어떻게 호흡해왔는지 알 수 없어지는 건데. 그런데 그걸 구분하라니. 나로서는 무리한 요구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부끄러움을 이겨내라니. 그게 이기고 지는 문제인가.

한번 말리기 시작하자 재하는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처음 몇 번은 나름대로 변주를 줘가며 접근했지만, 연이은 퇴짜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같은 구간에서 대사를 씹었고, 꼬였고, 포기했다.

이겨내야지, 응? 팍, 하고 뚫어내야지.

그 순간 재하가 느끼는 건 부끄러움보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에 가까워 보였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서 연기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연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느끼는 모멸감.

결국 재하의 배역은 한 기수 선배인 희원에게 돌아갔다. 재하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배역 교체도, 연기에 대한 지적도, 모멸감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재하의 그런 면은 유연함과는 조금 달랐다. 돌아가거나 요령을 피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모르긴 몰라도 강선배 역시 재하의 그런 묵묵함을 좋게 본 모양이었다. 전속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굵직한 오디션을 물어다준 걸 보면 말이다.

매주 수요일 리딩이 끝나고 나면, 재하와 나는 극회실에서 특별훈련을 진행했다. 특별훈련이라는 명칭은 재하가 붙였다. 옛날 만화 속 인기 없는 동아리 같다는 게 이유였다.

훈련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재하는 다소 엉뚱한 면이 있었다. 첫 주에 어색한 분위기를 풀 겸 나는 재하에게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대하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재하 쪽에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재하는 냉큼, 그럴까? 하고 말을 놔버렸다. 그러더니 다음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배, 하이, 하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버리는 바람에 나는 재하와 꼼짝없이 반말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의외인 점은 또 있었다. 재하는 만화를 꽤 많이 보았다.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소년 만화도 최신 화까지 꼬박꼬박 챙겨 봤고, 『드래곤볼』이나 『리니지』 같은 만화도 완결까지 읽었다. 주로 일대기형 만화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무협지부터 순정만화까지 가리는 것 없이 폭넓게 읽었다―내가 신기해하자 무협지와 순정만화는 사실 굉장히 비슷한 구조라고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만화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상대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늘어놓는 일도 없었다. 재하는 오로지 그것들을 성실하게 챙겨 보았다.

물론 가장 의외였던 건 그렇게 많은 만화를 읽었으면서도 〈슬램덩크〉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도해본 적은 있어.

언제?

예전에, 만화방에서.

극회실 조명이 화면을 가리지 않도록 재하가 태블릿 피시의 각도를 조절했다. 태블릿 피시 뒤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녹음을 할 때면 재하는 손잡이에 손등을 끼우고 대본을 읽었다. 자기 몫의 대사가 한두 줄뿐인 걸 생각하면 과분한 장비 같기도 했지만, 사실 요즘에는 아무도 종이 대본을 사용하지 않았다.

집 앞에 있어서 자주 갔어. 엄마가 회사 다녀서 낮에 집이 비었거든.

여기보다 조금 좁았는데, 하며 재하가 손등을 태블릿 피시 손잡이에 끼운 채로 양팔을 벌렸다.

사면이 다 만화책이었어. 책꽂이 밀면 안에도 가득하고, 바닥에도 여기저기 쌓여 있고.

재하가 극회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나도 덩달아 극회실을 둘러보았다. 문이 닫힌 상태에서도 윙, 하는 소리가 나는 오래된 냉장고, 다리 밑에 골판지를 접어 넣어 균형을 맞춘 책상, 찢어진 가죽 사이로 솜이 노출된 소파와 벽에 달린 기수별 성우들의 반명함 사진이 보였다. 재하의 기수를 마지막으로 게시판 아래쪽은 텅 비어 있었다.

한 권에 이백원.

재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평소보다 묘하게 수다스러운 모습이었다.

파격적인 가격 정책이다.

천원 들고 가면 거기선 부자야.

나는 재하가 매일 빌려 읽었을 만화책을 떠올렸다. 장르도 내용도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천원어치의 이야기를.

재하가 말하는 동안에도 영상은 계속됐다. 한쪽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대사가 흘러나왔다.

근데 끝까지 보기도 전에 망해버렸어.

어느새 재하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지만 어느 것에도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재하가 태블릿 피시를 똑바로 세웠다.

요즘에는 죄다 만화 카페로 바뀌었더라.

근데 좀 다르잖아.

그래도 더 좋아졌던데. 먹을 것도 팔고.

나 다니던 데도 줬어.

뭐 팔았는데?

재하는 곰곰이 생각하는 건지, 영상에 집중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이 없었다. 화면 속에서 강백호가 농구화를 고르고 있었다. 익숙한 빨간색 조던이 아니라, 흰색 바탕에 검정과 빨강이 섞인 에어 조던6였다.

콜라.

못 먹는다며.

그땐 먹었어.

훈련은 내내 그런 식이었다. 거창한 건 없었고, 무선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슬램덩크〉를 시청하는 게 전부였다. 이따금 재하가 입속말로 대사를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콕 집어서 연구하지는 않았다. 특정한 역할로 제의를 받은 게 아니라서 한 가지 배역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는 게 재하의 주장이었다. 내가 하는 거라곤 단행본과 더빙판의 로컬라이징이 다른 경우 설명해주는 게 다였다. 내가 신소걸과 신준섭과 심준섭의 차이를 설명하면, 재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새겨들었다.

소속 학교와 생김새로 선수들을 구분하는 나와 달리, 재하는 목소리로 구분했다. 윤대협과 서태웅이 맞붙는 장면에서 재하가 작게 웃었다.

둘이 같은 성우야.

어떻게 알아?

내 물음에 재하는 생각해본 적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냥…… 들리니까.

의식하고 들으니 정말 비슷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재하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꽤 많은 인물들이 같은 목소리를 공유했다. 티가 나는 경우도 있었고, 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도 김수겸과 송태섭이 같은 성우라는 것, 중반부터 대부분의 성우가 교체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선배는 의외로 만화 별로 안 봤나보네.

어릴 때 집에 케이블 채널이 안 나와서 그래.

그럼 처음 본 버전이 이거야?

재하가 화면을 가리켰다. 나는 이것도 봤지, 하고 대꾸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슬램덩크〉의 목소리는 98년도에 방영한 SBS 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슬램덩크〉의 ‘진짜’ 목소리라고 생각해왔다. 비디오 판의 존재는 방송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재하와 매주 감상하는 버전은 비디오 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SBS 판을 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오프닝곡만큼은 SBS 판을 잘라 붙였는데, 그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박상민의 〈너에게로 가는 길〉을 〈슬램덩크〉의 주제곡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내 안에 작은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고, 버튼을 임의로 눌러가며 그때그때 기억 속의 목소리를 갈아끼우는 것 같았다. 기억이라는 건 생각보다 명확하지 못해서, 나는 그런 식으로 사는 동안 들었던 〈슬램덩크〉의 목소리를 한데 섞어서 기억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혼합되고 편집된, 온전치 못한 〈슬램덩크〉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거다.

 

98년에 엄마는 내게 수면제를 먹이고 번개탄을 피웠다. 거실에 개다리소반을 펼쳐놓고 저녁을 먹는 동안 SBS에서는 〈슬램덩크〉가 방영중이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으려고 버티는 바람에 엄마는 진땀을 뺐다. 거의 남기다시피 한 밥상을 치운 뒤 엄마는 한 손에 물을 반쯤 채운 컵을 들고 왔다. 반대쪽 손을 펼치자 흰색 알약이 반쪽하고도 한 알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게 종종 엄마가 자기 전에 먹는 약이라는 걸 알았다. 언젠가 약의 효능에 대해서 묻었을 때 엄마는 영양제라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을 추호도 믿지 않았다. 식칼로 자른 건지 알약 단면이 삐뚤빼뚤했다.

엄마가 내게 약을 강제로 먹인 건 아니었다. 그저 그걸 내게 내밀었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나는 알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혀를 쭉 내밀었다. 혓바닥에 알약을 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목을 젖혔다. 그런 뒤에 입을 크게 벌려 알약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까지 보여주었다. 엄마가 내 손에 반쪽짜리 알약을 쥐여주며 따라 해보라고 했다. 나는 혀를 헤, 내밀어 알약의 단면을 갖다댔다. 알약이 혀에 닿자마자 쓴맛이 올라왔다.

빨리 삼켜. 삼켜야지 안 써.

아무리 삼키려고 해도 약은 계속 남아 있었다. 입안이 쓰고 물배가 찼다. 엄마가 턱 아래 손바닥을 대고 뱉으라고 했다. 엄마의 손바닥에 축축해진 알약을 뱉었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더 따랐다. 엄마가 내게 다가올 때마다 한계까지 찬 물이 흔들렸다. 엄마가 잔을 내밀며 이번에는 물을 곧바로 삼키지 말고 머금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양치 후 입을 헹굴 때처럼 물이 목구멍까지 찼다. 목뒤로 물이 넘어갈까봐 고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벌어진 입안으로 엄마가 알약을 똑, 떨어뜨렸다. 엄마의 축축한 손바닥이 내 코와 입을 감쌌다. 고개가 젖혀졌다.

없어졌다.

내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엄마의 손이 떨어지자, 혀로 입안을 샅샅이 훑어봐도 약은 없었다. 잘했어. 엄마가 나를 칭찬했다.

아홉시가 되자 잠들 준비를 했다. 나는 이불 정중앙에 누워 분주히 돌아다니는 엄마를 구경했다. 엄마는 칙칙한 노란색 테이프로 창문과 문 틈새를 막았다. 테이프가 오래되어 자꾸만 찢어졌다. 엄마는 길게 찢어진 테이프 조각을 공처럼 뭉쳐 아무데나 붙였다. 하도 모기가 들어와서 막아두는 거라고 했다. 선천적으로 땀이 잘 안 나는 체질은 모기에게 물리지 않는다던 아빠가 떠올랐다. 자랑할 게 없어서 저런 걸. 엄마가 등을 돌리고 씹어뱉던 말.

아빠는?

엄마는 잘못 붙인 테이프를 떼어냈다가 다시 붙였다. 잠에 들 때는 둘뿐이어도 아침에 눈을 뜨면 아빠가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단단히 막아버리면 아빠는 어떻게 들어오지? 접착 면이 떨어지면서 쩌억, 하고 귀 따가운 소리가 났다. 기포가 일어난 부분은 떼었다 붙여도 그대로였다. 엄마는 테이프 칠을 멈추지 않고,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빠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일찍 잠들기 싫어했으므로 아홉시에 누우면 열시나 열한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나는 최대한 버티다가 졸음이 몰려오면 엄마를 툭툭 건드리며 잠들지 못하게 했다.

엄마.

응.

엄마 자?

응.

엄마.

왜.

엄마 나 사랑해?

응.

나 진짜 사랑해?

응.

나 진짜 진짜 사랑해?

그래……

나도 사랑해.

……

엄마는 나 안 사랑해?

사랑해……

내가 사랑을 확인할 때마다, 엄마는 반쯤 잠에 취해서 웅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답변이 탐탁지 않아서 괜히 같은 걸 묻고 또 물었다.

엄마, 엄마 나 진짜 사랑해?

응.

나 왜 사랑해?

그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변주를 주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답을 피했다기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잠이 든 것 같았다.

어쩌면 마지막 질문은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만큼이나 나도 잠에 취해 있었으니까. 엄마가 대답하지 않은 것과 내가 질문하지 않은 것. 이쯤 되자 나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다. 어떨 때는 전자 같고, 어떨 때는 후자 같다. 어떨 때는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둘이 뭐 다른가 싶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참을 수 없어져서 엄마를 힘껏 흔들고 때렸다.

엄마! 엄마, 내 말 듣고 있어?

엄마는 한숨처럼 들었다고 대답하지만,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엄마, 엄마 나 사랑해? 응…… 얼마큼 사랑해? 으응…… 엄마 자? 아니……

그런데 그날은 내가 엄마보다 일찍 잠들었다. 잠이 온다, 는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나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목 안쪽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지기 전까지 자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목구멍이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안을 긁을 수 없어서 피부만 벅벅 긁었다. 기도에 뭐가 단단히 걸린 것처럼 갑갑했다. 기침이라도 해서 그것을 빼내고 편해지고 싶었다. 목을 가다듬으려 숨을 들이켰을 때, 목에서 느껴지는 게 가려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걸 알았다.

사우나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처럼 가슴이 턱 막혔다. 들숨도 날숨도 힘겨웠다. 토할 것 같았다. 누군가 내 위장을 붙잡고 뒤흔드는 기분이었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와 배의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 사지를 비틀어가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그러나 목소리가 시원하게 나오질 않았다. 휘적대는 내 팔에 걸리는 게 엄마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포기하면 그 순간 시합 종료예요. 흉하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엄마, 나 목이 이상해. 모기 삼켰어. 목이 바글바글해요. 모기가 알을 낳았나봐. 테이프를 다시 붙여야 할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소리를 끌어모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건

목에…… 모그, 목…… 모기……

가 전부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꺽꺽대는 소리만 나왔다. 숨이 안 쉬어지는 것보다 말이 안 나오는 게 더 서러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나는 그제야 내가 죽어가는 중이라는 걸 실감했다―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포장재를 힘껏 감싸쥐어 기포를 터뜨리는 것 같은 소리. 요란한 박수 소리 같기도 했다. 끔찍한 것이 입을 벌리는 소리. 갈라지고 찢어지는 소리. 함성. 버저 비터.

헹가래를 타듯 몸이 떠올랐다.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힘겹게 눈을 뜨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울고 있었다. 아빠가 정말로 우는 건지, 내가 울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거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피범벅이 된 송태섭과 눈물을 쏟아내는 정대만이 나를 쫓아왔다. 아빠에게 매달려 집밖으로 나오자, 신선한 공기가 쏟아졌다.

마당에 엎어지는 내 등을 아빠가 넓적한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손바닥이 등짝에 닿을 때마다 흐억, 꺽, 하는 소리를 쏟아냈다. 꽉 막혔던 폐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것 같았다. 여전히 감질나고 답답했지만 그 구멍에 매달려 숨을 뱉었다. 내 생애 그렇게 호흡이 어려운 건 처음이었다. 현관문이 있던 자리가 뻥 뚫리고, 찢어진 테이프가 집안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대문 밖으로 구급차가 보였다. 그 앞에서 엄마가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과 침으로 범벅이었다. 침을 아무리 뱉어내도 속이 들끓었다. 어, 엄…… 엄마. 애처롭게 부르자 아빠가 내 등을 문질렀다.

응, 아빠 여기 있어.

아빠는 종종 내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대신 대답했다. 아빠 말고 엄마, 하면 아빠는 섭섭한 것도 같고 멋쩍은 것도 같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내가 엄마를 부를 때면 어김없이 대꾸했다. 나는 가끔 그게 지겨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아니라고, 아빠 말고 엄마를 불러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나…… 침인지 말인지 모를 것을 뱉자 아빠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배고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와 한다는 말이 그거라니. 고작 허기짐을 호소하는 거라니. 아빠는 알겠다, 하고 나를 안아올렸다. 나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그곳에서 위세척을 하고 몇 번의 구토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정말 허기졌을까? 아니, 아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부끄러웠다. 스스로 죽거나 살아갈 자격이 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배고프지 않았는데 배고프다고 말했다.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허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