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주
더이상 입주 간병은 하지 않겠다는 병옥에게 최실장은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앞자리가 오, 라는 뜻이었다. 최실장은 다른 말 없이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돈 버니까 좋겠지, 생각하며 병옥도 마주 웃었다. 오 년 전 전세 사기를 당한 후 병옥은 입주 간병만 고집해왔다. 보증금 없는 고시원이나 모텔을 전전하다가 채용되면 단출한 짐을 싸서 낯선 집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휴가를 받고 싶을 때는 약간의 연기가 필요했다. 딸이 요새 유행한다며 이런 디저트를 사준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를 생각해냈고 모텔이나 찜질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온 후에는 한동안 가족과 헤어져 우울한 척했다. 나이 많은 여자가 오갈 데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환자 가족들이 더는 병옥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요구가 늘었고 뻔뻔해졌다. 죽어가는 노인들조차 병옥이 세상에서 제일 안된 사람인 양 굴었다.
“면접 본대요?”
“경력 십 년 이상 한국인이면 안 본대.”
“할아버지예요?”
“딸이 같이 살아.”
“가족 있어도 이상한 짓 하는 노인들 많아요.”
“그래서 할 거야, 안 할 거야?”
최실장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병옥에게 물었다. 병옥은 최실장이 네가 그런 걸 가릴 처지냐고 묻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내가 그럴 처지는 아니지, 바로 수긍했다. 내일부터? 최실장이 휴대폰으로 병옥에게 주소를 전송하며 다시 물었다. 병옥도 잠시 휴대폰으로 일정을 보는 척하다 알겠다고 답했다.
최실장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지만 바로 며칠 전에 병옥은 다시는 남의 집에 들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남의 집에는 발끝도 들이밀지 않고,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냄새도 맡지 않겠다고. 그날 병옥은 작은 구옥 빌라의 매매 계약금을 치렀다. 입주는 육 개월 후였다. 지어진 지 삼십 년이 넘은 건물이었지만 보일러와 창틀 수리를 마친 집이었다. 별다른 공사 없이 그대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번에 버는 돈으로 집을 꾸미면 좋을 것 같았다. 병옥이 그동안 갖지 못했던, 취향대로. 한국인 간병인을 원하는 것을 보니 오래 일할 사람을 쓰고 싶은 듯했으나 병옥이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병옥은 너무 오랫동안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했다. 집이 없는 몸은 짐이었다. 그동안 병옥은 짐을 부리듯 자신의 몸을 노인들에게 내주었다. 더러운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없었다.
병옥이 천사간병협회 사무실을 나갈 때 문에 매달린 커다란 종이 울렸다. 병옥은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인생 종 친다, 는 말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몇 명의 인생이 종 치기까지 자기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자기 인생은 언제쯤 종 칠지. 그때 과연 어떤 종소리가 들릴지.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는 듯 맑고 고운 소리일지, 이 문의 종소리처럼 네 인생은 별 볼 일 없었다는 듯 쨍하고 경박한 소리일지. 끝은 아직 오지 않았고, 병옥은 계속 살아볼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잘, 오롯이.
마을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오르막길을 한참 더 걸어올라야 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배낭을 멘 등이 땀으로 젖었다.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에는 휴대폰을 든 병옥의 고개가 사방으로 돌아갔다. 휴대폰 지도는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정말 자기의 위치인지 의심쩍었다. 골목골목을 몇 번이나 오르내린 끝에 병옥은 검은 경첩이 박힌 나무 대문 앞에 멈췄다. 담이 높아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패에 새겨진 주소를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숨이 찬 목소리로 천사간병협회, 까지 겨우 말했을 때 쇠사슬이 끊어지듯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격이 급한가, 병옥이 중얼거리며 대문을 밀치고 잡풀이 무성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런 데 살면 사람 써서 관리 좀 하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원이 아니라 정글이 따로 없네. 콘크리트로 된 단층집은 삭막해 보였다. 병옥이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이 열렸다. 헐렁한 원피스에 머리를 대충 틀어올린 젊은 여자가 병옥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을 보고 바로 눈을 내리까는 여자의 태도에 병옥은 친밀감을 느꼈다.
집안은 어두웠고 진한 꽃향기 아래로 배변 냄새가 깔려 있었다. 여자는 병옥을 부엌의 식탁으로 안내하고 물을 한 컵 내어주었다.
“실장님한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십 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지금은 턱관절까지 마비가 오셔서 식사는 위루관을 통해 영양액으로 하세요. 아홉시 열두시 여섯시, 시간 잘 지켜주세요. 전문가라 아시겠지만, 삽관 주위는 항상 소독해야 하고요. 소변 줄은 안 끼고 계신데, 기저귀 무게는 철저히 체크해주세요. 같은 자세로 두 시간 이상 두면 안 되고, 먹는 약은 다 가루약이니 물에 잘 타서 처방대로 주시면 돼요. 약이 많으니까 순서, 용량 헷갈리면 안 되구요. 그리고 집에 재활 운동 기구 있거든요. 그거 태워주시고 날 좋으면 휠체어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시면 좋구요.”
여자는 낮고 단조로운 톤으로 빠르게 말했다. 원래 말이 빠른 사람인지, 아니면 입에 붙을 만큼 오랫동안 반복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옥은 여자의 사무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간혹 형제자매나 자식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부터 쏟는 가족들은 언제나 까다로웠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 사항이 있는데……”
여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병옥은 경험 많은 간병인답게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여자의 말을 기다렸다.
“미각이 죽은 건 아니어서 아버님이 맛을 느끼길 원하세요. 식사를 조금씩 준비해서 입에 넣었다 뱉게 도와드려야 해요.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여자의 말은 여전히 빨랐지만 전과 달리 목소리가 튀었다. 유별나기는 해도 이 정도는 감당할 만했다. 손으로 매일 똥을 빼기도 했는데, 뱉은 음식쯤이야.
“음식은 어떻게 준비해드리면 돼요?”
“재료는 제가 사다놓을 거고, 제 건 물론 안 해주셔도 되고요. 그냥 밥 조금, 반찬 한두 개, 혹시 식도나 기도로 넘어가면 큰일나니 아주 잘게 쪼개서 혀끝에 대고 맛만 보게 해주시면 돼요. 짜고 자극적인 걸로요. 장조림이나 젓갈은 항상 냉장고에 있으니 가끔은 있는 반찬만 주셔도 돼요.”
“말씀은 못하시죠?”
“왼쪽 손은 아직 괜찮으셔서 그 손으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돼요.”
“말이 많으신 편인가요?”
“네?”
“아니, 아버님께서 요구하는 게 많으신 편인가 해서요. 그럼 제가 더 자주 들여다보고 알아차려야 하니까요.”
“당연히 자주 들여다보고 알아차려주셔야죠.”
여자의 말에는 이상한 권위가 있었다. 병옥은 ‘당연히’란 말이 거슬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병옥을 화장실로 데려가 손을 씻게 하고 노인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밖에서는 집이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의 공간으로 보였는데 뒷마당 쪽으로 블록처럼 돌출된 공간에 노인의 방이 있었다. 현관에서는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이었다. 노인의 방이 가까워지자 순식간에 꽃향기는 사라지고 배변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열린 문 너머로 커다란 창과 전동 침대가 보였다.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소리 없이 뉴스 채널이 나오고 있었고 그 옆으로 화장실이 보였다.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 쪽은 보지도 않고 곧장 방안에 있는 또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머리가 면한 벽에 문 모양의 입구가 뚫려 있었다. 그 안은 꽤 널찍했고 한 벽에는 붙박이 옷장이 있었다. 드레스룸을 개조한 공간 같았다. 짙은 녹색 벽지에 베이지색 톤의 침대와 협탁도 갖춰져 있었다. 이런 색 조합도 괜찮네, 병옥은 생각했다. 자신의 낡은 빌라에도 어울릴지 가늠해보며.
“여기 쓰시면 돼요. 자는 동안에도 아버지 소리는 들으셔야 하니까 문은 없앴는데 원하시면 커튼은 달아드릴게요. 아버지 옆에서 자는 게 마음이 편하시다면 보조 침대에서 주무셔도 되고요.”
병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내려놓았다. 축축해진 등에 서늘한 한기가 닿았다. 여자는 안쪽 방 입구에서 병옥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노인의 침대를 무심히 지나쳐 침대 옆에 나란히 놓인 전동 기립기로 병옥을 데려갔다. 기기의 작동 방법을 간단히 소개해준 후에야 여자는 침대로 돌아섰다. 노인은 말랐지만 키가 크고 뼈대가 탄탄해 보였다. 머리와 수염은 잘 손질되어 있었고 눈은 웃고 있었다. 오랜 와상 환자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무력감과 수치심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새로 온 간병인이에요.”
노인은 병옥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병옥은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보였다. 노인이 왼손을 털듯이 살짝 흔들었다. 종이 달랑, 하고 울렸다. 노인의 팔에 작은 종이 달린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좋다고 하시네요.”
종이 한 번이면 예스, 두 번이면 노예요, 여자는 말했다. 아버지가 필요할 때 종을 흔들 텐데, 종소리가 너무 자주 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자는 덧붙였다. 재택근무중이라 집에 있는 것이니 웬만하면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여자는 방을 나갔다.
병옥은 우선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어르신, 기저귀 갈아드려요? 병옥이 묻자 노인의 손이 다시 흔들렸고, 종이 달랑달랑, 두 번 울렸다. 천사간병협회의 경박한 종과 달리 맑고 고운 소리였다. 처음 본 사람한테 엉덩이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겠지. 노인의 방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었고 그 안에 영양액 팩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베타딘과 탈지면, 거즈, 삽입관과 피딩 백, 주사기 등 삽관 관리에 필요한 용품과 기저귀, 약봉지는 침대 옆 오픈형 삼단 서랍에 잘 정리되어 있었고 목 받침이 있는 휠체어가 벽을 향해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병옥은 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혹시 감시카메라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했고,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이제 병옥은 여기 사는 사람이니, 병옥의 편의에 맞게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방에 딸린 화장실의 수납장까지 샅샅이 살핀 후에야 병옥은 약봉지들을 찬찬히 뒤지며 안정제와 수면제를 찾아 따로 골라냈다. 자기에게도, 노인에게도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있도록. 약을 하나씩 꺼내놓다가 병옥은 약봉지에 쓰인 노인의 이름과 출생 연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김무언.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 회장이거나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는 유명 교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옥은 집값이 비싼 동네에 사는 노인들을 간병하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포털 사이트에 프로필이 나온 노인은 두 명이었는데, 하나는 과일 도매상으로 시작해 수입 과일 회사 대표가 된 사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학과 교수였다. 그 교수는 197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약력을 보아 집에 원래 돈이 많은 것 같았다. 둘 다 말도 못하게 고집이 세서 길들이는 데 꽤 힘이 들었었지. 병옥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대강 정리해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으로 김무언과 출생 연도를 함께 넣어 검색했다. 처음 들어보는 소설가의 작고 기사가 몇 건 검색되었다. 병옥은 페이지를 넘기다가 다른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장군의 오른발’이라는 제목의 십 년 전 기사였다.
기사를 다 읽고 침침해진 눈을 몇 번 문지른 병옥은 빈틈없이 맞물린 붙박이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기에 있을까, 그 구두가?
기사에 따르면 무언은 보안사 대공과의 유능한 고문관이었다. 특히 그가 특수 제작했다는 철판 구두가 유명했다. 그는 그 구두로 관절을 마디마디 짓이길 수 있었다. 무릎을 툭 차면, 큰 상처도 나지 않고 연골이 바스러졌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물고문과 전기고문에서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해 고문을 당한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짜 고통’과 ‘가짜 고통’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피해자가 시늉이 아니라 영혼까지 바쳐 애원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차리는 능력―그걸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이 뛰어났다. 기사는 그가 정권 교체 후에도 승진을 거듭하다가 경찰 은퇴 후에는 민간 경비 업체를 운영해 부를 쌓았으며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소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령의 나이에 장애가 있어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됐다. 기사에는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쯧쯧, 그러게 왜 나대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했지만, 병옥은 ‘나대다’라는 말이 자기를 익숙하고 깊숙하게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나대다, 그 말 때문에 병옥은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병원을 그만두고 간병을 시작했다.
병옥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병원은 신도시의 소아과 의원이었다. 신혼부부가 많은 지역인데다 의사가 젊고 친절해서 병원은 늘 바빴다. 처음 몇 달은 잠이 들 때까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쟁쟁 울리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그 소리마저 익숙한 배경음이 되었다. 병옥은 의사가 아이들의 입을 들여다보거나 배를 만질 때 아이들을 잡아주었다. 과연 의사는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반말하는 법 없이, 우리 배 좀 볼까요? 물었고, 병옥이 아이의 옷을 올려주면 귀엽다는 듯이 배에 뽀뽀를 할 때도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병옥이 의사의 친절을 의심하기 시작한 건. 병옥은 의사가 유독 남자아이들에게 다정하게 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아이들을 대할 때와는 미묘한 태도의 차이가 있었다. 손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문다거나, 병옥에게 맡겨도 되는 주사를 자기가 굳이 놓는다거나……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니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고, 엉덩이나 팔뚝을 살짝 쓸어주는 그런 친절까지. 아무도 병옥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정말, 같이 일하던 사람들 말대로, 병옥이 ‘나대는’ 성격이기 때문이었을까?
종이 울렸다. 가볍고 맑고, 단호하게. 병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의 시선이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미묘하게 벗어나 그 옆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있었다. 밥시간은 귀신같이 아시네, 병옥은 생각했다. 창밖으로 그새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뒷마당은 현관 쪽 정원과 달리 시멘트로 덮여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한구석에 빨간 지붕의 개집이 보였다. 말뚝에 줄이 묶여 있는 것을 보니 개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 짖지도 않는 걸로 보아 순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이 더위에 그늘 속에서 혀를 길게 빼물고 있으려나.
병옥은 냉장고에서 영양액 팩을 꺼냈다. 미리 꺼내놔서 미지근하게 만드는 게 좋은데 시간이 촉박했다. 피딩 백에 영양액을 넣고 튜브를 연결한 뒤 튜브 끝까지 액이 흐르도록 해 공기를 뺐다. 가끔 공기를 빼지 않고 삽입하면 위에 공기가 차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이 있었다. 환자들의 배가 개구리처럼 부풀어오르기도 했다. 병옥은 피딩 백을 침대에 연결된 스탠드에 걸어두고 일 분에 이십 방울로 조절했다. 아, 그런데. 병옥은 생각했다. 물고문을 당한 사람은 폐에 공기 대신 물이 찼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을까? 물 마시다 사레만 들려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기침이 나오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병옥은 자신이 또 나댄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똑, 똑, 똑, 똑. 정확히 일 분에 이십 방울이 떨어졌다. 여기서 속도를 조금만 올리면 어떻게 될까? 일 분에 이십오, 삼십, ……오십까지 올리면, 배가 금세 부풀어오를 텐데. 건조하고 약한 피부는 탄성도 없이 물에 불린 당면처럼 물컹해지다 터지게 될까. 노인이 손을 흔들었다. 종이 두 번 울렸다. 병옥은 자기도 모르게 꽉 잡고 있던 조절 줄을 놓았다.
“아버지 저녁 부탁드려요.”
어느새 여자가 방 입구까지 와서 병옥에게 손짓했다. 왜 아까부터 사람을 가축 부르듯 이리 오라 저리 오라 손짓을 하나. 병옥은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부엌으로 갔다. 노인의 방과 집은 완벽히 분리된 세계 같았다.
“새로 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오늘은 있는 반찬으로 준비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뒤 병옥은 냉장고를 열어 소고기장조림과 오징어젓갈을 꺼냈고, 싱크대 주변을 익숙하게 더듬어 칼과 도마를 찾아 잘게 썰었다. 짜고 진한 냄새가 올라왔다.
“오늘 종이 두 번이나 울리던데. 첫날이라 정신없으시겠지만 주의해주세요.”
칼질을 하는 병옥 곁으로 여자가 조용히 다가와 말하고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랐다. 칼 든 사람한테 지적질을 하네, 생각하며 병옥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손을 씻고, 반찬을 담은 종지를 가지고 다시 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반찬 냄새를 맡았는지 노인의 입술이 뻐끔 벌어졌다. 꼭 해감한 조개처럼. 병옥은 노인의 벌린 입속 혀 위에 잘게 찢은 장조림을 먼저 올려주었다. 달게 끓인 간장의 짭조름한 맛이 나겠지. 입안은 백태가 끼고 건조해 냄새가 심했지만 역한 정도는 아니었다. 병옥은 오징어젓갈도 올려주었다. 오징어젓갈은 씹는 맛이 좋을 텐데. 노인은 아쉬운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모르는 척, 이 젓갈 조각 하나를 목구멍 안으로 넘겨주면 어떨까. 노인은 분명 폐가 터질 정도로 기침을 하겠지.
그날 밤 병옥은 문 없는 자신의 방에 누워서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었다. 아무리 낯선 곳이더라도 잠은 잘 자던 병옥은 그날 새벽까지 몸을 뒤척였다. 구둣발로 밟히는 기분은 어떨까. 누군가 나를 알몸으로 벗긴 채 끈으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으면…… 전기의자에 앉히고, 물에 얼굴을 처박으면……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농담을 주고받고, 야구 경기 결과를 이야기하고, 담배를 맛있게 피우면…… 병옥은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동시에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병옥은 생각했다.
이렇게 떳떳하게 살아 있는 노인들 때문에 이 사회가 이토록 망가진 것이 아닌가.
무고한 사람을 끌고 와 개 패듯 패고, 미리 세워둔 자백 시나리오를 주입하고, 성과를 만들어 승진하고, 은퇴해서는 경찰이었던 경력을 이용해 돈을 더 벌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니까 사기꾼들이 남의 집과 돈을 빼앗고도 당당한 게 아닌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은 집주인 노부부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노부부가 공동명의로 소유한 집이었는데, 이혼한 아들 집에 들어가게 되어 세놓은 것이라고 했다. 노부부는 둘 다 은퇴한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연금을 받아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고, 자기들은 남은 생에 하나뿐인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라며, 시세보다 싼 값에 전세를 내주었고 장판과 도배도 새로 해주었다. 병옥은 좋은 집주인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노부부가 아들의 빚을 갚아주느라 모든 자산을 저당잡히게 되리라고는 까맣게 모르고.
노부부는 병옥에게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경매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도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해준다고 했다. 자기들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던 사람들이라 신용도 좋고, 현금화 안 된 다른 자산도 많다고. 아들이 여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잠깐 현금 융통이 어려워져서 그런 것뿐이라고. 알지 않냐고, 요즘 여자들. 조금도 손해보기 싫어하는 약아빠진 여자 하나 때문에 마음 약한 아들이 빚을 지게 된 것뿐이라고. 지금 와 돌이켜보면 믿을 수 없지만, 그때 병옥은 믿었다. 그 말들이 아니라, 맹목적인 노부부의 진심을 믿었다. 자식은 선택할 수 없는 법이니까. 자기는 자식 없는 홀몸이라 다행이라고, 노후에 그런 꼴을 당할 일은 없으리라고 오만하게 안심까지 했었지.
어쩔 수 없이, 병옥은 상상하고 말았다. 그나마 기능하는 노인의 왼손을 지그시 잡아주며 그의 목을 조르는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