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준은 평소보다 술에 취해 있었다. 예전 동료인 박 주임 교사도 비슷하게 술을 마신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사진으로만 봤었다. 교장 선생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주말에 산에 올라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서였다. 하산 후 막걸리를 마시다가 어떤 동료 선생이 등산 같은 건 혼자 하라고 술김에 말했다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박 주임 교사였다. 그때부터 준은 그와 친해졌다.
박주임이라고 불러요.
내가 호칭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난감해하자 그가 말했다. 준이 학교에 몸담은 기간보다 두 배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재직중이었다.
나도 딱 너랑 비슷한 시기에 그만두려고 했어.
준은 내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댄 비스듬한 자세로 그에게 물었다.
근데 왜 계속 다녀요?
네가 생각하는 그거.
중학생이랬나.
혼자 키우니까 일해야지.
그는 몇 년 전에 이혼했고 아이와는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나는 강의를 마친 후에는 목이 말라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준보다 더 많이 말했다. 준은 반쯤 감긴 눈으로 술을 더 시켰지만 맥주 세 잔은 모두 내 입으로 들어갔다. 박주임과 준은 이미 하루치의 대화를 다 나눴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오전에 학교에서 인터뷰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고 새로 시작한 소설을 말하려다가 참았다.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박주임은 최근에 언제 싸웠는지 물었다. 그러자 준은 싸울 일도 싸울 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원하는 걸 정확하게 알아야 오래 만날 수 있으니 많이 싸우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에 취기가 올랐다.
반년은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준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뭔가를 셈하고 있었다. 나는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에 탄 박주임은 창문을 내린 채 손을 흔들었다. 준은 택시에 타자마자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결혼 안 하고 싶었대.
누가?
저 언니.
준이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근데 후회는 안 한다고 하니까.
라디오에서는 내일 하루종일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안 돼.
준이 더듬거리며 내 손을 찾았다.
내일 우산 챙겨줄게.
손을 잡으며 말하자 준은 그제야 잠에 들었다.
12
대걸레로 중창단 연습실 바닥을 닦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봤을 때 초록색으로 물든 교정이 그날따라 유독 선명해 보였다. 장마가 끝나서인지 더위가 한풀 꺾인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가는 도시는 한가롭고 무료해서 틈만 나면 옛 생각이 났다. 이맘때면 동네 뒷산에 올라 버섯을 따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버섯도 따고 열매도 따고 이름 모를 풀을 꺾어 휘두르고 다니다가 산 아래에 버렸다. 대걸레를 벽에 기대놓은 채 밖으로 나가 화단을 구경했다. 멀리서 선배들이 다가오며 내 이름을 불렀고 우리는 화단 앞에 나란히 서서 아주 잠깐 시간을 죽였다. 누군가가 연습하기 싫다고 말하자 누군가는 몇 주 뒤에 대회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청주 도심에 있는 교회에서 개최한 중창 대회였다.
떨어질 게 빤해.
중창단 입단을 추천한 기숙사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청주고가 일등 하겠지. 지난 대회에선 대놓고 깔보더라.
단장 선배는 그의 등을 툭 쳤다.
실업계에서 대회에 참가하는 학교는 우리밖에 없어. 걔네보다 역사는 짧지만 내 생각엔 우리가 더 잘해.
선배는 나를 바라봤다.
게다가 1학년도 들어왔고.
중창단은 3학년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겐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대회였다. 2학기에는 진학과 취업으로 방과후 활동이 제한됐다. 대회에서 우승한다 한들 진학이나 취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그들이 졸업 전에 꼭 트로피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내에서 중창단의 존재감은 그저 전교 조례 시간에 운동장 단상에 올라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는 정도였다. 담당 교사는 과거 대학가요제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그러니까 입상은커녕 그저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중창단을 떠맡은 사람이었고, 입단 후 한 달 동안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었다. 연습실은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그래도 대회가 있는 날에는 제일 먼저 대회장에 도착해 도시락과 물통을 나눠주며 응원한다고 했다. 긴장을 많이 하는 탓에 객석에 앉아 두 주먹을 바르르 떠는 선생의 얼굴을 무대에서 바라보는 게 소소한 재미라고 단장 선배는 말했다.
입상하면 피아노도 바꿔준대.
반주 담당 선배가 건반 덮개를 치우며 말했다.
연습실도.
선배들은 한두 마디씩 보태며 입상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였다. 나는 벽에 기대 둔 대걸레를 수돗가로 가져가 빨았다. 운동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엽이 축구를 하다가 수돗가로 뛰어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 뒤 축구복을 벗어 머리를 감고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꼭 물을 뿌리던 엽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방과후 활동을 한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개학 날까지는 열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날 연습은 평소보다 더 오래 진행됐다. 선배들은 노래의 특정 구간에서 입 모양이 서로 다르다며 벽에 걸린 거울을 가져와 한 명씩 모양을 고쳤고, 나는 얼굴을 가까이 보는 게 어색해 교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선배들은 누군가를 혼낸다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기숙사 형만 틱틱거렸는데 말투만 그럴 뿐 악감정이 실려 있진 않았다. 모두가 연습실을 빠져나간 뒤 반주를 담당하는 선배와 둘이 남아 연습했다. 선배는 내게 당분간 오락실 노래방엔 가지 말라고 말했다. 기본기를 익히는 단계에서 노래방에 가면 다시 원래 방식으로 부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배는 교회 청년부에서 반주를 하지만 사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락이었고 일본 밴드 엑스 재팬의 데야마 도시미츠의 창법을 흉내내곤 했다. 언젠가 그가 가져온 시디를 연습실에서 재생했는데 모두 홀린 듯 음악을 들었다. 나중에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시디플레이어를 샀을 때 나는 그에게 제일 먼저 엑스 재팬의 시디를 빌렸다. 라는 곡을 가장 많이 들었다. 선배는 밴드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교내에는 없어서 아쉬운 대로 중창단에 들어왔다고 했다.
기숙사로 돌아가 방문을 열자 현의 운동화가 보였다. 내용물이 터질 듯 가득한 쇼핑백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옆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욕실 바구니가 없는 걸로 봐선 씻으러 간 듯했다. 나는 악보가 든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다시피 놓고 욕실 바구니를 챙겼다. 욕실로 가는 동안 다른 방들을 지나쳤다. 방학이 끝나가서인지 다른 사생들도 여럿 보였다. 머리를 말리던 현은 까맣게 탄 얼굴로 내게 알은체를 했다.
대추 좋아한댔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개학식이 있던 날 처음으로 운동장 단상에 올랐다. 전교생이 도열한 모습을 위에서 바라보니 왠지 긴장감이 들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댔다. 옆에서 노래를 부르던 선배가 나를 슬쩍 보고 웃었다. 1학년 10반 줄 중간쯤에 서 있던 엽은 네가 왜 거기 있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자 반 친구 몇몇이 애국가 잘 들었다며 말을 걸었다. 2학기부터는 번호순이 아닌 학생들의 의사에 따라 짝을 정했는데 엽은 자신의 옆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엽이 가리킨 창가 쪽 의자에 앉아 그날 날짜를 책상 모서리에 적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그는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출석을 부른 뒤 공지사항을 전했다.
일본에서 학생들이 오는데 누가 재워줄래?
학교와 자매결연한 야마나시 현립 고후공고에서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과 교사들로 구성된 방문단이 며칠 뒤 학교에 올 예정이라고 했다. 학교 시설을 견학하고 수업도 참관하는 등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될 것이고, 이번 연도에는 한국 가정생활을 체험할 겸 홈스테이도 계획되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반에 배정된 일본인 학생은 한 명이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그냥 며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면 돼. 자원할 사람? 기숙사생 빼고.
나를 포함한 몇몇 기숙사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엽은 갑자기 서랍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는데.
선생님은 출석부를 보면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했다.
한엽. 조회 끝나면 교무실로.
반 아이들 모두 엽을 쳐다봤고 엽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교무실에 다녀온 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선 의자에 앉아 씩씩거렸다. 앞에 앉아 있던 친구가 뒤로 돌아 무슨 일인지 물었다.
누나가 일어일문학과 다녀.
근데?
그니까, 내 말이. 그거랑 뭔 상관이냐고.
졸지에 일본인 학생을 집으로 데려가야 하는 처지가 된 엽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집에서 반대할 거야.
그러고는 전화를 하고 온다며 교실을 나갔다. 나는 중창단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교과서를 뒤적거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엽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엄마가 환영한다고 전하래.
수업을 마친 뒤 엽과 함께 시내에 갔다. 딱히 할일이 있어서 간 건 아니었고 집이든 기숙사든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여기저기 어슬렁거렸다. 엽이 오락실 노래방에 가자고 했지만 중창단 선배의 말이 떠올라서 거절했다.
맞다. 너 아까 왜 단상에 있었던 거야?
공원 벤치에 앉아 개학 전 중창단에 들어간 일에 대해 말했다.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바람에 금방 공원을 벗어났다. 시내에는 점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의식을 하듯 혹은 무의식을 가장하듯 서로를 스쳐갔다. 엽은 자신이 다녔던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이면 디자인이 별로라며 질색했다. 한복을 개량한 듯한 디자인이었는데 졸업하자마자 버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 네 교복이 눈에 띈 거야.
우리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더 걷다가 배가 고파질 즈음 엽의 집으로 향했다. 엽은 학교에서 통화할 때 엄마가 데려오라고 했다며 나를 집으로 이끌었고 내심 기대했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엽의 가족 모두가 나를 반겨줬다. 엽은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홈스테이를 왜 이리 쉽게 승낙했냐고 물었다. 누나의 일본어 시험이 코앞이니 공부할 겸 같이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엽의 아버지는 말했다.
식탁에 수저 하나, 침대에 베개 하나 더 두면 되잖아.
누나가 말하자 엽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노려봤다. 누나는 일어 회화 책을 펼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전공 바꾸고 싶다더니, 라고 엽이 말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녁이 차려지고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지난여름 엽이 우리 동네에 놀러왔던 일과 방학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며칠 뒤 가쿠란(学蘭)을 입은 고후공고 방문단이 학교에 도착했다.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방문단을 맞이했다. 교실로 돌아가자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으로 배정된 학생을 조회 시간에 소개했다. 야마나시 출생인 와타나베 다이키는 우리와 같은 학년으로 한국어가 유창했다. 한국인인 할머니 덕에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이번 방문에 자원했다고 말을 덧붙였다. 물론 한국인만큼 잘하는 건 아니었기에 간혹 어색하게 문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웃을 때마다 덧니가 보였다. 나는 조회가 시작되기 전 엽의 옆자리를 비워뒀고 다이키는 소개를 마친 뒤 그 자리에 앉았다. 엽은 누나에게 배운 것이 빤한 인사말을 서투른 발음으로 건넸다. 다이키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엽과 악수했다. 나는 그들을 뒷자리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웃었다. 두발 자유인 우리 학교와 다르게 다이키는 머리가 짧았고 등을 의자에 붙이지 않은 채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엽과 다이키는 오후에 박물관 견학이 있어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하교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다가 걸려서 한 시간 내내 복도에 서 있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연습실로 향했다. 선배들이 오기 전 악보를 정리하고 칠판에 ‘D-6’을 적었다. 피아노에 내려앉은 먼지를 터는 동안 연습실에 도착한 기숙사 형은 칠판에 적힌 것을 보고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지웠다.
야, 심장 터지겠다.
형은 지난 대회에서 너무 긴장한 탓에 가사를 틀렸는데 심사위원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장려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가사를 틀리지 않았다면 우수상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우리는 다른 선배들이 오기 전까지 가사를 잘 외우고 있는지 서로 확인했다. 형은 또 틀렸다. 대회에 참여하는 곡은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제목의 가요였다. 중창단에서 자주 부른 레퍼토리가 아닌 처음 부르는 노래였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 연습량을 늘렸다. 왜 이 곡을 골랐는지 묻자 형은,
아무도 안 부르길래.
라고 답했다. 선배들이 하나둘 연습실에 도착했고 그날도 밤늦게까지 연습했다.
다이키는 금방 반 아이들과 친해졌다. 외국인이 교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는데 다이키는 너 나 할 것 없이 먼저 말을 걸며 무리에 섞였다. 엽이 나서지 않아도 모두가 다이키를 챙겼다.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면 다른 반 아이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몇몇이 다이키 앞에 서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나와 싸웠던 엽의 중학교 동창들도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다이키는 해맑았고 항상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교정을 오갔다. 나는 문득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궁금해졌으나 먼저 물어보진 않았다. 그러다 엽이 다이키에게 기숙사를 보여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해 함께 기숙사로 갔다.
사감실에 있던 당직 교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우리 셋을 바라보다가 이내 허락했다.
거기 기숙사랑 뭐 다를 게 있다고.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엽은 얌전히 구경만 하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엽을 좋아했다. 기숙사로 오면서 엽은 귓속말로 다이키랑 할 게 너무 없다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미 학교에 일본인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자주 본 사생들은 대체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는 다이키에게 내 방과 휴게실, 컴퓨터실, 욕실을 차례로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옥상에 데려가자 자기 학교는 옥상 출입이 금지라고 말했다. 우리는 청주 도심의 풍경을 함께 바라봤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너희는 어떤 사이야?
나는 다이키를 바라봤고, 엽은 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