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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한기가 서서히 물러나고, 그 빈자리에 복잡한 소리와 냄새가 밀려든다. 사람의 물결. 제나는 시계를 본다. 막 7시 10분을 지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게이트 번호를 다시 확인한다. E9번. 3층으로 올라가서 곧바로 좌회전.
재민에게서 새로 온 연락은 없다. 제나가 쓴 메시지만 마지막에 남아 있다. I’M OK. 그다음 문장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도 자신이리라는 걸 제나는 예감한다. 핸드폰을 손에 쥔다.
비어 있던 테이블들이 어느새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한다. 털썩 짐 내려놓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웃음과 탄식.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
바야흐로 조식의 시간이었다.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이곳의 출국 수속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적당한 허기, 여행에 대한 기대와 피로가 부산하게 퍼져나간다.
면세점에서 흘러나오는 복잡다단한 향수 냄새, 따뜻한 살갗과 향신료가 뒤섞인 냄새, 톡 쏘는 듯한 화학물질 냄새, 희미한 담뱃진 냄새로 홀은 금방 가득 차오른다. 토마토소스와 갓 잘라낸 양파, 빵과 커피, 튀김 냄새도 거기에 합세한다. 자매처럼 꼭 닮은 카페테리아 직원들도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제 그녀는 어둑한 새벽의 영역에서 벗어났고, 아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긴 밤을 지나왔다. 되풀이되는 꿈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밤이면 제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오직 하나만 소망했다. 오늘도 아침을 볼 수 있기를. 꼭 한 번만 더.
이제 그녀의 눈은 저만치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두 남녀를 보고 있다. 두 사람 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어깨에는 비행용 담요를 두른 채다. 경유중인 여행자들일 것이다.
고단했을 긴 비행 때문인지 두 사람의 얼굴은 피로로 창백하다. 저들이 지금 원하는 건 발 뻗을 자리와 커피 한잔이 전부일 것이라고 제나는 짐작한다. 마음속으로 내기를 청한다.
내 쪽을 봐줘. 만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이 자리를 양보할 거야. 그러면 당신들은 커피를 마시게 될 거고, 나는 내 비행기를 타겠지.
자프도 지켜볼 것이다. 그와 했던 장난이기도 하니까. 당신, 알고 있어? 오늘 비가 오면 나는 닭고기가 먹고 싶어질 거야.
잠시 후 여자가 제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제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움켜잡는다. 손가방을 들어 보인다. 그걸로 명확해진다. 여자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지고, 제나는 짧게 미소 짓는다. 그때 청소 카트가 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지나간다. 두 남녀는 잠시 제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성마른 몇몇이 바쁘게 스쳐가며 뭔가를 던져넣어도 청소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성마른 몇몇이 바쁘게 스쳐 가며 카트에 뭔가를 던져넣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부인 카트와 함께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지금 이 공항에서 가장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찾으라면 아마 저 청소부일 것이다. 자신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그는 빛난다.
잠시 후 카트가 지나고 나자, 제나는 저만치 두 사람이 배낭을 추스르며 다가오는 걸 본다. 나설 준비를 한다.
맞은편에서 졸던 털모자 남자는 주변이 더 소란해졌는데도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다. 제나는 그를 깨워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두기로 한다. 비행을 기다리는 여행자의 꿈속에는 신묘한 알람시계가 있어 결코 탑승 시간에 늦는 법이 없다.
두 사람이 곧 도착하고, 제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크들의 발자국과 흙과 돌로 가득했던 땅. 거기에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제나는 생각한다. 배낭에 라면과 초코바, 오리털 침낭과 여분의 양말을 지고 길을 나섰던 등반 첫날.
두 사람은 얼마 전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고, 이제야 인생이, 아니 그렇게 투박하게 부르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불안정한 뭔가가 시작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재민과 마주하면 거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두부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 수도 있어. 자프가 슬쩍 끼어든다. 그래, 그것도 좋아. 잭슨의 할머니는 재민의 할머니이기도 하니까. 제나가 답한다.
얼어붙은 산기슭 롯지의 컴컴한 부엌 화덕, 거기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잭슨에게 들었던 그 성찬 이야기, 그의 할머니 이야기.
그도 아니라면, 오랫동안 그녀를 방문했던 그 꿈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껏 이야기한 건 자프에게뿐이지만, 재민에게는 말하고 싶다. 늘 두려웠지만, 언젠가부터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그 꿈들의 세부와 의미에 귀 기울이지 않은 적이 없다고. 그것들도 내 모든 밤과 어둠 속에 함께 있었다고.
이제 제나는 꿈에는 꾸는 자의 의지만이 아닌, 꿈 자체의 의지도 깃든다는 걸 안다. 그래서 어떤 꿈들이 찾아와도 성난 개의 목줄을 풀어주듯 그냥 놓아둔다. 거인의 두개골이 쩍쩍 쪼개지는 듯한, 먼 정상의 세락들에 금이 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슬픔 없이 산이 무너지는 걸 지켜본다. 난폭하게 덮쳐오는 눈더미를 피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눈을 마주친 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다보면 반드시 잭슨의 ‘그 순간’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점에는 둘 다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폐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쯤이면 잠자리에 누웠을까.
이제 제나는 재민을 생각한다. 이곳에 아침이 밝아올 때 그녀의 도시는 아직 밤일 테니까. 그저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조해하고 있을까, 평온할까? 기대를 품고 있을까?
하지만 제나가 확실히 아는 사실은 재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언젠가 제나는 재민의 방이 식당 안에 있다고 편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어떤 공간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늦은 오후 한적한 외곽 거리를 걷다보면 창 너머로 꼭 보게 되는 식당 주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한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가서 다음 식재료를 준비하고 나면, 그들은 미뤄두었던 일을 한다.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영혼을 쉬게 하는 일.
제나는 재민이 불 꺼진 식당으로 걸어 나와 물을 따라 마신 뒤, 탁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상상한다.
40분쯤 남았다. 제나는 탑승 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통유리창 너머로 너른 활주로가 내다보인다. 비행기 몇 대가 천천히 선회한다. 그녀가 타게 될 비행기도 도착했을 것이다. 제나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다. 하레디 랍비인 외삼촌이 있었지만,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외삼촌은 공동체에서 자란 어머니가 세속을 택했을 때 유일하게 저버리지 않은 가족으로, 어머니는 라디오에서 기이하거나 슬프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걸 편지에 적어 보냈다. 외삼촌은 공동체에서 발간하는 신문만 읽었고, 핸드폰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기도하는 법은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제나는 잭슨의 할머니도 떠올린다.
그녀는 폭설이 내리면 지붕까지 눈이 쌓이는 일본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이 겨우 오갈 만큼 좁은 눈 굴을 파 바깥을 오갔다.
그곳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매해 있었다. 그 가족들은 눈에 파묻힌 집 안에서 무력감과 슬픔에 젖어 기다렸다. 눈이 녹아 서서히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고 죽은 자들이 길 위로 떠오를 때까지. 그 허기지고 슬픈 봄에 사람들은 묵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제나는 모든 악몽들이 지나간 뒤, 언제부터인가 꿈속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한 늙은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설산 기슭의 아늑한 집.
날이 좋을 때면 그 남자는 멀리 눈 쌓인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말한다. 나도 저기를 오른 적이 있어. 아주 높은 산이었어. 그러면 제나가 놀라서 되묻는다.
정말? 그동안 왜 한 번도 얘기 안 했어? 그러면 남자가 대답한다. 나는 죽었으니까.
제나는 늘 그 지점에서 두 팔을 벌려 안아주려다가 깨어난다. 그는 잭슨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프이기도 하다.
안내 방송과 함께 탑승 카운터가 열린다. 제나도 다시 손가방을 연다. 여권과 탑승권을 떠 한번 챙긴다. 사람들 사이로 걸어들어가 줄을 선다.
이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 내게도 재민에게도, 더 많은 것들이.
그러니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제나는 자신이 인천에 도착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비행기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눈 뜨면 비행기는 인천에 다다라 있을 거고, 제나는 입국장으로 걸어나가 재민과 만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재민의 차를 타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사진에서도 언뜻 본 구형 승합차. 뒷좌석에 가게 물건과 재민의 물건이 뒤섞여 있을 그 회색 자동차.
짐작하건대 재민은 제나를 위해 그 물건들을 말끔히 치웠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아직은 별말 없이 도로를 달려 그 식당에 도착할 것이다. 희끄무레한 음식 사진들이 붙어 있던 그 식당.
그곳에서 제나는 바라던 대로 재민의 두부 요리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
제나는 이제 곧 출발한다고, 재민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을까.
그 질문은 늘 제나의 몫이었다. 거기에는 답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을 이해하기 위해 전 생애가 필요하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 끝에서는 뭔가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니까.
언젠가는 제나가 딸아이에게로 가서 잭슨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엔 그녀도 그 홍학처럼 우아하고 종다리처럼 시끄러운 딸아이의 친구들과 맨발로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통유리창 너머 비행기들이 밝아오는 아침 빛을 받아 번쩍인다. 저 활주로의 틈 속으로 사라진 박쥐들. 그들도 언젠가는 지구 반대편의 그 설산에 다다를지 모른다. 아몬드와 돌 무화과 열매를 물고 꼭대기를 향해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 차례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제나는 심호흡한다. 잠시 후 그녀는 탑승구 안으로 빨려들듯 걸어간다.
사람들은 먼 곳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진짜 삶에서는 돌아갈 집이 너무 쉽게 사라지고, 한번 잃은 걸 손상 없이 돌려받는 일은 없으므로.
오래전 그리스에서는 며칠 밤낮 동안이나 연극이 상연된 적도 있다. 바라던 곳에 도착해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그리워해 돌아오는 이야기. 산 자가 죽은 자를 찾아 지옥일지라도 걸어들어가는 이야기.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이 거기서도 며칠 밤낮 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이 말을 가장 먼저 하게 될 것 같아. 제나는 마음을 정한다. 자프가 뭐냐고 되묻는다.
그녀가 답한다.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예전엔 먼 곳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