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슬픈 환상꾼

  슬픈 환상꾼

―댄 에이브람스, <탈옥: 사랑의 도주>(2024)

 

 

 

우리를 죽이는 환상

 

지난 이희주의 에세이에 자극을 받아 오랜만에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을 다시 읽고 주제를 사랑과 환상으로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책에서 미시마는 ‘인간 천황’과 ‘환상 천황’을 분리한다. 그가 모시는 것은 일본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상징, 기호로서의 환상 천황이기에 인간 천황이 아름답든 추하든 상관없다. 심지어 이상적인 천황‘상’을 위하여 인간 천황은 부정할 수도 있다. “‘천황을 지키는’ 것과 ‘천황을 죽이는’, 일견 정반대의 입장이 미시마에게서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있었다”(송인선, 「오에 겐자부로 문학의 ‘미시마 유키오’―『손수 내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 『안녕, 나의 책이여!』」, 『일본어문학』 제98권, 2023).

자신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실제 현실은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미시마를 생각하면 나는 그가 인간으로 내려오려는 천황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자신이 올려다볼 수 있게 천상에 머무르라고 조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를 두고 한 전공투 학생이 일갈한다. “미시마 유키오한테 천황은…… 결국 자기 작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사랑 에세이에 웬 일왕 이야기만 하고 있나 짜증이 이는 당신께 ‘천황’에 사랑을 넣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랑은 결국 우리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것은 사랑이 누군가와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내가 머릿속에서 혼자 꾸는 아름답고 자기 암시적인 꿈이기도 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에게 사랑은 상대가 속 썩여서 골치 아픈 것이기도 했지만 내 꾀에 넘어가는 것, 내 환상에 내가 속아 낭패를 겪는 것이기도 했다. 사랑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서로 더 큰 영토를 차지하려 다투는 각축장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로맨틱한 관계만이 아니라 많은 관계가 그랬다. 관계에 투사하는 나의 환상은 거대한데 현실의 관계는 그에 미치지 못하여 기대를 버려야 하나 관계를 버려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나와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며 저울질을 하는 듯 보이는 상대의 기색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기대의 빛이 꺼지고 실망의 불이 들어오는 순간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게 되는 법이니까.

젊은 시절에는 언제나 환상이 압도적으로 이겼던 것 같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환상을 밀어붙여 코앞의 현실을 외면했다. 그럴 때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부닥침이라기보다는 내 안에서 써재끼는 작품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과도한 열정과 기운을 쏟는 사람을 두고 사랑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랑꾼들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면 속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은 때로 그 자신만의 환상이다.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다. 그리고 결국 환상과 현실의 거리가 봉합하지 못할 수준으로 벌어져 나(=환상)를 죽이든 관계(=현실)를 죽이든 결정해야 할 때에 떠오르는 한 남자의 얼굴―미시마 유키오는 현실을 자기 환상의 레벨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했다―, 그것은 사랑꾼이 아니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환상꾼의 허탈한 표정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번 시간에 소개할 작품 <탈옥: 사랑의 도주>(이하, <탈옥>)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다. 때는 바야흐로 2022년, 구치소에서 십칠 년을 일한 베테랑 교도관 비키 화이트(56·여)가 있다. 그리고 살인미수와 다수의 중범죄로 칠십오 년 형을 선고받은 케이시 화이트(38·남)가 있다. 십대 시절부터 감옥을 들락날락한 케이시는 여자친구를 총으로 쏘고 그녀의 개를 죽인 바 있는 신장이 2미터가 넘는 거한이다. 두 사람은 이 년간 교도소에서 교도관과 수감자 신분으로 사랑하다 탈옥과 도주를 시도한다. ※앞으로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나오니 알기를 원하지 않는 분은 창을 닫으시기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최고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어떤 장르든 감옥과 여자가 나오면 일단 틀 뿐 아니라 OTT의 웬만한 범죄 다큐멘터리는 다 본다. <탈옥>에서도 여러 여성 교도관이 등장하여 사랑하는 친구 비키 화이트를 회상한다. 그는 언제나 남을 돌봤던 사람이다. 전 수감자들은 그를 ‘엄마 같은 존재’라고 추켜세운다. 도입부에서 친구 교도관은 비키가 감행한 사랑의 도피 행각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지겨워졌던 게 아닐까요? 늘 착한 여자나 바른 생활 인생에. 한번 막 나가기로 마음먹으니까 통제가 안 된 거죠.” 

‘착한 여자’ 비키 화이트는, 직장에서는 모범적인 교도관으로서 수감자 애인을 ‘교정’하고, 퇴근 후에는 번호가 추적되지 않도록 대포 폰으로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폰 섹스를 비롯한 교류를 한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와인을 한 잔 따르고 카우치에 구겨지듯 앉아 방금까지 노동자로 일한 직장에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어 애인과 밀어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통화가 이 년 동안 천 통이 넘는다. 그때 바뀌는 것은 비단 휴대폰만이 아니다. 비키의 존재 자체가 바뀐다. 직장에서는 모범적인 교정 공무원 비키가, 집에 오면 ‘안쪽이’(수용시설에 수감된 연인을 일컫는 은어)를 옥바라지하고 살갑게 지내는 동료를 흉본다.

어찌 보면 그다지 놀랄 것 없는, 우리 주변에 왕왕 일어나는 상황일 것이다. 내가 매혹을 느꼈던 점은 대체 비키는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둘의 관계는 어떤 환상 위에서 뛰노는가 하는 것이었다. 비키가 케이시와의 관계를 상상할 때 그 속에서 비키 자신은 어떠한 이미지로 등장할까. 비키의 온몸이 세일러문의 변신 리본에 휘감기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눈을 감고 느긋한 마음으로 때로는 흥분하며 감옥의 애인과 통화하는 비키를 상상하면, 그의 감은 눈의 안쪽, 빛이 옅게 투과되는 눈꺼풀 안에서 마치 렘수면 상태에 빠진 것처럼 좌우로 부지런히 굴러가는 눈알이 무엇을 보고 있었을지 궁금하다. 내면의 눈알이 자기 자신을 사랑스레 또록또록 핥아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한데…… (비키를 향한 나의 이러한 상상, 나는 비키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우리가 죽고 못 사는 자기 자신만의 환상이 대체로 그러하듯 비키의 것도 한 발짝만 떨어져 보면 지독히 진부하고 부적절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해할 위험이 농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비키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기 애인을 총으로 쏘고 애인의 개를 죽였으며 도주 과정에서 차를 훔치기 위해 말 그대로 아무나 쐈다. 그리고 경찰 앞에서 자기 머리에 장총 두 개를 갖다대고 자살하겠다고 하다가 유행하는 소다 음료를 얻어먹는 조건으로 너무도 쉽게 자살을 포기한 인물이다. 이것이 비키 화이트가 사랑한 남자인 것이다.

그런 그가 비키에게 어떤 판타지를 갖고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정의하기에 판타지란 현실에서 일어난 적은 없지만 일어나길 바라거나 적어도 한 번쯤은 일어나도 좋겠다 싶어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상상이다. 비키는 부끄러운 듯 “어릴 때부터 스트리퍼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 내가 좀더 예뻤다면 했을 일이야”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특히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유사한 환상으로 호된 흑역사를 겪은 바 있는 사람들은 소파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며 ‘아, 언니…… 그거 안 돼……’ 끌탕하게 되는데……

직장과 집을 오가는 반복된 생활, 교도소에서의 과도한 업무로 인한 번아웃, 애인과 함께하지 못하고 부모와 사는 외로운 삶―부모와 함께 사는 많은 성인 자식이 만족감을 느끼지만 비키는 아니었다. 수치심을 느낄 만큼 보편적인 고통. 무엇보다 인생을 단숨에 화끈하게 끝내버리지도 못하는 자잘한 그러나 죽을 듯 괴로운 고통이, 개막식 테이프를 가위로 끊듯 인위적으로 싹둑 잘라내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가장 끔찍하다. 그럴 때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꿈을 꾼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을 함으로써 그간의 삶을 완전히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비키는 춤을 추며 탈의하는 스트립 댄스라는 직무에 편견이 있어 그것을 하나의 일로서 공평히 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노동에서 노동이 아니라 성에 주로 관심을 가지듯이, 비키도 자유, 일탈, 해방, 쾌락, 매력 같은 잘못된 관념을 덧붙여 그 일을 왜곡하고 한편으로는 모욕한다.

비키는 갑갑한 삶에서 벗어나 일탈하길 꿈꿨고 그 꿈이라는 괄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괄호 안에 불온서적이든 코인 노래방이든 아무거나 집어넣어도 되는데, 마치 미시마가 천황이라는 기호 안에 아무 사람이나 집어넣어도 상관없어한 것처럼 정말 막돼먹은 인간을 넣어버렸고, 하필 그 인간이 신장 205센티미터에 몸무게 135킬로그램의 “촌놈”―케이시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일컫는다―나에게는 (그리고 비키 자신에게도 분명) 장신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연쇄살인범 에드먼드 켐퍼를 떠오르게 했을 범죄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괄호 안에 최악의 선택을 넣을 수도 있으므로 괄호 자체, 환상이라는 것 자체를 교정해야 할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은 환상을 유지시키는 조건에 대해 말하고 싶다. 과연 사랑을 이어주는 수단이 전화가 아니었다면 둘은 계속 연인일 수 있었을까?

 

사랑의 매개체로서 전화는 잔인한 현실을 일깨우기보다는 믿고 싶은 환상을 부풀리는 데 용이한 도구다. 이따금 비키는 <출소 후의 사랑(Love After Lockup)>(최근 출소한 중범죄자들과 그들의 연인들의 삶을 기록한 리얼리티 TV 시리즈)의 파탄 난 연인들을 보고 불안해져 케이시에게 하소연하는데 그것은 현실 확인용이 아니라 환상 유지용으로 나는 그런 ‘개새끼들’하고는 다르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다. 재밌는 점은 <출소 후의 사랑>에서 출소 전에는 간절했던 사랑이 대부분 재범과 배신으로 깨진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때 사랑의 조건은 수감, 즉 분리다. 분리가 해제되었기에 사랑이 깨진다. 흔히 ‘롱디’라 불리는 원거리 연애가 관계를 망가뜨린다고 하지만 어떤 관계는 서로의 구취를 맡을 만큼 가까워지면 오히려 붕괴되며 비키와 케이시의 관계도 그랬다.

두 사람은 도주에 성공하여 열하루를 함께 사는데 그 보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비키의 환상은 산산조각난다. 비키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을망정 성격은 완전 (MBTI의) ‘J’여서 도주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단둘이 “깊은 숲속에 숨어 300미터 이내로 들어오는 인간은 누구든 총으로 갈기며” 살아가기 위해 캠핑 용품과 총기를 구입하면서도 추적되지 않도록 한 번에 지르지 않고 이 년에 걸쳐 장 볼 때마다 사 모으고 가짜 신분증까지 구했다. 반면에 케이시는 ‘P’라고 부르기에는 ‘P’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다니는 이들에게 실례가 될 만큼 성격의 차원이 아니라 병리의 수준으로 무계획하고 충동적이다.

둘의 범행은 비키의 꼼꼼한 파트와 케이시의 엉망진창 파트로 확연히 나뉜다. 내가 제일 황당했던 것은 케이시가 도주 차량을 눈에 띄지 않게 어두운색으로 칠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이다. 주황색 픽업트럭의 끄트머리에만 카키색 스프레이를 조금 뿌렸을 뿐이다. 비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비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랑이 케이시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고 어차피 그는 칠십오 년 형을 받았기에 중간에 콧바람을 쐬러 나가 헤로인이나 실컷 하고 올 기회 정도로 여겼을지 모른다. 비키는 ‘당신은 뭐 하나 끝까지 제대로 하는 법이 없어!’ 잔소리하는 생활의 영역으로 순식간에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숨어 지내던 모텔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차에 탔다가 경찰에게 쫓기고, 결국 잡히기 직전에 비키는 권총 자살한다. 비키의 마지막 말은 “(그러게) 좆같은 모텔에 남아 있어야 했다고!”였다.

그러게 좆같은 모텔에 남아 있었어야 해. 거창함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실용적인 후회. ‘후회하지 않아’도, ‘그래도 사랑해’도, ‘아, 인생이란’도 아니고, 게다가 모텔에 남아 있었다 한들 남은 선택지라 봐야 감옥에서 전직 교도관으로서 동료 재소자들에게 끔찍한 일 당하다 생을 마감하는 것뿐인데 그토록 초라한 말을 남기고 비키는 자기 머리를 쏜다. 주말에 평범한 연인이 차 안에서 “내가 뭐랬어. 차 막힌다고 일찍 나오자고 했잖아” 불평하듯이―그러게 좆같은 모텔에 남아 있었어야지. 내 귀에 그것은 환상이 현실로 푹 꺼지며 내는 바람 빠지는 소리였고 이상하게도 그 환상의 깨어짐이 실패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비키는 죽었고 비키의 선택은 남은 자들이 꼼지락거리는 해석의 손가락에 무방비하게 던져진다. 저마다의 상상과 기대를 담아 비키의 삶을 조몰락거려 각자의 지문을 묻히는데 입장이 두 패로 갈린다. 비키는 케이시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피해자다. 또는, 비키는 연인에게 열하루 동안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자유를 주려고 (본의 아니게) 목숨을 바친 진정한 사랑의 승자다. 실제 비키는 어느 쪽이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고 아마도 양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비키는 케이시에게 심리적으로 완벽히 조종(manipulation)당할 만큼 무력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케이시가 비키를 이용하고 기망한 것도 사실이다.

비키는 헛된 꿈을 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비키가 만든 사랑이라는 작품은 실패작이기만 할까? 남자에 미쳤기 때문에? 성녀/악녀 이분법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물론 살인미수범을 사회에 풀어놓음으로써 자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비키는 자신이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교도관일 때에나 가능한 것인 줄도 모르고. 아니다. 우리가 아는데 비키가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주위에서 아무리 경고의 붉은 깃발(red flag)을 세차게 흔들며 거기서 나오라고, 도망치라고, 네가 처한 현실이 보이지 않느냐고 외쳐도 기어코 잘못된 길로 가버리는 사람들의 말짱한 인식력이라는 것이니까. 그들은 결코 계몽되지 않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나저나 ‘우리’라니. 언제부터 내가 수렁에서 건져지는 사람이 아니라 건지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승자박이요, ‘지팔지꼰(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이니라 하며 경멸하는 것만이 답일까.

나는 환상에도 시행착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올바르지 않고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환상을 고집스레 피워 올려 누구보다 자신이 상처받고 후회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환상의 든든한 뒷배가 되는 예술을 비롯한 문화를 뜯어고쳐야 한다고도 한다. 나 역시 동의하고 그러한 흐름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한 일소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판타지라는 것에는 고약한 성질이 있어 안 된다고 하면 여 보란 듯 범람하기도 한다. 비키를 우리가 경멸하는 ‘남미새’의 선봉장이라고 본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 뼈아프게 후회하는 것이다. 그에게 ‘빻은’ 환상을 교정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만일 비키가 케이시와 도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비키가 무사했을까. 자기 애인을 총으로 쏘고 애인의 개를 죽인 남자와 안전이별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품었던 잘못된 환상의 상흔을 수습하느라 고생할 수 있었을까. 오랜 시간 자기혐오에 빠질 수 있었을까. 그래놓고 또 같은 실수를 저질러 친구들을 경악시킬 수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다종다양한 한심함은 그래도 죽음보다는 다 나은 것들이다.

그러게 모텔에 남아 있었어야지. 뒤이어 에어백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어쩐지 장난 같은 총소리와 함께 울리는 비키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는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모텔이라는 현실과 유리된 둘만의 환상에 머물렀어야 한다는 후회와, 환상을 벗어나버린 상대가 마뜩잖아지며 시작된 지극히 현실적인 불평. 환상에의 유폐와 환상의 붕괴를 동시에 담은 말. 황금비를 찾지 못하고 끝까지 기우뚱한 환상과 현실의 비율. 슬픈 환상꾼은 그 찌걱거리는 시소에 홀로 앉아 사랑이라는 작품을 영원히 미숙하게 조몰락거린다.

 

 

환상이라는 악몽

 

이희주에게 구(舊) 아버지 미시마 유키오가 있다면 나에게는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정신적 아버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용기가 필요할 때면 오에의 에세이집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래, 오에가 시키는 대로 하자!’ 다짐하곤 한다. 그러다 이희주 작가와 『두 심장 꿰매기』 기획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그만  “주제가 사랑이라…… 미시마와 오에로 BL을 쓸 수도 없고……” 같은 경망한 농담까지 던지게 된 것인데……

어찌되었든 내 몫의 글을 준비하며 이희주가 상징적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가닿은 지저분한 사랑의 정체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그리고 미시마의 앞에 호적수로서 오에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선택으로 몰아가는 데에는 많은 요소가 작용할 것이다. 심장을 닦아세우는 강렬한 감정일 수도 있고, 몸을 조용히 이끄는 관성 붙은 습관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일 것이다. 동방박사가 별을 쫓듯 앞에서 어른거리는 형상을 쫓아 사람들은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리곤 한다. 미시마가 자기 배를 가르기 직전에 본 것은 무엇일까. 비키가 케이시의 수갑을 푸는 순간에 홀려 있던 장면은 무엇일까.

어쩌면 미시마는 자기 자신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천황은 기호라 얼굴이 없다. 실제든 환상이든 구체적인 형상만이 우리를 움직인다. 그는 자결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최종의 이미지가 후대의 사람들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것을 꿈꿨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육신은 죽었으나 죽은 육신의 이미지는 영원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극우적 상상력에 끝없이 불을 지피는 바로 그 상황을, 오에는 걱정하고 소설로서 저지하려 했다.

오에의 번역되지 않은 소설 「벼룩의 유령」(1983)에서 아버지인 화자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이요의 악몽을 염려한다(이에 관해서는 앞서 인용한 송인선의 논문을 참고했다). 그 악몽이란 다름 아닌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 장면에서 파생된 이미지다. 이요는 “정말 키가 작은 사람이었어요. 이 정도의 사람이었어요!”라고 바닥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손바닥을 올리는데, 그것을 보고 화자는 ‘키가 작은 사람’이란 단상에 올려둔 미시마의 잘린 머리라는 것을 눈치챈다.(https://tomarigi.hatenablog.jp/entry/2020/03/01/200429) 그리고 아들이 충격적인 악몽과 폭력성에 이끌릴까 염려하며 악몽을 제거하려 애쓴다.

미사마의 소원대로 목숨과 맞바꾼 강렬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정신에 흔적을 남기고 그 여파가 오에의 집안까지 밀고 들어온다. 스스로 궐기의 구심점이 되고자 한 점 이미지로 남은 미시마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오에는 아들의 생생한 꿈을 맞세운다. 그것은 그가 맞붙어 싸우고 해결해야 하는 현실 세계의 곤란함이다. 나는 이것이 이희주가 말하는 ‘지저분해지는 운동화’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대한 환상이 위험해질 때 그것을 막아 세우는 것은 볼품없고 짜증나는 구체적인 일상의 기억이며 사랑은 결국 그것의 축적이지 않을까.

자, 이제 비키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치자. 사악한 남자에게 단단히 미친 비키 언니의 콩깍지를 벗겨보자. 환상이 우리의 눈에 촛농을 떨어뜨려 얇은 막을 씌운다. 그것을 떼어내 오목한 안쪽을 보면 반짝이는 조각이 붙어 있다. 위험하고 거인 같은 남자와 “애팔래치아산맥에 숨어들어가 밀주를 마시고 약초를 캐먹으며” 살아가는 삶,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 삶을 개척하는 자유로운 미국인의 삶, 안녕, 교도관 제복이여! 외롭고 지겨운 일상이여! 그러나 그 곁에 있는 것은 자동차 도색 하나 제대로 안 하는 남자다. 어차피 비키는 환상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숨도 못 쉴 만큼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위대한 환상과 모텔 이불에 묻은 벼룩 피 사이에 존재하고,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역동성 자체이니, 우리는 꿈을 꾸지 않을 수도 현실을 보지 않을 수도 없어 슬픈 사랑-환상꾼.

 

이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