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이별택시에 탄 것도 아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별택시에 탄 것도 아니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덴도 기린, <네가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나가타 가비, <너무 외로워서 레즈비언 업소에 간 리포트>

 

 


미상이 지난 에세이에 대해 회신하며, 미시마에 대해, 또 나(=환상꾼)에 대해 꼼꼼히, 친절히, 무엇보다 재미있게 설명해줘서 완전히 반하고 또 고마웠다. 맞아요, 맞아. 당신은 나를 아는군요? 전혀 다른 서로가 거울처럼 마주본 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심장을 꿰매는 보람 아닐까? 그나저나 내가 미상과 교환 에세이를 쓴다고 했을 때 친구 지효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희주님, 이렇게 잘 쓰는 사람이랑 같이 하는 거 안 무서워요?라고 했고 나는 당연히 존나 무섭죠……라고 했는데 그 일이 생각나네. 근데 무섭다고 안 할 수는 없다. 할일은 해야 한다. 
일단은 내 얘기부터. 지난 회차에 선언한 사랑하는 것에서 괄호를 벗겨 인간으로 보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최애 그룹은 얼마 전 컴백해서 활발히 활동중이다. (에잇. 돌려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엔시티 위시 많관부.) 당연히 즐겁지만, 가끔 애들이 피곤해 보일 때면 음, 솔직히 마음 아프다. 흔한 말로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아도 눈으로 보니 아픈 게 사람 마음이구나, 싶다. 좀 쉬엄쉬엄했으면, 싶다가도 이런 말이 웃기게 보일 거라는 걸 아는 나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다는 연예인 걱정을 하느라 조바심을 내다니!
이 사랑은 좀 이상한 사랑이라, 거리를 잘 두어야만 한다. 사랑이라는 게 이미 객관성과 멀어지는 일임에도 이 사랑에서는 모두가 그럴 것을 요구받는다. 사랑은 나와 상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 사랑은 몸집을 부풀릴 것을 요청받는다. 나와 최애는 힘을 합쳐 이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비슷한 관심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얻어내야 하는 미션을 받는다. 그래야 우리가 서로에게 맺은 오래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더 나은 음악, 더 나은 콘셉트, 더 나은 프로모션은 사랑을 연장시킨다. 그 일은 돈이 들고 소수가 나눠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언제나 더 많은 팬이 필요하다. 혹은 그들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들어줄 ‘대중’이 필요하다. 무대 하나, 방송용 클립 하나, 사진 한 장의 퀄리티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건 이런 외부의 눈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응답 없는 사랑을 바치는 일이 우스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는 애정과 열광이 마땅한 것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팬은 집착하게 된다. 
솔직히 나는 이 단계는 진즉 건너뛰었고 (남들이 뭐라는 게 뭔 상관임? 내가 사랑하는데.) 좋은 음악을 위해 투자하는 심정으로 앨범을 여러 장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긴 한다. (모두가 음원 사이트로 음악을 듣는다는 걸 알지만.) 나야 무리할 정도로는 안 한다. 그래도 때로는 아주 헌신하는 이들도 본다. 거리 두기에 실패하고, 타인의 우스움을 사면서 뛰어드는 사람들. 컴백 한 번에 수백, 수천을 태우는 사람들. 이른바 ‘사랑의 바보’들.

 

긍정적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바보들의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예정되어 있는 결과랄까? 그들은 낮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자기가 고귀해진다고 믿는다. 미련함을 선함으로 착각하고, 권선징악이라는 낡은 티켓이 자신을 천국으로 보내줄 거라고 믿는다. 아니, 자신을 속인다. 가진 것이 오로지 자신밖에 없는. 그래서 자신을 내다 팔 수밖에 없는. 이 답답한 바보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쥐고 혼자 열심히 돌진하다 벽에 꽝 부딪히고 마는데, 한편으로 이건 여성적 특권―적어도 창작물 내에서는 그렇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남성 사랑의 바보는 물리적인 위협을 가할 거 같아 무섭다. 너무 많아 뉴스거리도 안 되는 ‘왜 안 만나줘’ 유의 현실 범죄가 떠오르니 소설로 쓰더라도 웬만큼 잘 쓰지 않는 이상 논쟁거리도 되지 못한 채 묻힐 게 뻔하다. 이언 매큐언의 『이런 사랑』에선 열기구 추락사고 현장에서 만난 주인공에게 운명을 느껴 그의 뒤를 쫓는 남자가 나오긴 하는데, 주인공은 자기를 보호할 언어와 기술을 갖춘 중년 엘리트 남성이고, 상대방은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걸로 파악되니 이러면 작품의 질을 떠나 좀 김이 빠진다. 물론 ‘진짜’ 병자 얘기도 중요하지만, 그건 사회과학서에 좀더 적합한 얘기고, 우리가 정말 다루기 어렵고 다뤄야 하는 건 진단 내릴 수 없는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짜로 미쳤는가? 아닌가? 미쳤다는 말만으로 충분한가? 아닌가? 싶은 인물 말이다.
그런 인물들 중에는 호스구루이(ホス狂い)*가 있고 한때 이들에게 빠져 있었다. 2019년이었다. 당시 나는 도쿄에 거주중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신주쿠에 있는 한국문화원에 책을 빌리러 갈 때면 늘 머리를 공작새의 꼬리깃처럼 꾸민 남자들이 떡하니 박혀 있는 홍보 트럭 옆을 지나쳤다. 이따금 산책 삼아 가부키초를 거쳐 집까지 걸어갈 때면 대학 새내기 때나 유행했던 MCM 백팩에 롤리타 비스무리한 옷을 입은 여자애들을 만났다. 가끔은 뼈만 남은 남자애들이 돌리는 가게 홍보 지라시가 붙은 티슈를 건네받아 유용하게 쓰기도 했는데, 어느 날 「“너무 사랑해서 찔렀다” 황당한 접대부 사랑」이라는 기사(https://www.news1.kr/world/general-world/3786964)가 떴다. 호스트와 호스구루이 사이의 치정극이었다. 피범벅이 된 여자가 태연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현장 사진은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나 역시 ‘왜 안 만나줘’를 몸소 실천한 여자에 깜짝 놀라 한동안 유명 호스구루이의 유튜브 채널을 탐색했다. 그중엔 한가락씩 하는 호스구루이들이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패러디한 아기자기한 로고를 달고 나온 특집기획도 있어, ‘나, 얼마까지 써봤다!’라는 주제로 한 장(백만 엔), 두 장(이백만 엔) 같은 큰 금액을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입이 떡 벌어진 적도 있다. 내가 미는 호스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사회초년생의 일 년 치 봉급이 날아가는 거다. 고작 샴페인 타워 하나에!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일은 여자들에게 엄청난 금전적인 부담을 지게 한다. 평범한 급여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니 아무것도 없는 여자가 팔 건 몸밖에 없겠구나, 하는 계산이 대략적으로 선다. 실제로 많은 호스구루이가 호스티스로 일하기도 하니(상기 기사의 가해 여성도 가부키초의 모던 바에서 근무했다), ‘멀쩡한’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손을 털 법도 하지만, 누군가는 자기를 망치며 끝까지 간다. 왜? 그 남자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기에.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감각. 인정받는다는 감각. 이게 실은 가장 무서운 환상이자, 주박이자, 물 35L, 탄소 20kg, 암모니아 4L, 석회 1.5kg, 기타 등등보다 인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핵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탈옥: 사랑의 도주>의 비키가 친절하고 훌륭한 직원이었던 거, 수감자들에게 엄마 같다는 칭찬을 듣고 몇 번의 ‘우수한 직원’상을 받았다는 미담도 다르게 읽힌다. 그는 그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그를 원한 남자에게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이 ‘필요’에 대한 성찰은 레이디스 코믹에 꽤나 반복되어 나온다. 순정만화 주인공을 웃도는 연령대의 성인 여성―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을 대상으로 한 이 장르에선 더이상 사랑만 중요하게 다뤄지지가 않는다. 충분히 현실의 쓴맛을 본 이 여자들에겐 결혼, 돌봄, 일상, 업무라는 다양한 화두가 놓여 있고, 그걸 대하는 태도엔 무엇보다 절실함이 배어 있다.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느냐에 따라 정말 인생이 바뀌는 기로에 이 여자들은 서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번뜩번뜩 플래시백으로 다가오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극복해야 하는 미션을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를 파고들면 그 뿌리는 누군가의 인정을 갈망하는 일에 있다.
<네가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의 주인공은 속옷 회사 완나나쿨의 재료부에서 근무하는 오가와 교코다. 교코는 일에 대한 의욕도, 센스도 있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고 이따금 기이한 행동을 해서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곤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교코가 이런 인물이 된 데는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한다. 대학 시절 교코는 인기는 많지만 성격이 나쁜 선배 호시나를 짝사랑해, 그의 명령으로 다른 남자와 섹스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호시나는 그와 자면 다른 여자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교코를 심하게 대한다. 상처 입은 교코는 사회인이 된 뒤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용기를 내어 소개팅에도 나가고,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지만, 이 다짐은 본사에서 도쿄지부로 발령받은 호시나와 재회하고 산산조각이 난다. 
시작부터 강간 장면이 등장하니 이 만화 참 만만찮구나, 싶지만 정말 만만찮은 건 주인공 교코다. 교코는 행동이 이상하고 안절부절못한다는 뜻의 속어 ‘교도루’에서 따온 ‘교도코’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그 말 그대로의 인물이다. 일테면 처음 만난 사람이 강단 있어 자신을 바꿔줄 것 같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사귀어달라고 매달리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면 부재중 전화 수십 통을 남기고, 메일 주소를 알려줬더니 트윗처럼 실시간 메일을 보내는 식이다. 내용이라곤 ‘저 같은 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아요’하는 식의 자학뿐이니 솔직히 이 여자를 누가 감당해? 싶다.
교코가 이런 성격이 된 데엔 물론 기질적인 원인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하게 제시되는 힌트는 그가 유년기에 가정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기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코는 밝고 영리한 여동생과 비교당하며 자랐다. 칭찬보다 구박이 익숙했고, 한번은 엄마가 ‘그애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는걸’이라며 뒷얘기를 하는 걸 엿듣기도 한다. 가정에도, 학교에도 있을 곳은 없다. 이런 그가 매달릴 곳은 강간 사주를 하고, 머리카락을 가위로 난도질하고, 새 제품 론칭 쇼에 속옷 차림으로 내보내 망신을 당하게 하는 호시나밖에 없다. 왜냐면 교코를 필요로 하고 ‘그렇다면 나만을 위해서 살아줘’라고 말하는 건 호시나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좀 어두운 설정이다. 실제로 초반부의 전개는 ‘사이다’와도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독자들로 하여금 인내하며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은, 이처럼 엉망진창인 교코가 자기 일을 좋아한다는 설정에서 나온다. 모이라 와이글은 『사랑은 노동』(김현지 옮김, arte, 2024)에서 1970년대 이후 임금 하락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모든 사람이 점점 더 많이 일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일을 사랑하라!’라는 시대의 전언은 ‘워라밸’이 유행 담론이 되고도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용하게 작용한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아닌 능력자로 추앙받는데 우리의 교코도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의 현대 OL(오피스 레이디) 버전인 ‘일하지 않는 자, 사랑하지도 말라’라는 격언을 꽤 괜찮게 수행한다. 회사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호시나에게 휘둘리다가도, 발군의 센스와 열정으로 위기에 처한 프로젝트를 성사시킨다. 그 결과 좋은 동료도 만나고, 호시나가 얽맨 주박에서 벗어나고(나는 이 장면에서 교코가 너무 기특해 눈물을 흘렸다), 일하는 교코의 모습을 좋게 본 인물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현대 여성이 제일 갖고 싶어할 세 가지 보물을 한 손에 넣었으니 참 다정한 마무리다. 뒤로 갈수록 전개가 급박하달까, 얼기설기 맺어진 해피엔딩을 아쉬워하는 독자도 종종 보지만, 나는 이 만화가 어떤 결말이 났든 좋아했을 거고, 좋아한다. 내게 중요한 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작가가 교코에게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거. 오직 그것뿐이라 결말은 어찌되든 상관없다. 만일 교코가 호시나를 떠나 안정형 연인을 얻지 못했어도, 한 번은 제 발로 일어설 시도를 했었다는 거 자체가 위안을 준다. 이게 작가가 인물에게 줄 수 있는 진정한 다정함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동시에 한편으론 좋은 직장과 일에 대한 열망이, 무엇보다 힘들 때 서로를 이끌어줄 동료가 있던 교코와는 다른 상황에 처한 여자들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일이 없는 여자는? 동료가 없는 여자는? 자기를 구할 물적 기반이 충분히 없는 여자는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에세이 만화 <너무 외로워서 레즈비언 업소에 간 리포트>의 저자 나가타 가비는 곰팡이를 뜻하는 일본어 단어 ‘가비’에서 자신의 예명을 따와 붙였다. 이런 단적인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작가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케이크나 술 같은 기호식품은 물론이고, 밥을 먹을 자격도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키가 167cm인데 38kg까지 살이 빠진다. 당연히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그로 인해 노동을 하기 어려워져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고립된다. 
이렇게 자기 파멸적 선택을 반복하며 서른에 가깝게 연애는커녕 타인과의 교류에도 어려움을 느끼던 작가가 제목 그대로 ‘너무 외로워서 레즈비언 업소’를 찾아가 (정확히는 출장을 불러) 섹스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게 된 건, 결국 ‘필요’ 때문이다. 작가는 대학을 한 학기 만에 중퇴한 이후 소속감을 찾아 마트에 취직한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일터는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곳이지, 무조건받아들여지는 곳이 아님을 머잖아 깨닫는다. 결과적으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의사에게 한동안 쉬라는 권고를 받아 부모에게 전하지만, 돌아오는 건 (정직원이 아니었으니) ‘이제까지 놀고 있는 줄 알았다’, 는 대답이다. 이 말을 시작으로 작가는 부모의 인정을 갈구하는 자신, 누군가 나를 쓸모 있다고 여기고, 나를 필요로 해주고, 인정해주고 안아주길 원하는 자신을 자각한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도(?) 레즈비언 업소에서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 그의 품에 안기는 결말로 이끈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비키도, 교코도, 호스구루이들도, 가비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내 자리가 있었으면 하고 외치는 인물들이다. 픽션인 <네가 내 마음에 자리잡았다>의 교코는 모든 걸 얻고 상처를 줬던 엄마와도 화해하게 되지만, 현실의 교코인 나가타 가비는 해피엔딩에 도달하지 못한 채 ‘과정’만 무한 반복한다. 돈을 주고 여자와 몸을 맞대도 마음의 문은 열지 못하고, 가족에게서 벗어나려고 이사를 했다가 다시 본가로 돌아오고, 알코올중독으로 췌장이 망가져 입원하고, 친구의 결혼식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혼자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한 건 드레스를 입는 게 아니라 행복해지는 거였다는 걸 깨닫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아픈 여자가 좌충우돌 살아가는 지리멸렬한 과정이 끝없이 이어진다. 나아지는 건지, 수렁에 빠지는 건지 알 수 없는 과정. 결말 없는 삶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엉망진창의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창작이다. 나가타 가비는 아르바이트에서도 잘리고, 가정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친구도 없이 고독한 생활을 지속하던 중, 처음으로 만화를 통해 인정받고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좋다, 싶을 정도로 이 만화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미국 하비상 수상작이다) 사실은 외부의 인정과 관계없이 작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정말 충분하기도 하다. 그래도 점점 아슬아슬해지는 작품 수위를 보면 픽션을 갖고 별 쓸데없는 논란을 만들기보다 이런 게 진짜 논란거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 하나가 망가지고 있는 게 생중계되는 꼴 아닌가? 이걸 즐겨도 되나?
솔직히 나는 즐기고 있다. 편차는 있을지언정 가비의 만화는 재밌다. 미친 여자 이야기가 지루했던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만 나 역시 미친 여자 이야기를 쓰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하시길 기원한다’는 덕담인지, 하여간 그런 메시지를 받는 입장에선 좀 마음이 복잡해졌다.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 역시 이런 얘기를 반복하는 건 당연히 당면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니, 가비도 나도 더 나은 사랑을 발명할 필요는 있는 거 같다. 그러면서 과거에 우리가 겪은 복잡한 애착 관계를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완전히 손절 치지도 않고. 그저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구나,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다. 그냥 받아들이고 세계적인 인정만큼 중요한 개인의 행복이라는 걸 찾았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고백. 그러니까, 내가 빠순이가 된 건 일종의 인정욕구 때문이었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중심에서 조금 비껴 나가서 뭐랄까, 이 사회의 따개비처럼 살았다. 다만 사랑을 사랑했다. 이것만이 내가 가진 재능이었고,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의 장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 너희는 이런 사랑 모르지? 그건 일종의 우월감이었고 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걸로 글도 쓰고, 돈도 벌고, 심지어 상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은 진짜 좋았다. 이 사랑을 일반인에게 쏟아붓는 건 미친 짓인데, 아이돌이 있어서 감사했다. 관계에서 필요한 것들을 셈하지 않고 그냥 저지를 수 있어서. 광기를 사방에 뿌려댈 수 있어서. 아이돌에게 제일 필요한 재능은 춤도, 노래도 아니라 이런 미친 사랑을 받아내는 짓이라고 말했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면서 멈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바랐다. 이 무섭고 이상한 사랑. 누군가에겐 그저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하다고 오인받을 법한 실제 사례들, 요컨대 경찰서에 구금되면서까지 사진을 찍으려는 홈마나 팬사인회를 가려고 사기를 치는 여자나 사시사철 쫓아다니는 스토커-팬의 무서운 마음에 짓눌리지 않고, 잘못된 표현방식이나 심연의 마음 같은 것에서도 아주 깨끗한 웃물 같은 사랑만 받아먹는 능력을 가졌으면 하고 바랐다. 상처를 주면서 상처를 안 받길 바랐다. 왜냐면 난 그 여자들을 너무 알 거 같았으니까. 비키나, 호스구루이나, 나카타 가비처럼 그 여자들 역시 나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쓰고서야 어째서 이 글이 비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레이디스 코믹에 도착했는지 알 거 같다. 광기를 사랑으로, 사랑을 일로 변환한 나는 사무실이 없는 OL이었다. 일(글쓰기)이 있었기에 이 사랑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게 펼쳐진 무수한 선택지―비키가 될래? 교코가 될래? 나카타 가비가 될래? 호스구루이가 될래?―에서 나는 교코의 길을 택했다. 일도, 사랑도 다 잘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상도 받았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젠 이 사랑을 바꾸고 싶다. 동시에 일과 삶의 기반을 바꾸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불안하기도 하다. 친구 지효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희주님, 무섭지 않아요? 이렇게 미친 얘기 써서 이제 인정받았는데 여기서 방향을 바꾸는 게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 가비가 계속해서 더 망가지며, 더 망가진 자신을 에세이 만화로 전시하며 수렁에 빠지는 것도 이런 두려움 때문인지 모른다. 호스트가 돈을 요구하듯, 독자는 미친 여자를 원한다. 그리고 미친 여자인 채로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계속 미친 여자인 채로 남는 수밖에 없다. 이건 그토록 원하던 인정, 자기 자신인 채로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형태와 거리가 멀다는 걸 알아도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인정은 달콤하니까. 어쩌면 목숨을 내던질 만큼. 
자, 결론을 짓자. 2025년의 오피스 없는 레이디인 나는 일도 성공하고, 사랑도 성공해야 하는 미션을 받는다. 절대 평행하지 않고 끝이 조금씩 벌어지는 두 막대기 위에 발 하나씩을 올려두고 주춤주춤 나아가야 한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내가 볼 풍경은 어느 것일까? 나는 정말 레이디스 코믹의 주인공처럼 욕심 끝에 모든 걸 성취할 수 있을까? 독자들에게는 안 미치고도 사랑받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천사들에게는 더러운 엉망진창의 사랑 속에서 맑은 것만 건져 먹는 능력을 요구하는 대신, 내 스스로가 정말 귀하고 깨끗한 것만 줄 수 있을까? 뻔하지 않은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죠 미상씨……
 
비키가 죽고 난 뒤, 케이시는 다큐멘터리 제작진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어요. 비록 정식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비키를 아내라고 지칭한다. 말뿐이고 하나도 구체적이지 않은 이런 사랑, 사기꾼의 말이 고마웠다고 해야 하나? 고마웠다. 비키가 스스로 쏜 머리에서 뇌수와 살점이 튀어 카시트에 묻어버린 것처럼 이 여자가 난사해버린 무언가, 어쩌면 영혼 같은 것이 나에게 철썩하고 달라붙어 봤지? 내가 죽고 난 다음에도 나를 아내라고 부르잖아! 탈옥을 위해 날 사랑한 척한 게 아냐! 우린 진짜 사랑을 했다고! 하며 감동했다. (물론 비키를 아내라고 부르는 건 둘을 21세기의 보니와 클라이드로 보고자 하는 대중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겠지만, 거기까진 생각하고 싶진 않다.) 이 영혼은 하나의 답을 알고 있다. 그 남자, ‘촌놈’ 케이시 외엔 누구도 비키에게 이런 달콤한 환상을 속삭여주지 않았을 거라는 잔혹한 진실을.
인정하자. 이건 어설픈 동정이나 자매애, 퇴근 후에 다 같이 놀러간 성인용품 숍에서의 수다 따위가 해결해줄 영역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나를 ‘특별한 사람’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줄 지독히 편파적인 사람이 필요하다. 이걸 위해 인간은 목숨을 바친다. 고작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줄곧 말하고 싶었던 괴로움, 외로움은 이런 것이었다. 세상엔 이런 여자가 있다는 거. 
이 여자들을 사랑한다.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마치 내 얼굴을 보듯 사랑한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건 이들에게 환상이라는 독을 더 주입해 고통을 빠르게 끝장내는 일이다. 일테면 <탈옥: 사랑의 도주>의 마지막 장면. 두 연인의 꿈이 케이시가 요트를 몰고 비키는 비키니 차림새로 그 요트에 타서 한가롭게 여행하는 것이었단 걸 전하는 친구의 내레이션 뒤로 한 대의 요트가 물살을 가르며 먼바다 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식의 위로인지, 기만을 하는 거. 그게 전부다. ‘미친 여자’는 감당하지 못해도 한 이야기의 결말쯤은 감당해주는 것. 이게 예술의 비겁한 몫이다. 
동시에 살아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은 이야기의 바깥, 우리가 발을 딛고 선 물적 세계에도 있고, 이것도 어떤 방식으로든 다뤄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야기의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 여자들이 행복할 방법을 찾아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항상 유기하고 싶은 이 지긋지긋한, 미련한 여자들의 손을 던져버리지도 놓지도 못해서 어정쩡하게 붙든 채, 미상의 결론이자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손에 쥐고 굴렸던 아주 옳은 답을 두고도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사랑을 얻으려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죠? 미상이 아저씨도 아니고, 이별택시를 탄 것도 아니면서 묻게 되는데……

 

이희주

 

 

 

*호스구루이는 남성 접대부인 호스트(ホスト)에, 광적으로 미쳐 있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 구루이(狂い)를 붙여 만든 신조어로 가부키초 등의 유흥 거리를 배회하며 호스트에게 돈과 애정, 시간을 퍼붓는 여자들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