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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나서 검도 학원에는 더이상 나가지 않았다. 두 달 정도 다녔을 무렵 그만뒀다. 가방에 짐을 싸서 고향에 내려갔다. 연락도 없이 집에 갔는데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좀 쉬다가 다른 학원에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주로 마루에 가만히 누워 있거나 잠을 청했다. 한여름 햇빛에 눈이 따가워도 그렇게 했다. 발목까지 오던 강아지가 어느덧 자라 몸통이 내 허벅지만해졌다. 해가 질 즈음마다 산책을 시켰다. 손목에 생긴 상처는 날이 더워서인지 쉽게 아물지 않았고 자꾸 염증이 생겼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엄마에게 말하자 믿는 눈치였다. 한의원에서 약초를 받아와 절구에 찧어 상처에 발랐다. 엄마와 누나가 내 새끼손가락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던 적이 있다. 둘은 장난이라며 나를 앞에 앉혀 정성스레 물을 들였지만, 나는 그게 맘에 들어서 다른 손가락에도 해달라고 졸랐다. 분명 놀림받을 거야. 그런 이유로 해주지 않아 한동안 토라졌다. 실제로 반 아이들과 선생님까지 놀렸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요즘은 왜 안 해요?
그런 걸 요새 누가 해.
밤이 오면 끙끙 앓았다. 열대야로 땀이 나는 건지, 몸이 아파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이불이 땀에 젖었다. 동네와 멀지 않은 저수지에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졌다. 엄마와 절에 가서 공양을 하고 기왓장에 소원을 적었다. 엄마와 친분이 있는 스님은 힘들 때면 이곳에 있는 나무들을 떠올리라고 내게 말했다. 오래전 스님은 내 몽유병을 고쳐주었다. 엄마가 그렇게 믿어서 나도 믿고 있다.
방학이 시작될 무렵 엽은 내게 계획이 있는지 물었었다.
계곡에 가기로 했어.
누구랑?
부모님, 누나.
나도 가도 돼?
나는 엽이 지나가는 말로 꺼낸 줄 알았다. 그는 방학이 반쯤 지났을 때 다시 물으며 내가 자란 동네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주일이 지나 엽은 내게 전화를 걸어와 내일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때 온다고 했잖아.
터미널 대합실 의자에 앉은 엽은 학교에서 보던 가방을 메고 있었다. 교복을 입지 않은 모습은 오랜만인데다 그사이 더벅머리가 되어 있어 어색했다. 피부도 까맣게 그을려 아버지를 도와 무슨 일을 한 건가 싶었다.
넌 좀 살이 빠졌네.
엽은 천천히 터미널 내부를 둘러보다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낯설어하는 낌새를 미리 알아차린 것처럼. 그런 어색함과 공백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엽은 항상 그런 식으로 나보다 나를 먼저 파악했다.
나는 그보다 앞장서서 걸었다. 엽은 도시에서만 자라서인지 시골 마을의 모든 걸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물이 깨끗하다, 저 새는 너무 크네, 산 정상까지 올라가봤어?, 그때 말한 목욕탕이 저기구나. 엽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고 듣기에 좋았다. 햇빛을 피할 겸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느릅나무 아래로 갔다. 부채를 들고 더위를 쫓는 할머니들에게 엽을 소개했다.
이런 시골에 뭐 볼 게 있다고 멀리 왔을까.
얘가 있어서요.
집으로 가는 골목에서 동네 친구들과 마주쳤다. 골목이 좁아 어느 한쪽이 길을 비켜야 했고, 엽은 재빨리 벽에 붙었다. 그들에게는 엽을 소개하지 않았다. 엽은 벽에 쓰인 낙서를 하나하나 읽으며 재밌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골목을 빠져나가기 직전 뒤돌아봤다. 내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엄마는 대문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엽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는 읍내에 일이 있어 밤에 들어올 예정이었고, 출발하기 전 엽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마당을 둘러보던 엽은 텃밭에 자란 해바라기를 만지거나 대파 냄새를 맡았다. 목줄을 풀어놓은 개가 집 뒤에서 불쑥 나타나자 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꼬리를 흔들며 엽의 얼굴을 핥았다. 엽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개를 안았다. 옷에 흙과 털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 이름이 뭐예요?
글쎄, 애아빠가 데려왔는데. 나도 이름을 못 들었네.
없어, 이름. 하나 지어주고 가.
내가 말하자 엄마와 엽은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잠깐 나간 사이 우리는 방에서 각자의 근황을 얘기했다. 엽은 방구석에 대충 가방을 던져놓은 뒤 아버지가 갑자기 출장을 가지 않았다면 여기에 올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누나도 친구들이랑 여행 갔어.
엽의 아버지는 군대에 물자를 납품하는 공장을 운영하는데 설명하자면 너무 길다고 손사래를 쳤다.
사실 나도 시키니까 하는 거지, 뭔지 잘 몰라.
엽은 손바닥을 펴서 굳은살이 박인 부분을 만져보라며 내밀었다. 딱딱한 살갗이 느껴졌다. 엽은 내 손목을 휙 돌리곤 피딱지가 생긴 부위를 매만졌다.
얼른 방학 끝났으면 좋겠다.
그럼 이렇게 놀지도 못할걸.
엽은 천천히 방을 살폈고 벽에 걸린 상장들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백일장?
그거 나가면 학교 결석해도 됐거든. 초등학생 때 받은 거라 뭘 썼는지도 몰라.
과학경진대회는?
고무 동력기. 체공 시간으로 순위 매기는 거.
조용한 줄 알았는데 재주가 많네, 너.
우리는 방에서 나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누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저 방인데 지금 없어. 방학이라 아르바이트.
엽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저녁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흔들렸다. 선풍기가 달그락거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엽과 함께 있을 때에만 느낄 수 있었던 이런 기분. 오랜만이었다. 모든 게 천천히 흘러갔다. 산골짜기를 따라 급히 흘러내리던 땅거미도, 밤이 오기 전 서둘러 자리를 잡던 낮달도. 이윽고 대문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검은 봉지를 내게 건넸다. 안을 보자 털을 벗긴 닭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엽이 인사하자 악수를 청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개를 찾았다. 사료 통을 열자 어디선가 꼬리를 내리고 다가왔다. 아버지는 개를 쓰다듬었다. 엽은 물었다.
왜 이름이 없어요?
정붙이기 싫어서.
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는 ‘보은환경’이라 적힌 조끼를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옷 군데군데 오물이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벗은 옷들을 모아 세탁기에 넣었다. 세제를 잔뜩 넣어도 냄새가 잘 빠지지 않을 걸 알지만 한껏 쏟아부었다. 아버지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집에 온 엄마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부모님은 엽에게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았다. 다만 도시에 있는 친구를 데려온 건 처음이다, 얘가 잘 적응한 것 같아서 고맙다 등의 말들을 꺼냈다. 엄마는 엽에게 집 전화번호를 물었고 식사 도중 거실로 나가 엽의 엄마와 통화했다.
다음날 오토바이에 짐을 실었다. 한 대에는 삼겹살과 라면, 수박을 싣고, 다른 한 대에는 돗자리와 마실 것들을 실었다. 나는 엄마 오토바이에 탔고, 엽은 아버지 오토바이에 탔다. 뒷산에 자리한 계곡엔 언제부턴가 발길을 끊었다. 대신 읍내로 나가는 길목의 계곡으로 향했다. 오토바이를 처음 타는 엽은 상기된 표정으로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아버지는 창고에 있던 헬멧을 가져와 엽의 머리에 직접 씌웠다. 엄마와 나는 헬멧을 쓰지 않았다. 계곡에 도착하자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돗자리를 펴고 짐을 올려둔 뒤 옷을 벗었다. 엽은 바위에 올라가 물속으로 다이빙을 하거나 깊게 잠수했다.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둘이 형제 같대.
다른 가족에게 가위를 빌려온 엄마가 말했다. 우리는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을 닦은 뒤 계곡물 한구석에 수박을 넣었다. 어느덧 아버지도 물에 들어가 수영했다. 엽은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물에 들어가자고 이끌었다. 몸에 쌓인 열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후 내내 계곡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근무가 없는 날 나와 엽을 운동장으로 불렀다. 오토바이 운전을 알려준다며 차례로 요령을 설명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는데 엽은 아버지가 알려주는 대로 곧잘 오토바이를 몰았다. 엽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운동장을 세 바퀴 도는 동안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엽을 지켜봤다. 엽은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세우곤 아버지를 향해 트럭을 모는 일보다 더 재밌다고 말했다. 나는 금세 넘어졌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났다. 오토바이가 쓰러지면서 엔진 가드에 금이 갔다. 엽은 헐레벌떡 뛰어왔고 아버지는 다시 핸들을 잡으라고 말했다. 나는 얼마 못 가 다시 휘청거렸다. 더이상은 무리일 것 같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답했다.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아버지의 단호함을 나는 늘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가 바란 대로 끝을 봐야만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엽은 그저 조용히 상황을 관망했다. 그때 운동장 입구에서 엄마가 다가왔다. 엄마는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왜 이런 위험한 일을 애한테 시키는지 따졌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이 침묵이 흘러갈 방향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엽이 지금 이 자리에서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장 흙바닥이 아지랑이로 일렁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언성을 높였고, 나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가만히 서 있었다. 엽은 금방이라도 둘을 말릴 것처럼 주춤거리다 서서히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엄마는 오토바이를 넘어뜨렸고 아버지는 분을 참지 못해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을 중단시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엽과 함께 운동장에서 달아났다. 우리는 말없이 하천으로 가서 물살을 바라봤다. 엽은 우리 부모님도 그래, 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7
준의 본가에 가기 전 편의점에 들렀다. 준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했지만 친구네 집 가듯이 갈 수는 없었기에 급한 대로 과일주스 한 상자를 샀다. 문자로 알려준 아파트 동을 찾아가는데 입구에 준이 서 있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식당에 간대.
곧 준의 부모님이 나왔다. 나는 미리 준비한 과일주스 상자를 건네려다가 생각해보니 집에 갈 게 아니라면 내가 들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준의 어머니는 잘 마시겠다고 말하며 식당까지 앞장섰다. 도착한 곳은 한우를 파는 식당이었다.
언젠가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꼭 긴 셔츠를 입으라고 준은 말한 적이 있다. 팔의 문신을 보면 아버지가 싫어할 거라고. 고깃집이면 진짜 힘들겠다, 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나는 다행히 손등을 덮는 긴 셔츠를 입고 있었다. 과일주스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대화를 경청했다. 말을 걸어주길 바랐지만 타인은 알 수 없는 가족 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는 잘 보이고 싶었다. 주문한 고기가 나오자마자 서둘러 집게를 들었다. 준의 아버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잘 구워.
준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며 말렸다. 머쓱한 듯 헛기침을 한 그는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등에 땀줄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계속 고기를 구웠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본 어머님이 옷을 좀 걷으라고 했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아버지는 말없이 소주잔이 비워지면 채웠다. 식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혼자 분주했다. 자리를 정리할 때까지 준의 부모님은 이상할 만큼 그 어떤 질문도 건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런 생각을 내비치자 준은,
부담 주는 걸 워낙 싫어하셔.
라고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 서둘러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요즘 들어 말수가 부쩍 줄어든 준은 눕자마자 등을 돌린 채 휴대폰을 봤다. 예전엔 잠들기 전 대화를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잠들었었다.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면 부모님을 보여주지 않았겠지. 나는 매번 이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가 이상 없다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단서를 찾으려 했다. 매일 함께 지내도 준의 마음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반대로 나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좋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적응한 지금이 가장 안정적인 시기가 아닐까, 그래서 말수가 줄어든 거겠지, 이렇게 시간이 흘러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준과 만난 지 사 개월이 지났을 무렵, 준은 결혼을 하자고 말했다. 나는 갑작스럽기도 하고 준비된 것이 없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혼 상대로 두고 봐야 한다거나 어떤 사람인지 더 알아가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진 돈이 없었다. 대학 강사로 수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책방에서 이틀씩 일하는 수입으로 결혼을 결정하기엔 무리였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은 월세가 높고 보증금이 적어 목돈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정들을 설명하며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오래 일한 준은 차곡차곡 저축을 해온 반면, 몇 권의 책을 출간한 뒤 프리랜서로 살아온 나는 그 흔한 신용카드도 한 장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준은 상황을 이해했지만 내심 서운해했다. 준은 그런 현실적인 조건들은 핑계고 사실은 자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속상했다. 마침 이런저런 원고료가 순차적으로 들어와서 준이 평소 갖고 싶어하던 반지를 사줬다. 백화점 명품관에 처음 가봤다. 나는 그 반지를 먼 훗날에 대한 담보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힘들지만 그때 꼭 하자고, 그때를 위해 열심히 살아서 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실제로 그때부터 일이 많아져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돈 때문이라고.
군대에 가기 전까지 누나와 한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누나를 데리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누나는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 하루에 두 군데를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낮에는 아웃렛에서 화장품을 팔고 밤에는 술집에서 서빙했다. 누나는 빚에 대해 내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를 했고 수입의 일정 부분을 엄마에게 줬다. 누나가 그 몫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언가라고 생각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됐다. 아마도 빚의 상당 부분은 대학 등록금이었을 텐데 그런 상황을 내게 알려서 부담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누나는 내가 남들처럼 스무 살이 되면 즐겨야 할 것들을 가정 형편 때문에 즐기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지 못했고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쉬는 날에도 단기 알바를 했다.
누나 친구의 전화를 받고 간 술집에서 누나는 바닥에 토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셨냐고 물으니 돈 때문이라고 답했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이제 막 성인이 된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몸을 가누지 못해 어깨동무를 하고 겨우 집에 데려갔다. 누나는 취한 와중에도 친구더러 계산을 부탁했고, 누나의 친구는 술값을 계산하며 누나더러 돈독이 심하게 올랐다고 말했다.
내가 군대에 간 사이, 누나는 빚을 다 갚은 뒤 독립했다. 대학 전공을 살려 강원도에 있는 회사 구내 식당의 영양사로 근무했다. 그때부터 집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고 연락도 닿기 어려웠다. 나는 누나가 수학여행으로도 가본 적 없는 강원도를 첫 근무지로 선택한 이유는 집에서 최대한 먼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기를 바랐다. 아주 멀리 가기를. 누나만의 인생이 시작되기를. 그래서 누나의 결혼 소식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누나는 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상견례가 끝나고 며칠 뒤, 나만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고, 누나와 가족이 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누나의 애인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외제차를 몰고 터미널로 나를 데리러 왔다. 뒷좌석에 앉아 운전대에 새겨진 BMW 로고를 보고 있는데, 그는 대뜸 내게 운전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아직 면허도 따지 않았다고 답했다.
서울은 차 끌고 다니기 힘들잖아요. 저도 예전에 잠깐 살았거든요.
그가 서울에서 파견직으로 일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누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 정미 알지? 걔도 네 책 읽었대.
어떻게?
도서관 사서야. 어제 연락 와서 말하더라.
자신의 친구를 나도 당연히 알 거라는 화법이 꼭 엄마와 비슷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정미 누나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아이는 몇 살인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