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차라리 잠든 밤(마지막)

입사 초부터 선배들은 전속 성우들을 두고 너는 누구 까라다, 는 얘기를 심심찮게 떠들었다. 그건 칭찬 같기도 하고 악담 같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면 멀쩡한 사람을 두고 가짜라고 하는 셈이니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그 말을 듣는 막내 기수들은 퍽 기뻐 보였다.

꼭 그렇게 나쁜 뜻은 아니야. 재하는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목소리의 결이 비슷하다는 뜻이라고. 공부할 때 아예 기성 성우 까라를 잡고 연습하기도 한다고 했다.

재하는 성우 준비 기간도 짧은 편이었고 소리의 특색이 강한 편도 아니었다. PD들 사이에서는 원석 뽑겠다고 너무 모험을 한 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런 평에 대해 재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재하의 차례가 되었을 때 답은 한 번에 나오지 않았다. 재하는…… 재하는 뭐지? 몇몇 기성 성우가 언급되었다. 중성적인 미성의 소유자들. 자연스럽고 부담 없는 목소리. 그렇지만 누구도 딱 들어맞는 것 같지 않았다.

결론이 나기도 전에 호출을 받는 바람에, 결국 재하가 누구의 까라로 지명되었는지 듣지 못했다.

훈련 마지막 주에 나는 재하에게 오디션에 합격하면 누구를 맡고 싶냐고 물어봤다. 재하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서태웅.

서태웅?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내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말해놓고 저도 민망했는지 재하는 슬며시 눈길을 피했다.

서태웅 왜?

……대사가 적어서.

뭐래. 다시 골라. 내가 정색을 하자 재하는 선택을 번복했다.

그럼 권준호.

오, 권준호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재하는 권준호가 주요 배역이면서도 부담이 적어서 좋다고 했다. 스타팅 멤버는 아니지만 벤치의 최전방에 있는 부주장. 그건 어릴 적부터 애매한 감투를 맡아온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가끔은 이게 내게 주어진 운명 같기도 해.

진지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자 삼류 게임 대사처럼 들렸다. 그러면서 재하는 실장이나 총무처럼 전속 활동에 필요한 중책이 아닌 AD를 맡게 된 것도, 넘겨줄 후배가 없단 이유로 어영부영 계속하게 된 것도 전부 자기 천성 때문이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삼 년 내내 체육부장이었어.

원래 그런 건 좀…… 잘나가는 애들이 맡지 않나?

내 미묘한 반응에 재하는 발끈하며 체육부장은 애들 줄 세울 때랑 운동장에 선 그을 때만 찾는 직책이라고 반박했다. 물 채운 주전자로 흙바닥에 경기 진영을 그리는 게 주어진 역할의 전부라면서.

이게 은근 테크닉이 필요한 작업이거든. 양 조절을 잘해야 균일하게 선을 그릴 수 있어.

부장 권한으로 다른 애들 시킬 순 없었어?

그건 안 돼.

재하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나직이 고백했다.

왜냐하면 선 긋는 거…… 좋아했거든.

방송국에 입사하고 나서야 재하 같은 목소리―어떨 때는 여자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남자 같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둘 모두 아닌 것 같은―가 꽤 수요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성우들 사이에 있으면 재하의 목소리는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왈라 신을 녹음할 때 재하는 종종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재하의 연기는 군중 소리에 묻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녹음한 소리는 음향을 낮추거나 효과음으로 덮어버렸다.

재밌었어. 똑바로 그어지면 기분좋고.

주먹을 쥔 재하의 손이 공중에 크게 원을 그리다 멈추면, 제각기 대본에 없는 말을 떠들던 성우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럴 때면 녹음 부스 너머를 주시하는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꼭 집어서 나를 본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부스 밖에 있고, 재하가 부스 안에 있어서 그랬을 뿐이다. 각자가 맡은 보잘것없는 역할을 해내는 동안에 말이다.

합동 체육 하면 알게 모르게 체육부장들끼리 경쟁 붙었어. 은근히 긴장됐다, 그거? 지목 못 받은 날에는 집에 가서도 생각나.

뭐가?

깔끔하게 그은 선이.

나는 체육복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운 어린 재하를 떠올렸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천장에 붙어 있는 야광 별을 올려다보는 중학생 남자아이. 변성기가 지나고 나면 성대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추호도 모른 채 다음에는 꼭 선을 그어야지, 내가 긋고 말 거야, 하고 몰래 다짐하는 아이. 엄마가 수저 좀 놓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기 전까지는 어떤 소리도 발설하지 않는 아이.

 

오디션 결과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개봉 소식으로 알게 되었다. 원래들 그래. 떨어진 건 잘 안 알려줘. 재하는 크게 상심한 것 같지 않았다. 정작 상심한 건 나였다. 그동안 내심 재하의 목소리가 〈슬램덩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재하였다―막상 이렇게 되니 아쉬웠다.

누구 연기했어? 오디션 때.

재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모르겠어.

재하의 마지막 근무일에 나는 홀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러 갔다. 재하는 끝나고 동기들과 뒤풀이가 있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천천히 영화관까지 걸어갔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방송국과 내가 사는 집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심야영화라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상영관에 아저씨 관객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나는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잠시 후 상영관 조명의 조도가 낮아졌다. 화재시 비상 대피로를 따라 이동하라는 안내와 함께 스크린에 상영관 도면이 떴다. 나는 대피 경로를 눈에 익히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화재나 붕괴로 출입문이 봉쇄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조명이 완전히 꺼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여전히 어두웠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재하가 모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화는 이전까지 영상화된 적 없던 산왕전을 다루고 있었다. 송태섭의 과거와 경기 장면이 교차되었다. 원작을 보지 않은 재하로서는 모르는 내용인 게 당연했다. 티브이 판은 북산의 전국 대회 진출 직전에 끝났다. 원작에서 생략된 패배도 꾸며내지 않았다. 재하의 〈슬램덩크〉는 거기서 끝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었다. 나는 선수들의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성우들의 연기였다. 비디오판의 캐스팅이 유지된 건 강백호 역의 강수진이 유일했는데, 다른 성우들의 목소리도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목소리로 덮어씌울 수 있다는 것에.

경기가 중단될 때마다 송태섭의 삶이 내가 모르는 목소리로 펼쳐졌다. 송태섭에게는 실종된 형이 있었다. 형의 이름이 송준섭인 걸 보고 나는 재하가 헷갈릴 이름이 또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다. 전국 대회 전날 송태섭은 엄마에게 편지를 남겼다. 살아 있는 게 저라서 죄송해요. 문장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나는 가슴이 허벅지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숙였다. 나는 재하와 다른 〈슬램덩크〉를 알고 있었다. 아직 용인에 머물 때, 재고 떨이를 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원작을 사온 적이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비닐은 너덜거리는 표지를 조금도 보호해주지 못했다. 전권이 있지도 않았다. 내용을 모르는 후반부만 한 권에 오백원을 주고 사왔다.

그날 밤 나는 옷으로 가득찬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걸 읽었다. 장만한 지 얼마 안 된 폴더형 핸드폰의 불빛에 의존해서 그런지, 중간중간 잘려나간 페이지 때문인지 장면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옳게 읽고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내가 읽은 장면들에서 송태섭에게는 죽은 형도, 슬픔도, 목소리도 없었다. 그저 도내에서 가장 민첩한 가드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대사를 소리 내 읽어보았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들렸다.

세상에 너무 많은 판본이 존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들을 다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온전한 〈슬램덩크〉를 본 적이 없는 셈이었다. 전부 조각나고 뜯어지고 훼손된 〈슬램덩크〉뿐이었다. 그 사실에 나는 서러워졌다. 만화책에 고개를 묻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무릎에서 고개를 떼고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스크린에 온전하고 유려하게 복원된 〈슬램덩크〉가 있었다. 내게 익숙하고 또 낯선 방식으로. 나는 재하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려 했다. 만약 재하가 오디션에 합격했다면 어떤 역할에 어울렸을지 상상했다. 그러나 주인이 정해진 목소리 사이에 재하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아저씨들의 탄성이 튀어나왔다. 모두 영광스러운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깊숙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영화관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이로써 재하의 전속 기간은 정식으로 끝이 났다. 나는 곧장 재하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재하야, 프리다! 쏴라!!

아직 술자리가 끝나지 않았는지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다음 주부터 나는 수요 경제 방송에 투입되었다. 선배들은 이제 조기 종영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섣부른 위로를 했다. 적어도 귀띔 정도는 해줄 거라고. 나는 몇 년 차쯤 되어야 귀띔 없이 종영되어 마땅한 방송과 그렇지 않은 방송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전속계약이 종료된 후로도 재하는 변함없이 출근했다. 녹음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재하가 오디션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삼십 년 만에 다시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와중에도 변한 건 없었다.

어김없이 편집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 재하가 찾아왔다. 출입문 유리창 너머에서 양손에 음료를 든 재하가 입을 벙긋거렸다. 재하의 얼굴 위로 경제 주간지 기자의 따분한 목소리가 씌워졌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자 돌연 소리가 멈췄다. 나는 헤드폰을 벗고 출입문을 열었다.

멀었어?

밤새워야 돼. 너는?

배차 간격 사십 분이라 시간 좀 때우다 가려고.

재하가 편집실 구석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세 개의 다리 중 한쪽이 짧은지 의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나는 헤드폰을 한쪽 귀만 덮도록 비뚤게 썼다.

내가 하는 작업은 립노이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면서 누구나 조금씩 소음이 발생했는데, 심하면 돌멩이가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플러그인으로도 제거되지 않는 부분은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지워야 했다. 나 같은 막내 PD에게 제격인 아주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자료 화면에 입힌 내레이션은 희원의 목소리였다. 그는 재하와 달리 목소리가 꽤 중후한 편이었다. 그날따라 입이 건조했는지 소음이 유독 많이 잡혔다.

너네 선배 슈팅스타 먹고 녹음한 거 아니야?

이 형이 원래 긴장하면 입이 잘 말라.

재하가 들고 있던 음료를 건넸다. 레몬 조각이 들어간 에이드였다. 재하의 것은 평범한 커피였다. 에이드를 한입 쪽 빨자 목구멍을 타고 따끔따끔한 탄산이 뻗어나갔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무슨 맛이냐며 재하가 손을 뻗길래 음료를 내 쪽으로 당겼다.

이거 탄산 있는데, 먹어도 돼?

탄산이 아니고 콜라를 못 먹는 거니까.

그럼 제로 콜라도 못 먹어?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사이다는?

먹으려면 먹지.

페리에는?

스무고개 하냐.

그럼 슈팅스타는? 너 그건 먹는다며.

재하가 에이드를 향해 뻗던 팔을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그렇긴 한데. 예전에 엄마가 그 회사 다니다가 잘린 후로는 잘 안 먹어.

예전에? 예전에 언제.

남양주 살기 전에.

그전에 어디 살았는데?

대청동.

나는 편집중이던 파일을 내리고 인터넷 사이트에 대청동을 검색했다. 컴퓨터 화면에 강남구 지도가 떴다.

좋은 데 살았네.

근데 대청이 약간 강남의 슬럼가거든.

강남이 다 강남이지 슬럼가가 어딨어.

아냐, 대청 사람들 거기에 자부심 있어.

별게 다 자부심이다.

재하는 억울한 듯이 진짜야, 하더니 멋대로 키보드에 손을 가져갔다. 대청역 개포일원아파트, 라고 치자 개포동 아파트 시세가 떴다.

만화방도 이 근처였어?

응. 이쯤이었는데.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재하가 기다란 회색 사각형에서 멈췄다. 일원아케이드라고 적힌 건물이었다. 재하가 손가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상점들 중 하나를 짚었다.

되게 작아 보이는데. 음식도 팔았다며.

판 건 아니고 주인 아저씨가 그냥 준 거야. 평소에는 말도 안 걸었어.

재하가 마우스 휠을 굴리며 확대와 축소를 반복했다. 만화방이 있던 자리는 아무리 확대해도 상점명은 나오지 않았다.

근데 무슨 햄버거도 없이 콜라를 주냐.

햄버거도 줬어.

감자튀김은?

감자튀김은 자기가 좋아해서 다 먹었대.

웃기는 아저씨네.

그치. 대여해주다 말고 대뜸 햄버거 좋아하냐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주더라고. 탄산 다 빠져서 하나도 맛없더라.

재하는 손안의 반투명한 갈색빛의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잔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재하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 오는 길에 그거 마시고 쓰러졌잖아.

재하가 젖은 손바닥을 무심하게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와, 세상이 막 뒤집히고 쪼개지는데. 근처에서 농구하던 형들이 신고해서 살았지, 뭐. 나는 그 형들 무서워서 맨날 멀리 돌아갔는데.

재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즐겁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재하가 부끄러워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 회사 잘리고, 이사가기 전에 보니까 문 닫았더라고. 만화책도 싹 다 빼고.

재하가 슬쩍 웃으면서 아깝게, 했다.

나는 텅 빈 만화방 앞에 선 어린 재하를 떠올려보려 했다. 간판을 뗀 자국과 만화책이 탑처럼 쌓여 있던 자리. 어린 단골손님에게 독극물을 건넨 저의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사라진 만화방 주인을 떠올리던 재하.

그런 식으로 세상이 뒤집히고 쪼개져버린 후, 어떻게 다시 붙여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해보자.

뭘?

나는 헤드폰 단자를 컴퓨터에서 뽑았다. 유튜브에 들어가 〈슬램덩크〉 더빙판을 검색하자, 섬네일만 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화질의 영상들이 떴다.

더빙. 지금 해보자고.

의자가 흔들리면서 재하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긴장했다. 재하가 거절하거나 겁낼까봐. 재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물기 묻은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하자 숙박업소 광고가 멋대로 재생됐다. 경박한 멘트가 편집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재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스피커 소리를 줄였다.

프리미엄 결제 안 했어?

내 거 아니야. 회사 계정이야.

광고를 넘기고 나서야 영상이 재생되었다. 핵심적인 장면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영상이었다. 이상하게도 같은 장면이 두 번씩 반복되었는데,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건 더빙판들을 비교하기 위해 짜깁기한 영상이었다. SBS 판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비디오 판이 나왔다. 재하가 조금씩 대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한 평짜리 편집실에는 방음 부스도, 토크 백도 없었다. 영상은 싱크가 묘하게 어긋났다. 음향을 최대한으로 낮췄다. 등장인물의 입 길이에 맞춰 재하가 시사를 시작했다. 어떤 목소리는 어울렸고 어떤 목소리는 튀었다. 어떤 건 애매했다. 처음에는 웃겼던 것도 듣다보니 나쁘지 않았다. 어떤 황태산은 내가 알던 재하였고 어떤 전호장은 내가 모르는 재하였다. 어쨌든 재하는 변성이 주특기인 성우는 아니었다.

농구부를 부수러 온 정대만에게 송태섭이 소리쳤다. 소리를 줄여놓는 바람에 김일 성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건 바로 선배 당신이야.

그 대사를 말하는 목소리는 김일도, 오세홍이나 손원일도, 엄상현도 아니었다.

이어서 무리하게 톤을 높인 재하가 박하진을 연기하는 바람에, 나는 하마터면 마시던 에이드를 뿜을 뻔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끅끅대며 웃었다.

소리 다 뜬다, 야.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더빙을 한 건 재하인데,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에이드로 목을 축였다. 잔을 당겨온 경로를 따라 책상에 물기가 남았다. 탄산 때문에 목이 따끔거렸다. 나는 탄산의 기운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하나도 안 맞아.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음 소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턴오버를 막기 위해 코트를 가로지르고, 농구공을 향해 몸을 날리고, 골대 밑에서 삼 점 슛이 튕겨져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선수들이 고요하게 움직였다.

영상이 끝나자 화면이 어두워졌다. 화면 하단에 안내 문구가 떴다. 다음 동영상까지 남은 시간 오 초. 나도 재하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재하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상암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배웅하다 말고 엄마가 불쑥 물었다.

데려다줄까?

엄마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전부 무시하고 달렸다. 그래도 상암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다.

여기가 네가 사는 동네구나.

엄마가 느리게 주행하며 창문 너머로 오피스텔이 즐비한 거리를 구경했다.

들어갔다 갈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볍게 물었다. 엄마는 웃었다. 됐어, 아무나 들이지 마. 엄마는 나를 공동 현관 앞에 내려주고 떠났다. 엄마가 탄 차가 멀어졌다. 흰색 번호판이 때가 타서 지저분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를 걸어올라가면서 나는 골몰했다. 엄마가 죽지 않고 용인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외곽순환도로를 돌다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아래로 추락하지 않을 가능성을. 어떤 위험도 도사리고 있지 않은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나오다가 반대쪽에서 돌진하는 차와 충돌하지 않을 가능성을.

매트리스에 누워―이사를 하고도 나는 줄곧 침대 사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구독중인 OTT 서비스에 접속했다. 아무 영화나 눌러보던 중 화면 상단에 엄마의 문자가 떴다.

―이제 집.

―잘 자.

나는 그날 밤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너무 불합리하게 군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내게 저지른 실수―그것이 명백한 실수라는 걸 나는 알았다―를 꼬집어 기억하는 것 말이다. 짙은 녹색 번호판이 때가 탄 흰색 번호판으로 바뀌는 세월 동안 엄마는 혼자 남았다. 함께 살 수도 있었을 집에 홀로.

나는 내가 홀로되었던 밤을 기억한다. 아빠를 기다리다 어느 순간 잠들어버린 끈기 없는 밤을. 가끔은 내가 그 밤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밤이 나를 기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밤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혹은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 밤의 결정권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지금도 내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반복 재생되는 녹음기처럼 묻고 또 묻는다.

엄마 자?

엄마는 답이 없다.

엄마 듣고 있어?

나는 엄마가 대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린다.

엄마, 엄마 나 사랑해?

잠이 몰려오는 것 같다. 잠들었나? 싶을 때 엄마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대답한다. 하마터면 놓칠 뻔할 정도로 작은 소리다.

……아니.

나뭇잎이 살을 비비는 소리가 엄마의 대답처럼 들려온다.

그렇구나.

……

……

……나도 사랑해.

환호하는 관중 소리가 멀어지고, 멀리서 농구공 튕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98년도에 들었던 목소리와 처음 가본 심야의 영화관에서 들었던 목소리, 편집실에 나란히 앉아 듣던 재하의 목소리는 평행 세계처럼 서로 닿을 수 없다. 나는 아마 이 장면을 평생 기억할 텐데, 그때 본 게 무엇인지는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면 아예 새로운 소리를 입히고 싶어진다.

나는 잠결에 들었던 버저 비터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맨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원을 왼쪽과 오른쪽에서 번갈아 나오도록 편집한 영상처럼. 내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산 같은 가드를 발 빠르게 뚫는 선수처럼.

나는 매일 밤 묻지 않아 듣지 못했던 답을 떠올린다.

 

 

 

 

 

* 소설의 제목은 〈슬램덩크〉 TVA 판의 엔딩곡, WANDS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世界が終るまでは…)〉의 가사 중 ‘서로의 모든 것을 아는 것만이 사랑이라면 차라리 나 잠들겠어’를 변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