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애인의 집은 신축 빌라가 줄지어 들어선 도심 변두리에 있었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거나 입주민을 기다리는 빌라들도 보였다. 그는 차에서 내리며 아이를 출산하면 아파트로 이사할 예정이라 말했다. 상견례에서 봤던 아이는 곧 유치원에서 돌아올 거라고 덧붙였다.
그 집은 한 아이를 키우고 다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 어떤 취향이 반영됐거나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하고 안락한 공간이었다. 그저 가족의 생활을 위한 집. 부딪힘 방지용 고무가 붙어 있는 식탁 모서리, 문지방이 없는 바닥 등 작은 것들까지 신경쓴 인테리어에 한동안 시선이 갔다. 우리는 배달 음식을 차례로 시키며 오래 대화했다.
누나의 애인은 누나가 오래전 다녔던 회사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던 직원이었고, 누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지병이 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누나가 배식을 할 때면 반찬을 두세 번씩이나 받아갔다. 누나는 그저 식성이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때 오 킬로그램이나 쪘어요, 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누나는 뒤로 넘어갈 듯 웃었다. 영양사님은 언제 밥 먹어요? 그가 묻자 누나는 배식 시간 끝나면요, 라고 말했고, 그럼 언제 밖에서 밥 먹을래요? 하고 그는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땐 결혼할 줄 몰랐지.
누나는 너무 웃은 탓에 배가 아픈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견례 때 봤던 것보다 배가 더 불러 있었다. 곧 아이가 도착할 시간이라며 그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나는 과일을 씻고 껍질을 깎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
누나는 포크를 꺼내 과일을 집어먹었다.
너는?
뭐?
결혼.
준비하고 있어.
준비한다고 결혼하는 거 아니다. 그냥 모를 때 해.
뭘 몰라야 돼?
그건 나도 몰라.
누나는 애매하게 말을 흐리곤 거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자 곧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웃으며 들어오다가 나를 보곤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가 낯을 좀 가린다는 말과 함께 누나는 진수야, 부르며 아이를 안았다. 진수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누나 품에 안겼다.
곧 동생 생기니까 좋지?
그는 아이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밤늦게까지 자리가 이어졌고, 자고 내일 가라는 누나의 말을 거절한 뒤 심야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잠이 들려는 찰나 준에게 연락이 왔다.
이 집 어때?
링크를 열어보니 방 세 칸짜리 전세 매물이 화면에 떴다. 준은 간혹 부동산 앱에서 찾은 집을 내게 보냈다. 다른 승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밝기를 최대한 낮췄다. 집 좋다, 살기 좋아 보여, 방 하나를 드레스 룸으로 하고 다른 방은 서재로 꾸미자, 매번 그랬던 것처럼 기약 없고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한 달 뒤에 입주할 수 있다는 안내 사항이 적혀 있었지만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현실.
현실적인 것.
나는 오로지 현실적인 것들만 생각했다.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고 건강을 살피자, 분리수거를 잘하고 가끔 여행을 가자.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한 전제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의 나이만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간과한 것은 바로 준의 마음이었다.
8
엽과 함께 하천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날이 어둑해질수록 물이 검게 변해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무릎께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수심이 얕아지면 곧 장마가 시작되는 거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엽은 돌멩이를 들어 물수제비를 떴다. 돌멩이는 나를 지나쳐 꽤 멀리 날아갔다. 하천 위 다리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놀자.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동네 친구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리로 올라가 엽을 소개했다. 친구들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줬다. 소주 대꼬리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 뱀술을 담그고 남은 걸 가져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적 드문 잔디밭으로 갔다. 나무 아래에 앉아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셨다. 병 주둥이가 점점 뜨거워졌다. 배가 부글거렸다. 네 명이 마셔 금세 양이 줄었고 머리가 조금씩 아파왔다. 엽과 친구들은 어떤 대화를 오래 나누고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잔디밭에서 꽤 멀리까지 걸어가 다시 돌아가는데 욕설과 함께 고성이 들렸다. 엽이 바닥에 누워 있었고 한 명이 그 위에 올라타 뺨을 툭툭 치는 중이었다. 다른 한 명은 엽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 엽 위에 올라탄 애를 걷어찼다. 엽은 재빨리 일어나 친구들을 차례대로 죽일 듯이 팼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멀리서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노인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엽의 팔을 잡아 끌고 잔디밭을 벗어났다. 우리는 계속 달렸고, 달리면서 엽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잔디밭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뛰어간 뒤에야 달리기를 멈췄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서로를 쳐다봤다. 나는 엽에게 왜 싸우게 됐는지 묻지 않았다. 사실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다리에서 엽을 내려다볼 때부터, 아니 엽이 이곳에 온 날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엽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줬다. 엽은 내 손을 잡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흥분과 더위를 가라앉히며 집을 향해 걸었다.
대문 앞에 누나가 서 있었다. 누나는 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둘이 싸웠어?
저희끼린 안 싸워요.
엽이 대답했다. 단발이었던 누나의 머리가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자를 시간이 없어.
누나는 말했다. 누나에게 엽을 소개했고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오토바이 두 대가 마당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술냄새 나니까 오늘은 다락방에서 자.
누나는 현관문을 닫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엽은 손바닥에 입김을 후 불어 냄새를 맡았다. 내게도 숨을 뱉어보라고 한 뒤 입 가까이 코를 갖다댔다. 마당 한편에 설치된 수도꼭지로 가 오래 물을 마셨다. 엽과 번갈아 수도꼭지에 얼굴을 댔다. 개집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개가 낑낑거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멈출 수 없었다. 아랫배가 아팠다. 엽도 나를 따라 함께 웃었다. 우리는 상의를 벗고 호스를 든 뒤 서로의 등에 번갈아 물을 뿌렸다. 엽은 등목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이 시절을 생각할 때 어째서인지 그날 밤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했다. 엽의 얼굴에 마르지 않은 채 묻어 있던 피딱지와 수도꼭지에서 세차게 흘러나오던 물줄기, 담 너머 하천을 향해 흘러가던 물소리와 새벽까지 웅성거리던 풀벌레 소리. 무더운 여름이 끝나가던 시기라 밤공기는 싸늘했고, 다락방으로 가 그곳에 있던 박스들을 랜턴 빛으로 하나하나 비춰가며 열었다. 해가 뜰 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새벽. 다락방은 아버지가 쓰레기를 수거하다가 주워온 잡동사니들이 쌓여 마치 작은 상점 같았다. 타자기와 트럼펫, 무늬가 화려한 망토, 표면이 부드러운 피아노 건반 덮개, 표지가 해어진 족보까지. 일층에서 잠든 가족이 깰까 우리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의 눈빛과 표정만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말은 거추장스러웠다. 말보다 가깝게 뭔가를 연결 지을 만한 사물들이 거기 있었다. 먼저 곯아떨어진 엽은 나지막이 코를 골았다. 나 역시 잠에 들 무렵, 개장수가 트럭을 몰고 마을을 돌면서 외치는 확성기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누나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할 얘기가 많았는지 하루종일 붙어 있었다. 누나가 오기 전 운동장에서 부모님이 싸운 얘기는 전하지 않았다. 엄마는 누나의 긴 머리를 매만졌다. 둘은 이른 아침 함께 방앗간으로 가서 미숫가루를 받아왔다. 엽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나 혼자 얼음이 띄워진 미숫가루를 마셨다.
친구는 언제 가?
누나는 국자로 내 컵에 미숫가루를 더 따라주며 물었다. 엽은 돌아갈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다락방에서 내려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대학에 잘 적응한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쇼핑을 한 일, 동아리 MT로 춘천에 다녀온 일에 대해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에서 퀵실버 셔츠를 꺼내 나를 입혔다.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인 마츠모토 준이 입는 스타일이라며 일본 패션지에서 유행이라고 했다.
요즘 다 이렇게 입는대. 수학여행 갈 때 입어.
엄마가 자기 옷은 없는지 묻자 누나는 다음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사준다고 답했다.
아빠 옷도 같이 사줄게.
엄마는 듣기 싫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천장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엽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얼마 뒤 반쯤 열린 거실 창문 너머로 엽이 나타나 누나를 향해 인사했다. 엽은 곧바로 거실로 들어오지 않고 마당을 걸었다. 누나는 수건과 셔츠를 개켰다. 별안간 문이 열리고 엽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없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없어, 개.
설마.
개 사요, 하는 소리 아침에 들었어. 그래서 확인하려고 봤는데 없어.
9
학교 그만둘까.
커피를 숟가락으로 휘휘 젓던 준은 카페 입구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옆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인 것 같아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쳐다봤다. 그 말을 하기 몇 주 전부터 담임 업무가 힘겹다고 말해왔었다.
준은 인생의 큰 굴곡이랄 게 없이 평평하고 순탄한 과정을 거쳐 직업을 가졌다. 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때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고 제때 취직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것들을 바라지 않았으며 주어진 것을 누렸다. 준은 그런 자신의 인생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일하며 보람찼던 경험에 대해 말해준 적도 있었다.
자꾸 끌려다니는 것 같아.
부모님은 필요하면 다음 직장에 가기 전까지 생활비도 지원해준다고 했지만 준은 한사코 거절했다. 저축한 돈과 퇴직금까지 합하면 꽤 긴 시간 무직으로 지내도 될 만한 액수가 있다고.
돈이 문제가 아니야.
준이 돈을 벌지 않으면 내가 벌면 되는 문제다. 하지만 돈 문제가 아니라는 준의 고민 앞에서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사는 건 싫어.
준이 원하는 건 변화였다.
안정되고 평온한 하루하루가 아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변화.
한번 결정한 일을 무르는 일이 없는 준은 몇 달 뒤에 학교를 그만뒀다. 퇴사를 앞둔 다른 사람들처럼, 출퇴근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계획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준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말수가 더 줄었다. 내가 강의를 하지 않는 방학 중에 함께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혼자라도 오래 다녀오라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똑같은 한 마디였다.
번거로워.
번거롭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원고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메일을 쓰는 일은 번거롭다, 읽기 싫은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번거롭다 따위로 대입해봐도 잘 붙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만큼 복잡한 마음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했다. 준은 별다른 취미랄 게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취미를 가져보는 건 어떨지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나는 그저 준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부터 연애의 영점이 조금씩 어긋났던 것 같다. 준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혼자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표현했다. 매사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준에게 말했다.
그때 말한 여행, 같이 갈까?
여행?
가족이랑 간다고 했던 거.
이미 지났지.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서울역 갈래?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던 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집에서 막 저녁을 먹은 뒤였다. 서울역에서 출발 시각이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어디든 가자고 말했다. 준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오랜만이라 좋았다. 배낭에 짐을 빠르게 넣은 뒤 택시를 불렀다.
우리는 서울역에 도착해 전광판을 살펴보며 당장 출발할 수 있는 행선지를 찾았다. 준이 어떤 일에 의욕과 관심을 갖는 것이 간만이었다. 강원도 원주행 기차가 삼십 분 뒤 출발할 예정이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간식과 물을 샀다. 준은 나보다 앞서 걸으며 탑승 플랫폼을 찾았다. 나는 원주에 가본 적이 없었고 준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에 올라탄 준은 좌석에 앉아 원주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차창 너머로 서울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 사이로 준의 얼굴이 창문에 비쳤다가 옅어지길 반복했다. 원주역과 가까운 숙소를 예약한 뒤 우리는 한참을 떠들었다.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시하고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나눴다. 웃고, 대답하고, 질문하는, 그렇게 어딘가로 흘러가는 대화를.
원주역에 도착하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준은 추운지 팔짱을 꼈고 우리는 곧장 역 근처 식당으로 가 밥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늦은 새벽까지, 우리는 길고 오랜 시간 서로를 안았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서로의 몸에 기대 잠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서 어딘가에 도착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내내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는 뮤지엄 산으로 향했다. 셔틀버스가 출발하는 건물 앞에서 준은 연애를 막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시회 가면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물어봤던 거 기억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생각 안 하려고 간다고 네가 말했잖아. 나는 그 말이 좋더라.
그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승객 대부분은 스키장으로 향하는 리조트에서 내려 막상 뮤지엄 산에 가는 사람들은 적었다. 전시관에서 그림과 사진을 관람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속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과 관계가 반복될 것을 알고 있었다. 가보지 않아도, 겪어보지 않아도 예감됐다. 건물 중간중간 수공간을 마주칠 때마다 준은 한동안 말없이 물을 바라봤다. 그 어떤 순간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셔틀버스가 오기 전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 아이가 내 발치에서 넘어졌고 준이 일어나 아이를 부축했다. 아이의 부모가 달려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준은 악수하듯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다음에도 강원도로 올까?
원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준은 물었다. 준은 미래에 대해, 특히 기약 없는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분명하고 정확한 것들만 말했다.
또 오자.
하지만 우리는 그때 이후로 강원도에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오 무렵, 잠에서 깨어나 천장을 바라보다가 준의 마음이 내게서 서서히 떠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명확한 단서나 뚜렷한 징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옆으로 누운 채 잠든 준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커튼 사이로 실금 같은 햇빛이 새어나와 벽지를 수놓은 날이었고, 그간 지내온 많은 날들처럼 준을 여전히 사랑하는 날이었다.
나의 예감이 어긋나기를, 문득 스쳐가는 막연하고 두서없는 생각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