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단편] 계속되는 이야기(1)

출국 수속을 모두 마쳤는데도 새벽 4시 57분이다. 비행 출발은 8시쯤이니 너무 일찍 도착한 셈이다. 
제나는 한적한 중앙홀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는다. 종이컵 냄새가 올라오는 뜨거운 커피를 되도록 천천히 마신다. 그녀는 카페인에 약하고, 생각할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았다. 
면세점과 카페테리아로 빙 둘러싸인 이 원형 구역에는 중앙의 작은 분수를 중심으로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하다. 아직 대부분은 비어 있다. 제나는 커피에 설탕 한 봉지를 뜯어 넣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또 한 봉지를 털어 넣는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 전쟁으로 예전만큼은 여행객을 보기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찾아오고 떠난다. 
제나는 아까부터 남자가 쓴 털모자를 알아본 참이다. 이곳 텔아비브나 예루살렘의 시장에 흔한 것들로, 그녀에게도 비슷한 모자가 하나 있다. 50셰켈 정도면 살 수 있는 물건이지만 어떤 이들은 저게 낙타나 양의 털로 만들어졌다고 굳게 믿는다. 
털모자 아래로 흘러나온 남자의 밝은색 머리칼은 기름지다. 그보다 조금 짙은 색인 수염은 손질한 지 오래되었는지 텁수룩하다. 탁자에 대지 않은 쪽 뺨과 눈꺼풀은 부드럽고 매끈해 보여 그가 아주 젊다는 걸 알 수 있다. 스물대여섯쯤 되었을까. 
제나의 눈길은 그의 물 빠지고 낡은 청바지에도 가닿는다. 지난 한두 주간 날씨가 유독 궂었고, 그는 바지보다는 모자 사는 쪽을 택한 것 같다. 
외국인들은 이스라엘에도 겨울이 온다는 걸 종종 잊는다. 몇 년 주기로 이곳에도 나라 전역에 난폭한 겨울 폭풍이 들이닥친다. 알렉사, 후다. 엘피스. 폐쇄된 도로들, 폭설에 갇힌 도시들. 총성은 잠시 멈추지만 또 누군가는 얼어죽는다. 대부분 어떤 이유에서건 길거리에 살게 된 사람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전쟁도 겨울에는 더 나빠진다. 추위 속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저 남자의 가족들도 여행을 말렸을까. 
제나는 핸드폰을 꺼내 재민의 사진을 다시 살핀다. 공항으로 마중나가겠다며, 얼굴을 알아두는 게 나을 것 같다며 며칠 전 재민이 보내온 것이다. 
제나도 이곳으로 온다는 재민을 말렸다. 그래서 제나가 가기로 했다. 이제 스무 시간 뒤쯤이면 두 사람은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족히 수십 번은 들여다본 사진이지만, 제나는 단서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더 꼼꼼하게 본다.
어느 한식당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둥글고 환한 얼굴. 
사진 속 식당은 그녀의 가게다.
출입구 유리문과 벽에는 거의 붉은 색조의 음식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그것들은 세월이 많이 지난 것 같다. 좀 희끄무레하다. 
식당 왼쪽 구석에 주차된 회색 승합차. 뭔가를 싣거나 내리고 있는지 반쯤 열린 차문 안으로, 푸른 야채 다발과 양파 박스, 모빌 장난감으로 보이는 물건이 담긴 쇼핑백이 보인다. 그 옆에는 목욕 바구니도 있다.
재민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웃고 있는데, 양 소매가 젖어 있다. 
32년 전 일이었다. 제나는 연인이었던 한국인 잭슨과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다가 조난했다. 산사태가 두 사람이 걷고 있던 기슭과 그 아래 마을을 덮쳤다. 제나는 이틀 만에 구조되었지만 잭슨은 이후 수색 작업에도 발견되지 못했다. 다들 그가 겨우내 천천히 미끄러지는 얼음 밑에 갇혀 어딘가 깊은 틈으로 빠졌을 거라고 했다. 
재민은 잭슨의 누나로, 처음 제나에게 메일을 보내온 건 석 달 전이었다. 그 메일은 ‘이 연락이 무례한 게 아니라면 좋겠어요’로 시작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 당신을 평범한 일상에서 끌어내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묻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연락을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만 답해줘도 좋다고 썼다. 잭슨의 한국 이름은 재순, 자신은 재민이라고도 썼다. 
그날, 제나는 메일을 꼼꼼히 읽었다. 번역기를 사용한 듯 약간 어색한 히브리어와 영어로 각각 적혀 있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제나는 조금도 무례하지 않다고, 그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답장을 쓸 생각이었다. 다만 막 침실 커튼을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제나는 노트북을 덮고 우선 하던 일로 돌아갔다. 커튼을 짊어지고 4층에서 지상까지 계단을 내려가 10분 거리의 빨래방으로 갔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긴 의자에 걸터앉아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흰 타일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걸 지켜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한 시간쯤 흘러 건조기에서 커튼을 꺼냈을 때는 이미 지쳐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뭐라도 포장해갈 생각이었지만,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전날 먹었던 닭고기를 데워 먹었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은 건 날이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답장을 완성한 건 거의 열흘이나 지나서였다.

 

열흘 정도라면 나쁘지 않아. 제나는 혼잣말한다. 재민은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으니까. 맞은편의 남자가 몸을 뒤척인다. 그 바람에 털모자가 느슨하게 흘러내려 그의 한쪽 눈을 반쯤 가린다. 제나도 생각난 듯 모자를 벗는다. 계단참에서 아래층 여자가 왠지 조지아에서 온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던, 그 짧은 반백 머리가 환한 조명 아래 드러난다. 
지구상에는 여러 곳의 조지아가 있다는데, 제나는 그때 자신이 홍조로 불타는 것처럼 보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문제는 계단이다. 오늘 새벽에도 캐리어를 끌고 내려오는 동안 얼굴은 뜨거워지고 모자 밑과 등에는 땀이 찼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좋아했던 집이었다. 그러니까 자프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두 사람은 결혼 뒤 몇 번 이사했고, 창 아래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그 집에서는 12년을 살았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종아리근육에 자극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시장이나 병원, 바다에 갔다. 적어도 수천 번은 그랬을 것이다. 매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게 나중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되었다. 자프식 표현을 쓰자면 ‘완전히 드러눕기’ 전에는 둘 다 그 집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침대에 드러눕자 많은 게 순식간에 돌변했다. 계단은 높고 불가침한 무언가가 되었다. 그다음 일들은 너무 빨리 진행됐다. 이사 생각은 할 틈도 없었다. 
언제였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매일 새로운 고통을 느끼는 건 길어야 1, 2년 정도라고 제나는 들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가면 또다른 게 온다는 건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은 아주 미세하게 달라진다. 모든 물에서 쇠맛이 난다. 그녀는 조금 이상해진 세상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제나는 스카프를 여민다. 땀이 식자 금방 다시 한기가 느껴진다. 비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어디선가 찬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것도 같다. 긴 통로들을 몇 번이나 지나 도착한 깊숙한 곳에서도 바깥 날씨가 느껴진다는 게 제나는 신기하다. 이 견고한 건축물에도 틈 같은 게 있는 걸까. 
제나의 집 창가에서는 한낮에도 열매를 물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과일박쥐들을 볼 수 있었는데, 가끔 제나는 그들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어두컴컴한 동굴? 폐허가 된 건물? 깊은 터널들? 박쥐들은 아무리 눈 씻고 봐도 그들을 찾아낼 수 없던 곳들에서 날아올라 그녀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비행기가 뜨는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고, 그녀는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좋아하는 거리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그 집의 침실 창가로. 자프가 죽은 뒤로 몇 년째 그대로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정리를 권하는 그 방으로. 
오늘도 귀퉁이가 닳은 보트 패들을 옆구리에 끼고 바다로 달려갈 창 아래 아이들을 제나는 그려본다. 보슬비가 오긴 하지만 오늘 정도 기온이라면 제나도 나갔을 것이다. 그 다정하고 착한 개도 오늘쯤엔 올까. 
재작년 여름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가로지르며 해변을 달리던, 딱히 주인이 없어 보이는 보더콜리였다. 얼마 전부터 다리를 절뚝이고 뒷다리 부근 털을 자주 핥더니 요즘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가끔 와서도 멀찍이 모래사장 위에 엎드려 짙은 눈동자로 바다나 사람들을 물끄러미 볼 뿐이다. 
정말 괜찮겠어? 자프가 그 개를 봤다면 어떤 식으로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는 말이 없고 대신 그녀가 답한다. 그러니까, 그러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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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알림음이 울린다. ARE YOU OK? 재민에게서 온 메시지다. 제나도 답한다. I’M OK.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 난다. 며칠 전부터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연락을 최소화하고 있다. 한 마디라도 덧붙이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버릴 것처럼.
지난 석 달간 서로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재민이 가끔 모호한 문장을 보내와도 제나는 늘 충분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시간의 시차, 열세 시간의 비행 거리, 망망대해와 해저 케이블, 위성 링크, 광섬유 다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제나는 재민이 자신을 찾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전한 거리감 때문이라고 믿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더 많은 걸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민이 얼굴을 볼 수 있겠냐고 조심스레 물어왔을 때 놀랐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제나는 좀 두렵다. 사진 속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치고 오래 알아온 것처럼 웃으며 서로를 포옹하게 될 순간이, 그 젖어 있던 두 손의 체온을 자기 손으로 느끼게 될 것이 무섭다.
또한 그녀는 두렵다. 이 모두가 무리했다고 결론짓고, 잭슨과 함께 재민까지도 지금의 삶 바깥으로 밀어내게 될지 모른다는 게 무섭다. 
이 모든 걸 재민도 느끼고 있으리라는 것도, 그녀는 두렵다.
제나는 홀 중앙에 자리잡은 작은 분수로 시선을 돌린다. 바닥에는 환한 조명이 켜져 있고 양치식물들이 석조 수반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어 어딘가 휴양지 분위기를 풍긴다. 성스럽다는 느낌은 조금도 없다. 그런데도 바닥에는 반짝이는 동전들이 가라앉아 있다. 분수가 있는 곳이면 늘 그렇듯 여기도 슬쩍 던지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제나는 지금이라도 재민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잠깐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재민의 숨죽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사진 속 얼굴에서 입꼬리를 내리고, 웃고 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그 눈빛에 초조와 외로움을 더하자 그건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얼굴이 된다. 그 얼굴은 제나의 집 거울 속에도 있다.
소망 같은 게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지는 그녀도 안다. 이를테면 자프의 병세가 손쓸 수 없이 나빠지던 해, 두 사람은 검진 결과를 보고 슬퍼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해했다. 손발이 자주 차가워지는 증상 외에는 모든 게 좋았기 때문이다. 석류꽃은 평소보다 일찍 피었고 바다는 놀랄 만큼 따뜻했다. 자프는 두 사람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물밑에서 수영 팬츠를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물위를 떠다녔다. 
제나는 가방을 열어 탑승권과 여권을 한번 더 확인한다. 부쳐놓은 짐 안 물건들도 되짚어본다. 대부분은 방한용품들이다. 특히 밤낚시를 할 때 자프가 자주 입었던 두툼한 패딩. 원래는 재활용센터에 보낼 예정이었지만 얼추 맞아 그녀가 입게 되었다. 집에는 그런 식으로 남겨둔 자프의 물건이 많다. 
한국의 겨울. 최저기온 영하 17.3도. 그녀가 본 수치는 그랬고, 그게 어느 정도 추위일지는 감도 오지 않는다. 감이 안 오는 건 그 말고도 많다. 재민을 만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동안 제나는 바다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다가도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 넣다가도 재민에게 보낼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부지런히 쓰고 답장을 보냈다. 어떤 장면들은 너무 선명하게 떠올라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주고받는 메일들은 대부분 조심스럽고 짧았다. 한번 보내면 상대의 메일함에도 영원히 남는다는 걸 둘 다 알았다. 

 

동생이 배낭을 메고 떠나던 날이 기억나는데, 그날 제가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급하게 나갔어요.

 

제나는 잭슨을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짧게 쓴 적이 있다. 잭슨이 제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찾아왔어요. 정전 때문에 초에 붙일 불을 빌리려고요.
그럴 때, 제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메일을 확인할 재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 새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