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심시선 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1


진행자  심시선 씨, 유일하게 제사 문화에 강경한 반대 발언을 하고 계신데요. 본인 사후에도 그럼 제사를 거부하실 건가요? 

심시선  그럼요, 죽은 사람은 밥을 못 먹습니다. 사라져야 할 관습입니다. 

김행래  바깥 물 좀 드셨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전통문화를 그리 우습게 여기고 깔보면 안 돼요. 

심시선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고생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진행자  아, 따님에게요? 아드님 있으시잖아요. 

심시선  셋째요……? 걔? 걔한테 무슨. 나 죽고 나서 모든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김행래  몹쓸 언행은 아주 골라서 다 하시는군요. 

심시선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 

―TV토론 <21세기를 예상하다>(1999)에서 


*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어.”

한 달에 한 번씩 남매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명혜가 선언했을 때, 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제 와서?”

둘째인 명은은 두 살 많은 언니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올해가 십 주기잖아.”

“하지만…… 엄마가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막내인 경아는 혼란스러웠다. 심시선의 유일한 아들인 명준은 식사를 계속하며 말이 없었기에, 나머지 세 딸은 모친이 방송에서 대놓고 ‘……걔?’라고 어이없어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가끔 자매들끼리 명준 욕을 할 때 흉내를 내며 따라 하기도 하는데 본인이 눈앞에 있으니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붓다도 제자들한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그 말 듣긴 들었나? 온 아시아가 절로 뒤덮였지.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내고 싶어.”

“하긴 모르는 시댁 할아버지들 제사도 한참을 지냈는걸, 엄마도 한 번쯤 지내주고 싶다.”

경아는 평소처럼 쉽게 명혜에게 설득당했다. 심시선의 재혼으로 얻은 딸이었지만, 본인도 위의 세 남매도 그런 것은 개의치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본인이 싫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안 되지. 평소처럼 좋은 데 예약해서 엄마 사진 두고 식사나 하면 되잖아.”

명은은 굽히지 않았다. 

“들어봐.”

명혜가 안경을 닦아서 다시 썼다.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그 말에는 나머지 셋이 첫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뭐? 거기까지 가서 전 부치고 생난리를 치자고?”

“누나, 그건 아닌 것 같아.”

명준도 뒤늦게 입을 열었다.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내가 미쳤다고 그 멀리 가서 엄마가 싫어하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겠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장녀는 웬만해서는 지지 않는 심시선의 성격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편이었다. 다른 동생들은 동조와 반박 사이에서 헤맸지만 결국은 명혜 뜻대로 될 것을 알았다. 

“명준아, 우윤이도 오라고 해. 미국이랑 한국의 딱 중간이네. 네가 비행기 티켓 끊어줘.” 

명혜가 명확하게 지시를 내렸다. 


우윤은 명준이 아닌 지수에게서 먼저 소식을 들었다. 우윤과 지수가 어린 시절부터 유지해온 사촌 사이의 독특한 친밀감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도 약해지지 않았다. 지수는 친언니인 화수보다도 더 자주 우윤과 통화했다. 

“큰고모가…… 큰고모가 하겠다면 하는 거지, 뭐.” 

우윤은 당황했지만 아무도 큰고모를 막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수긍했다.

“우리 엄마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동안 제사 안 지내는 집안이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 이게 뭐야?”

“뭔가 계획을 세우신 거겠지.”

“다들 평생을 그 계획에 휘둘리며 살잖아.”

지수의 푸념에 우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는 별로 휘둘리지 않는 편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화수 언니는 잘 지내?”

물을까, 묻지 말까 망설이다가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지수가 신음했다. 

“아니, 잘 못 지내는 것 같아. 어쩌면 엄마가 언니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벌이는지도 모르겠어.”

“하와이가 그렇게 좋다잖아. 화수 언니한테도 좋겠지.”

“글쎄…… 어쨌든 할머니가 젊을 때 잠깐 살았다던 곳이니까,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긴 해.” 

“가끔 그런 생각 안 해? 할머니가 계속 하와이에서 살았으면 모든 게 다르지 않았을까, 하고?”

“아이고, 우리 할머니 조그매서 계속 거기서 일했으면 골병들어 죽었을 거야.” 

“그래도 엠앤엠M&M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럼 우리 할아버지도 못 만났을 거고 우리도 없었겠네.”

“할머니는 행복했을 거야.” 

“난 항상 할머니가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시대 여자들 중에는 말야.” 

그 지점에서 우윤의 의견은 지수와 갈렸다. 우윤은 할머니가 행복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역시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2


마티아스 마우어Matthias Mauer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여전히 내 말과 글과 행동과 표정에서 마우어의 흔적을 찾는다는 걸 알지만, 소용없는 일일 테다. 그에게는 재능과 별개로 많은 문제가 있었고,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사람들이 그리는 것처럼 절절하게 아름답지도 바닥까지 추악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부인이 아니었고, 대개의 기간 동안 연인도 아니었다. 그를 이용했기에 입을 다무는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에겐, 몇 년 전에 내가 국제적으로 몸을 굴려 지금 자리에 다다랐을 뿐이라며 함부로 써대던 논설위원이 어찌되었는지 상기시켜주고 싶다. 나에게는 유능한 변호사가 있고, 그자가 몇 년치 번 돈을 빼앗아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한 점 샀으니까. 

―『잊은 것에 대해 묻지 마시오』(1988)에서 


*


화수는 식탁에 앉아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작고 푸른 추상화로, 매일 한 시간씩 바라보고 있어도 매번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 그 그림에 반해 화가에 대해 알아보았다가 누군가의 부인이란 설명이 먼저 오는 것에 아연함을 느꼈었다. 이렇게 대단한 걸 그려도 그보다 중요한 정보는 남성 화가의 배우자란 점인지,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십 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의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할머니가 유언장에 부엉이처럼 보이는 파란 그림은 화수 주어라, 그애가 그 앞에 가장 오래 앉아 있었다, 써둔 것을 기억하면 언제나 조금 울고 만다. 화수는 동생인 지수나, 사촌인 우윤만큼 할머니와 살갑지 못했다. 장녀의 장녀인지라 특유의 무뚝뚝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화수가 그 그림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찻잔의 차가 비었지만, 의자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걷는 것도 버거워 물이 든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켜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든다. 몇 번 움직인 것만으로 지쳐, 조종하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복직일이 다가오고 있는데, 복직이 가능할지 회의적이었다. 복직이 정말 하고 싶은 거냐고, 아무도 화수가 무리하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가까운 이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할머니와. 할머니의 죽음은 화수에게 이상했다. 처음 이삼 년은 무척 단단하고 확실히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계속된다는 말은 좀 미묘하지만,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육체가 아닌 부분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쉽게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다른 평가를 받았는데 세상을 뜨고 십 년이 지나자 사람들이 어디선가 자꾸 조각 글과 동영상 들을 발견해냈다. 

“아이고, 우리 심시선 여사, 언제 그렇게 티브이에 많이 나갔대? 이건 우리도 못 본 거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여사로 부를 때엔 애정과 거리감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가족들이 쓰는 여러 그룹의 메신저에는 그때껏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기록들이 자주 공유되었다. 

“엄마가 우리 정말 열심히 먹여 살렸다. 온갖 쪽글들 마다하지 않고 쓰면서.”

명은 이모가 말했고, 화수는 할머니로선 고된 일이었겠지만 자신이 세상의 다른 손녀들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쓴 스물여섯 권의 책이 있고, 책 바깥의 다른 편린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것을 모조리 입력한 인공지능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그런 시대가 오지 않았으므로, 손에 넣는 대로 읽고 봄으로써 어느 정도는 대화에 가까운 효과를 누리고자 했다. 

하루에 몇 번씩 고장난 것처럼 멎는 화수였으므로, 진도는 느렸다. 오래된 책들에선 책벌레가 나오곤 해서 도서관에 가 소독기를 빌려 써야 했다.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화수에겐 멀었다. 네 권쯤 읽었을 때 화수는 생각했다. 할머니는 왜 마티아스 마우어가 가학적인 학대자였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가족들은 알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더 정확히 쓰지 않았을까? 시대가 달라서였나? 요즘이라면 말할 수 있었을까? 그 망할 자식은 할머니에게 나이프를 던졌는데 말이다. 뭉툭한 유화 나이프였지만 그래도 나이프였고, 할머니의 팔뚝 바깥엔 흉터가 남았었다. 염을 할 때 보았다. 그 희미한 흉터를. 20세기에 생겨 21세기에 불타 사라진 흉터에 대해, 화수는 자주 오래 생각했다. 

빈 찻잔을 앞에 두고 허벅지가 불편할 때까지 앉아 있었더니, 액자에 햇빛이 들어 반사가 심해졌다. 화수는 액자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관자놀이와 턱, 목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를 살폈다. 

분노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밀며, 한 발을 딛고 또 한 발을 디뎠다. 무릎과 어깨가 어색하게 움직였지만 무시하고 벽을 짚었다. 숨을 고르고 욕실로 걸었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십 분쯤은 활기가 지속될 것이었다. 



3


질문자  선생님은 그럼 세 분 중에 어느 분을 가장 사랑하셨나요?

심시선  마티아스는 스승이었지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보다, 왜 나한테 세 사람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좌중 웃음)


심시선  여하튼 죽은 이들이 땅 밑에서 듣고 있을 것 같아 못 말하겠네요. 

질문자  그럼 질문을 좀 바꾸겠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시선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


(좌중 웃음과 웅성거림)


심시선  왜요? 할머니가 섹스라고 말하면 웃긴가? 

질문자  선생님도 참, (웃음) 폭력성과 비틀린 구석이 없다는 건 너무 베이직 아닌가요?

심시선  베이직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갖다 못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질문자  그런데 그런 상대를 어렵게 만나…… 섹스를 한다고요? 흥미로운 대화나 서로에 대한 이해 같은 건요?

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  렌즈요?

심시선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질문자  그렇지만 그건…… 그럼 육체적인 것만이…… 

심시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 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아주 괜찮은 섹스는 감은 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떠오르게 하니,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질문자  육체적 관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은요?

심시선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여성XX』 주최 다과회 녹취록(2003)에서 


*


이거 자기네 시어머니 아냐, 하고 모임 친구가 휴대폰을 내밀었을 때 난정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머님, 또 뭐라고 하신 거야? 누군가 빙글빙글 웃으며 곤란한 내용의 무언가를 불쑥 내미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 맞는 말인 듯 틀린 말인 듯 엄청 애매하네……”

다 보고 나서 난정이 말하자 모임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우윤의 중학교 때 반 친구 엄마들이었다. 막상 아이들은 서로 아무도 만나지 않는데 엄마들만 오랜 기간 모임을 유지했다.

“살아 계실 때 싫은 부분은 없었어? 아무래도 보통의 시어머니는 아니었잖아.”

“음, 늘 소문과 분쟁에 휩싸여 사셨으니 그런 면이야 가족으로선 신경 쓰였지만…… 편애가 없어서 편했어. 아들에 대해서나 딸에 대해서나, 자기 자식에 대해서나 데려온 자식에 대해서나.”

“무관심하셨나? 그거 좋았겠네.”

“아니, 무관심하진 않았어. 뭐, 워낙 본인 일에 몰두해 있었긴 한데…… 그건 우리 남편도 그렇지. 꼭 닮아서는. 그런데 몰두해 있다가 자식들이든 손녀들이든 보면, 이것저것 물어보시곤 했는데 싫지 않았어. 겉도는 대화는 절대 안 하는 분이었달까.”

“겉도는 대화?”

“보통은 며느리가 뭘 하고 사는지 그렇게까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런데 어머님은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했어. 무슨 책 읽는지, 어떤 내용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 자기 책 많이 읽지. 그래서 잘 지냈겠네.”

친구의 말에 난정은 웃었다. 난정이 책을 많이 읽어서, 평생 책을 쓴 시어머니와 딱 한 번의 격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원래도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우윤이 아팠던 시기와 겹쳤다. 대학병원의 대기 시간은 길었고, 난정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보호법이었다. 

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우윤의 병이 재발할까봐, 혹은 다른 나쁜 일들이 딸을 덮칠까봐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 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키워놓았더니 미국으로 날아가버렸지, 내 딸……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매일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너같이 많이 읽는 애는 언젠가 쓰게 된다.”

어느 날, 어쩌다가 그런 생각에 다다랐는지 심시선 여사가 난정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뇨, 전 그런 욕구는 없는데요.”

“넌 나보다도 많이 읽잖니? 아인가베Eingabe가 있으면 아우스가베Ausgabe도 있기 마련이야.”

“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고. 그게 자연스럽지.”

독일어와 영어와 가끔 일본어까지 사용하는 시어머니는 점쟁이라도 된 것처럼 난정의 미래를 가늠하려고 했다. 거칠게 마른 손가락에 난정이 모르는 사연이 깃든 반지들을 끼고 일부러 찾아와 난정의 서재를 살폈다. 난정의 서재가 난정의 머릿속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하여간 쉽게 몰두하는 성격은 알아줘야 했다. 20세기의 온갖 참혹함에서 살아남아, 여러 언어를 마구 섞어 생각하는 작고 완고한 머리를 보며 난정은 어떻게 테두리를 만들고 울타리를 쳐야 할지 난감했다. 

“온갖 분야를 읽는구나? 아아, 이 수필가 좋아하니? 아는 사이인데 한번 만나볼래? 이 식물도감은 뭐니? 아, 정원 가꾸려고 읽는 건가? 한국에도 정원 에세이스트가 필요하지. 아파트가 유행이라 아직은 아니지만, 곧 필요해질 거야. 미리 관련 공부를 하고 싶으면 말해라. 명준이가 너 집에 두는 거면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누굴 닮았는지. 제 아비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두 집 사이의 격한 내리막과 오르막은 가족들 사이에서 V자 협곡으로 불리곤 했는데, 심시선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락가락하며 난정의 서재 책등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다. 갑골문을 해석하려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우윤이 아프고 너희 둘 다 직장 그만뒀을 때, 나는 네가 돌아가고 명준이가 못할 줄 알았다. 그 반대로 일이 풀리다니 영 씁쓸했어. 그렇게 영특한 너랑, 심지라곤 하나도 없는 명준이랑……”

“그런 시대였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고요.”

자기 이름을 들었는지 명준이 작업실 문을 조용히 열고 나왔다. 눈짓으로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못 봤는지 모른 척하는지 작업실 문가에 기대어 섰을 뿐이었다. 도움이 안 되는 인간 같으니, 원망스러웠다. 

“뭐든 쓰렴. 출판사를 알아보자. 물론 내가 나서면 청탁처럼 되어버리니까 조심해야겠지만, 네가 누군지 말 안 하고 슬그머니 이런 원고가 있다고 가벼운 소개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니?”

“어머님…… 저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왜 그렇게 제 말을 튕겨내세요? 우윤이 아팠을 때 저희 경제적으로 지탱해주셨던 거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가 일하러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신경 써주시는 거 알고요. 그런데 전 읽는 걸 좋아하는 거지 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저는 어머님이 아니에요.”

“그렇게 많이 읽는데? 온갖 것에 대해 읽는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애벌레처럼 읽는 사람은 결국 쓰게 되는 거야.”

“애벌레……”

난정은 자신의 어지러운 서재를 돌아보며 바로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곧 반격할 거리를 생각해냈다. 

“그렇게 단언하시면 안 돼요.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고, 단언하는 사람은 쉬이 믿으면 안 된다고 어머님이 네번째 책에서 한 단원 분량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때 심시선이 지은 망연한 표정을 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자기 책을 인용해 반격한 며느리를 보고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어떻게든 뒤집어보려 애쓰다가 힘이 빠졌는지 애처롭게 난정의 독서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난정은 너무했나 싶었지만, 영역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엄마를 이기다니 대단하다. 유효한 전략을 발견했잖아?”

시어머니가 시무룩하게 돌아가고 나서, 희희낙락해하는 남편을 보며 난정은 어이가 없었다. 

“좀 도와주지, 뒤에 멀뚱멀뚱 서 있기나 하고.”

“내가 어떻게? 잘하던데, 뭐. 명혜 누나도 그렇게 못했을걸.”

착한 척하며 사실은 심지 없는 놈, 만날 ‘걔……?’ 하고 놀림 받아도 쌌다. 명준은 배우자의 야박한 평가에 굴하지 않고 누나들과 여동생에게 ‘유효한 전략’을 전파했고, 시어머니는 이내 자식들과 말다툼을 할 때마다 인용 공격을 당하며 머리를 싸매야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했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사실 잘 안 나. 너희 먹여 살리려고 그런 건데 이 배은망덕한 것들……”

“엄마가 재작년에 자식들에겐 절대 보상을 바라면 안 된다고 신문에 썼잖아.”

“시끄러워!”

가끔 그렇게 꽥 하고 성질을 부릴 때도 있었다. 언제나 교양인은 아니었다. 외국어도 잘하고 욕도 잘하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은 같은 능력일지도 몰랐다. 

아, 어머님 보고 싶네. 난정은 생각했다. 피곤할 때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싫지 않았다. 어떤 순간엔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관계였다. 


“하와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놀라서 높아진 목소리에, 멀리 가 있던 마음이 현재로 돌아왔다. 대화에 기계적으로 참여하는 버릇은 고치고 싶은 버릇이었다. 

“뭐, 가풍을 생각하면 보통의 제사는 아닐 것 같지만.”

묻는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자기도 가야 해?”

“우윤이가 올 거니까.”

난정의 말에 모임 친구들은 안쓰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자기 또 공항에서 울면 안 된다?”

“자신이 없네.”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딸을 만났고 그것은 이제 살면서 운이 좋아야 서른 번 남짓 더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윤이 돌아오기로 마음먹거나, 난정이 미국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울지 않을 수 있는 사람 있다면 그래보라고 해, 난정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지난번에 우윤을 만나러 갔을 때 트렁크에 두꺼운 책 여섯 권을 들고 갔더니 우윤이 절레절레하며 인터넷으로 주문해준 전자책 단말기를 박스에서 꺼냈을 때인 듯했다. 노안도 오는데 글씨 크기를 조절해가며 읽으면 좋을 테지만, 평소 난정은 정글 같은 서재에서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책을 우연히 고르는 것을 좋아해서 별로 사용하지 않았었다. 포장 겉면에는 천 권도 넘게 들어간다고 쓰여 있었다. 천 권과 함께라면 시누이들과의 여행도 견딜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