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녀의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언어를 다시 배우는 것과 비슷해요. 재정립 말이에요.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시작된 악몽 때문에 제나 스스로 찾아간 곳이었다. 도심 대로에 고층 건물들이 한창 올라가던 때였다. 제나가 자프와 막 결혼했고, 자프는 이직한 건축사무소에 다니고 있던 때. 그때 제나는 막 스물아홉 살 생일을 지났다.
상담사는 한 번에 하나씩 낱말 카드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좋을 거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딱 한 시간씩만요.
첫날, 어떤 꿈을 꾸는지 묻는 상담사의 질문에 제나는 지나치게 정직하게 답했다. 몇 년째 산이 무너져 거기 파묻히는 꿈을 꾼다고, 그 사고로 죽은 예전 연인을 만난다고.
상담사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지만, 그날 제나가 말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날은 같은 동네에 사는, 슈퍼마켓에서도 공원에서도 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중년 여자만 떠올렸다. 왜 그녀가 떠올랐을까. 제나 자신도 잘 모른다.
그 여자는 멀쩡한 집을 두고 차 안에서 살았는데, 차 내부를 빼곡히 점령한 물건들 안에 돌처럼 박혀 지냈다. 날이 좋을 때면 여자가 작은 플라스틱 의자를 차 밖에 내놓고 거기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발톱 깎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나는 여자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조그맣게 인사했다. 그때마다 여자는 모른 척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여자를 차에서 끌어내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맑은 여름밤이었다. 그늘이 넉넉해서 차를 대놓았을 시크마 나무를 껴안은 채 여자는 얻어맞았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돌무화과 열매가 피웅덩이 속을 굴러다녔다.
그날의 낱말 카드는 제나도 알고 있는 그 여자의 진짜 이름이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못했다. 상담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창 너머에서 흘러드는 공기와 소음을 느끼며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봉지에 담긴 짭짤한 아몬드를 나누어 먹었다. 두 봉지, 그리고 세 봉지. 침묵 속에 서로의 입안에서 아몬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번째, 아마 네번째 세션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제나가 나눠 먹을 새 과자를 준비해 간 어느 초가을이었다. 상담사가 물었다. 어때요, 이제 천천히 해볼까요?
그날, 잭슨과 불에 대해 이야기했던 걸 제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묵던 숙소에 정전이 발생하자 잭슨이 그녀를 찾아왔던 일에 대해.
그날의 낱말 카드는 불이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세션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상담사는 그걸 꺼버리고 좀더 이야기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제나는 이상하게도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하던 말을 멈췄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상담실을 나섰다. 막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신시가지의 희뿌연 공기 속을 걷다가 그늘진 곳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그런 다음 콤팩트를 꺼내 화장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상담실은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그게 뭔지, 재민이라면 알까, 어쩌면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재민은 알 테니까.
누군가 왜 재민을 만나기로 했냐고 묻는다면, 제나는 정확히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이때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는 말할 것 같다. 그건 이야기의 서막 같은 것이었다고. 긴 침묵 뒤에 찾아온 아주 짧은 점화.
추위 속에서 불을 피우고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는 일.
하지만 제나는 그 일들이 지연되기를 원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은 아직 파묻힌 것도 불타버린 것도 아니니까.
아직도 그를 찾고 싶어? 자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가 대답한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사실 설명할 길이 없다. 제나는 아예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재민의 첫 메일에 답장조차 하지 않고, 잭슨을 흔들어 깨우지 않고, 모든 걸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둘 수도 있었다.
헬리콥터에 실려 카트만두의 병원으로 가던 길, 그녀가 들었다고 착각했거나 선의의 거짓말이었을 그 말. 그녀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던 말.
그날 제나는 희미하게나마 잭슨도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안도하며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찾을 길이 없었다. 몇 주 뒤 그녀만 집으로 돌아갔다. 그뒤로 제나는 자주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그래, 알겠어. 그래서 잭슨은 어디로 갔지? 너는 왜 여기 있지?
제나는 빵을 사기로 한다. 허기를 못 이겨 빵 진열대로 다가간다. 껍질이 반질반질한 작은 빵을 고른다.
계산대의 여자가 빵을 종이봉투에 담다 말고 옆 직원과 속삭이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린다.
두 사람은 짙은 눈썹과 약간 튀어나온 이마가 꼭 빼닮아 언뜻 자매처럼 보인다. 뭔가 로맨틱한 일을 공유하고 있는 듯 서로를 부추기고 눈짓하고 웃는다. 그러다가 졸음과 피로가 몰려오는지 각자 허공으로 눈길을 돌리며 곧 무표정해진다.
제나는 자리로 돌아와 딱딱한 빵 껍데기를 조금씩 뜯어먹는다.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빨리 흘러가는 시간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차이에 대해.
하지만 인간인 그녀의 눈은 그걸 알아볼 길이 없고, 이제 계산대의 여자들은 사이좋게 번갈아 하품한다. 잭슨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는 어딘가 깊은 틈에서 그곳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얼음, 그것이 아주 조금 녹은 물, 흙과 유기물들이 뒤엉켜 또 한 겹의 지층을 이루는 시간을.
그리고, 그녀는 여기 있다. 변기에 앉고 고지서를 처리하고 가전제품과 씨름하고 빵을 갉아먹으면서.
그리고, 자프는…… 그녀는 거기에서 멈춘다. 그는 먼 곳에 있기도 하고 여기에 있기도 하다. 아직 그녀가 떠나보낸 적이 없으니까.
제나가 알고 지내는 한 영매에 의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시간이 교차한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이 그런 순간일지 모른다고 제나는 생각한다. 이 작은 빵 하나에 허기와 포만감을 동시에 느끼는 걸 보면. 딱딱한 껍데기를 다 먹고 나자 빵은 곧 희고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내고, 제나는 비둘기들이 많은 공원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끝으로 그걸 조금씩 떼서 동글동글하고 작게 만든다. 빵 접시에 모아놓는다.
공항만큼 쾌적하고 깔끔한 곳은 없다. 여기에 비둘기 같은 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박쥐들이라면 살고 있을지 모른다.
높은 천장의 텅 빈 골조 사이, 활주로의 갈라진 아스팔트 틈, 광활한 기계실의 먼지 쌓인 전선 뭉치 사이, 오래돼 고장난 환기구 아니면 우리 눈에는 띄지 않는 어디에라도.
제나는 박쥐들이 재재거리며 기다렸다는 듯 열을 지어 그 컴컴한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걸 상상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영영 발견되지 않는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 틈이 너무 깊고 깊어서 지구 반대편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제나는 빵 하나가 거의 사라질 때까지 작은 밀가루 공들을 계속 만든다. 마음속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 며칠 전 노트에 적어둔 메모를 생각한다. 재민의 식당에서 두부 요리를 먹어볼 것.
그녀는 공을 만들던 손놀림을 멈춘다. 수치심과 자랑스러움 때문에. 포만감과 허기 때문에.
그걸 자기 손으로 적은 날, 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재민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재민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재민과 메일을 주고받은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재민은 동생을 잃은 뒤 이름도 세부도 없는 냉혹한 단신 기사들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자신은 그 일을 사고로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건 폭죽처럼 터졌다가 사라지는 단말마의 비명 같다고.
예외적인 폭설로 눈사태가 드문 히말라야 2800미터 지점에서 한국인 남성 A씨와 이스라엘 여성 B씨가 조난을 당했다. B씨는 구조되었으나 A씨는 실종되었다.
제나는 그 가차 없는 누락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익명성이라는 참호 안에 몸을 감췄다. 자프와 극소수를 제외하면 제나에게 벌어진 일을 아무도 몰랐고, 그로 인해 제나도 섣부른 추측과 호기심어린 눈길을 피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제나는 재민에게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갈수록 그리움이 커가는 당신과 달리 나는 서둘러 종결하고 싶어한다고. 사실은 아무것도 종결되지 않는다는 불변의 사실로부터 빠져나가고 싶어한다고. 그러니 좀더 인내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소박한 밤색 눈동자, 뿌리부터 탄력 있게 곱슬거리는 머리칼. 이제 그녀는 자신의 손을 만져본다. 한때 그 손에 늘 닿아 있던 딸아이를 생각한다. 눈을 감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꼭 작은 새끼 양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애가 열네 살 때쯤 제나와 다투고 나흘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다.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꺼칠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프는 말했다. 언젠가는 말해줘야 해. 그 말에 신경이 곤두선 제나가 대체 뭘? 하고 되묻자 자프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얘기해줘야 해.
그 무렵 아이가 제나에게 바랐던 건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휴일뿐이었다. 제나는 그 작은 소망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순간에조차 진정 그곳에 있지는 않았다. 둥둥 떠다녔다. 딸아이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애는 제나를 떠났다. 뉴욕에서 웨딩 플래너로 일한다. 한때 열광했던 피어싱과 짙은 눈화장의 세계에서 좀더 안전한 드레스와 꽃장식의 세계로 이동했고, 제나가 겪고 있는 전쟁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제나는 화장실로 향한다. 수도꼭지를 세게 틀고 조금은 비틀듯이 손을 씻는다. 제나가 그동안 배운 게 있다면, 자기연민만큼 흉하고 당혹스러운 감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슬퍼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몇 주 뒤면 딸아이의 생일이고, 올해도 그 집에서는 떠들썩하고 친밀한 파티가 벌어질 것이다. 그 파티는 아이와 어른의 세계 사이 어딘가에 놓인 휴일 같다. 소파 위에 과일 조각과 크림이 뭉개지는 해질녘의 시간. 쇳조각이 공기를 찢는 듯한 퀸스 거리 특유의 소음이 창을 뒤흔들고, 딸이 어울려 다니는, 자기 신념을 위해 길거리를 맨발로 걷는 그 여자애들이 올해도 커다란 야생화 다발과 대충 닦은 발로 쳐들어와 카펫에 발자국을 찍어댈 것이다. 그들은 대지의 박동과 매해 화사하게 얼굴을 바꾸는 매카시즘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큰 악의 없이 전쟁의 참혹함을 토로할 것이고, 그러면 마음이 불편해진 딸아이는 먹을 걸 좀더 가져오겠다며 슬쩍 부엌으로 피신할 것이다. 그애도 제 엄마를 닮아 제 마음을 설명하기 어려워하니까. 자프 없이 딸아이를 방문했던 지난 몇 년간 제나도 그런 순간이 오면 늘 적당히 빠져나가 건물 1층에 있는 중국인 카페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제나는 자프가 간절하다. 그라면 딸아이의 친구들에게도 말해주었을 테니까. 요즘엔 20달러만 주면 초고성능 망원경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자지구를 속속들이 볼 수 있더라고. 트쿠마나 스데롯 같은 도시들은 폭격 대피 시간이 15초던데 텔아비브는 90초니 얼마나 관대하냐고.
그런 말을 할 때조차 느긋해 보였을 자프의 얼굴을 제나는 금방 떠올릴 수 있다. 또한 그는 전해주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폭격 속에서 운전대를 돌린 피란민들 이야기, 아이 둘을 군대 보낸 뒤 시위에 나갔다가 물대포를 맞고 머리를 다친 예루살렘의 친구 이야기. 이곳이 우리 부부가 사는 세상이라고, 그는 다만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나는 영영 모르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모래처럼 두 손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눈치조차 못 채기를 바랐다.
입김만 닿아도 스러지던 눈 결정들이 어떻게 그처럼 무거워질 수 있는지. 왜 어떤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거의 전 생애라 부를 만한 시간이 필요한지.
제나는 딸아이의 귀에 속삭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잊히고, 누군가는 영영 발견되지 않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