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미지는 텔레비전을 가로막고 서서 국자에게 전세계약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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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는 텔레비전을 가로막고 서서 국자에게 전세계약서를 내밀었다. 나 독립할래요. 독립 선언만 벌써 세번째였다. 국자가 말없이 미지를 응시했다. 미지는 국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2년 만의 복직 신청 후 그녀가 배정받은 학교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였다. 국자가 말했다.

안 보이는데.”

엄마, 이거 본방 보고, 재방도 봤지?”

.”

일단 나랑 얘기 좀 하면 안 돼?”

보고 나서.”

국자의 손에 들린 리모컨이 까닥였다. 비켜. 미지는 마지못해 물러났다. 드라마 주인공은 불우한 환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근근이 살아가던 중 갑자기 발현한 괴력 덕분에 1등급 기능력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사고에 휩쓸린 시민들을 도와주면서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반동 세력 수장의 위협으로 곤경에 처했다가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 친구의 남편이 별안간 마다가스카르에서 귀국하더니 주인공이 몰랐던 사실을 밝혔다. 바로 그를 내내 괴롭혔던 반동 세력 수장이 친아버지라는 것이다. 산으로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바다로 가라앉은 후 떠오르는 식의 전개였다. 실시간 채팅창이 혹평으로 도배되었으나 시청률은 매회 최고조를 달성했다.

아직도 영웅과 악당 놀이에 목을 매는지. 미지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능력 소지 여부와 국가 기능력직 업무에 적합한지 평가하는 다중능력검사는 선택제로 바뀐 지 오래였고, 능력이 있더라도 기능력직 공무원이 되지 않는 능력자들이 허다했다. 게다가 요즘은 능력자와 비능력자를 가르는 행위도 차별이라고 규탄받기 일쑤였다. 드라마는 옛날처럼 기능력직 공무원들을 통칭 영웅이라며 떠받드는 한편 기능력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은 능력자들을 반동이라고 싸잡아 불렀다. 저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드라마가 벌써 백 화 넘게 방영되었다니.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국자가 즐겨 보지만 않았다면 당장 방송심의위원회에 신고하고 싶었다.

엄마는 저런 게 좋아?”

재밌잖아. 웃어야 오래 산대.”

딱히 웃을 만한 장면은 아닌데. 미지는 의아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수장은 죄책감과 분노에 못 이겨 꽃병을 던지고 의자도 넘어뜨렸다. 그러더니 긴 대사를 줄줄 읊었다. 발음은 또렷했지만 툭툭 끊어지는 통에 영 어색했다. 이어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랬듯이 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카메라가 재빨리 클로즈업 샷을 잡았다. 그러나 시청자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시청자 게시판에 수장 역을 맡은 배우가 통화할 때 거꾸로 전화기를 들고 있다는 지적을 필두로 온갖 패러디와 합성 사진이 난무했다. 발연기라고 조롱이 쏟아지는 가운데 몇몇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며 옹호론을 펼쳤다. 최훈의 팬클럽은 그의 인권을 보호해달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최훈은 전업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1등급 기능력직 공무원으로 영웅이라 불렸다. 준수한 용모 덕분에 인기도 많아서 광고와 영화, 드라마까지 섭렵했다. 미지가 어릴 적 좋아했던 과자 광고에서 전속 모델로 나올 정도였다. 비록 날렵했던 콧대는 두툼해지고 배도 살짝 나왔으나 최훈은 오랫동안 만인의 영웅이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최훈처럼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최훈이 화면 속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국자가 명치에 뭐가 걸린 양 쿡쿡거렸다. 미지는 대체 국자의 웃음 포인트를 알 수 없었다. 다음 화 예고편이 나오자 국자가 기지개를 켰다.

점심 먹자.”

얘기한다며?”

점심 먹을 시간이잖아.”

얘기부터 하고 먹으면 안 돼?”

.”

국자의 뜻은 단호했다. 미지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국자의 등을 흘겨보았다. 국자는 삼시 세끼를 제때 맞춰 챙기는 사람이었다. 미지의 친구들은 식사를 마치고 과일이라도 먹으면서 오순도순 타협해보라고 조언했다. 점심시간 전후로 판결 형량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도 있었다. 포만감을 느낀 판사와 배심원들의 마음이 온화해져 선처로 기운다고 했다. 제법 그럴싸한 연구 결과였다. 다만 늘 예외가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불리한 쪽은 국자가 아니라 미지였다.

첫 독립 선언 당시 미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대학생이었다. 수도권에 살아도 통학하는 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친구 중 한 명이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글을 단톡방에 남겼을 때 미지는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공필수 과목의 수업시간도 대부분 오전이었다. 국자는 가만히 미지의 말을 듣다가 일단 저녁부터 먹자고 했다.

저녁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식욕을 당기는 불그스름한 양념에 은근한 불향까지 났다. 고슬고슬한 잡곡밥과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미지의 수저는 쉴새없이 움직였다. 국자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까지 떠다주면서 미지를 차근차근 얼렀다. 터무니없이 높은 월세, 보증금을 떼먹고 도망치는 집주인들, 자취하는 대학생들을 목표로 삼은 범죄며 높은 물가와 맞물려 식단이 부실해지면 앓을 수 있는 질병까지 들먹였다. 가령 미지가 먹고 있는 달걀말이만 해도 달걀뿐 아니라 소금, 식용유가 필요했다. 치즈나 김을 넣은 달걀말이는 아르바이트 월급으로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미지는 국자가 만든 치즈 달걀말이 하나를 얼른 입에 넣었다. 포기하자니 아까울 만큼 부드럽고 짭짤했다. 첫번째 독립 시도는 자발적인 포기로 끝났다.

두번째 독립 선언은 미지가 임용 고시를 준비할 때였다. 마침 친구가 노량진 근처 오피스텔에서 함께 동거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미지는 혹했다. 집에서 학원까지 오가는 시간이 아까웠거니와 출퇴근 전철에 끼여 다니는 것도 고역이었다. 미지는 친구와 월세나 집안일 분담까지 상의를 마쳤다. 임용 고시라는 그럴싸한 명분도 있으니 부모님 설득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반대했으나 국자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이내 어김없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화려한 밥상을 내놓았다.

김치찌개는 참을 수 있었다. 막 무친 새콤달콤한 겉절이에 따뜻하고 윤기가 도는 수육 앞에서 미지는 쪽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 그녀는 걸신들린 듯이 먹었다. 후식은 수정과였다. 국자가 수정과를 따르면서 몇 달 전 결성되었다는 반정부 능력자 조직이 극성이라고 운을 띄웠다. 물론 미지야 어릴 적부터 꾸준히 대피 훈련도 받았고 곳곳에 대피소도 많다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노라고 말했다. 실제로 반정부 능력자 조직은 꾸준히 나타났다. 기능력직 공무원들이 그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로나 건물이 파손되기도 했다. 더러 부상자가 나올 때도 있었으나 철저한 대피 훈련 덕분에 예전보다 인명 피해는 많이 감소한 편이었다.

문제는 이런 사태에 편승해서 이득을 보려는 이들이었다. 딱히 거센 충돌이나 과한 진압 작전이 아니라도 어떤 건물들은 골조만 남긴 채 무너지거나 옆 건물과 함께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부실 공사 때문이었다. 전면 수리나 재건축을 앞둔 세입자들은 쓰린 속을 움켜잡아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집주인들은 세입자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재난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운 나쁜 세입자들은 이중고에 시달렸다. 국자는 특히 노량진에 그런 건물이 많다고 넌지시 말했다. 두번째 독립 시도 역시 수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국자가 했던 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미지가 얼마든지 무시하거나 반박할 수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국자가 차린 밥상 앞에 앉으면 미지의 마음은 한없이 누그러졌다. 국과 찌개는 가슴을 치고 싶을 만큼 시원했고 밥에서는 감칠맛이 났다. 흔히 식당 반찬으로 나오는 멸치볶음이 깨소금을 뿌리고 견과류를 넣어도 짜고 눅눅해서 맛이 없다면, 국자가 만든 멸치볶음은 아무것도 안 넣었는데 짭조름하고 달콤했다. 밥도둑으로 치자면 대도였다.

미지는 식탁에 기대선 채 국자의 등을 주시했다. 국자는 지휘자 같았다. 반찬통에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덜거나 그릇에 달걀을 풀 때도 흐르듯이 움직였다. 이내 국자의 손이 냄비 뚜껑을 열었다. 미지는 눈앞이 아찔했다. 미역국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국이었다. 미역국에 참기름으로 볶은 쇠고기를 넣으면 진한 맛에 목 넘김이 부드러웠고, 굴이나 조개를 넣으면 시원하고 맑은 맛이 났다.

미지야, 간장 한 병 가져와.”

저 보증금도 내고 확정일자도 받았어요.”

식초도 떨어졌다.”

이제 못 물러요.” 국자는 대답하는 대신 도마에 파를 올려놓고 썰기 시작했다. 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지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 나갈 거예요.”

언제, 지금?”

아뇨. 그건 아니고……

입안에 고인 군침 때문인지 미지의 혀가 절로 꼬였다.

지금 나갈 거 아니면.” 국자가 말했다. “간장 좀 가져와.”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발코니는 화분과 식료품으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는 화분들 차지였다. 아빠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저녁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잎을 닦았다. 화분들이 어찌나 기세등등한지 천장까지 자라거나 발코니 문까지 가지를 뻗칠 정도였다. 그로 인해 집은 늘 어둡고 서늘했다. 남은 자리는 고추장과 식초 등 식료품이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당분간 걱정 없을 만큼 많았다. 미지는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간장 한 병을 집었다. 구부렸던 허리를 무심코 편 순간 나뭇가지가 그녀의 팔을 세차게 갈겼다. 마치 그녀가 불청객인 양 매서웠다. 그녀는 얼얼한 팔을 문지르며 발코니 문을 닫았다. 이 지긋지긋한 집도 이제 안녕이었다.

 

오늘도 식탁이 화려했다. 아몬드 가루와 튀김 가루를 반반 섞어서 튀긴 닭 날개와 다리, 윤기가 도는 가지 조림에 갈색으로 물든 무장아찌, 비트와 양배추로 새콤하게 담근 분홍색 피클이 가지런히 그릇에 담겨 있었다. 달걀지단과 무순, 살짝 익혀서 비린내를 없앤 당근을 채로 썰어 반투명한 무로 감싼 무쌈말이도 상큼해 보였다. 식탁에 빈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밥도 갓 지었는지 밥알 하나하나가 투명했다. 미지는 국자가 내미는 국그릇을 받았다. 굴을 넣고 끓인 미역국이었다. 굴 미역국이면 세 그릇은 족히 먹어야 성에 찼다.

먹자.”

학교가 멀고, 교통편도 불편해서 그래요.”

집은 어때?”

. 괜찮은 편이에요.” 미지가 정정했다. “좋아요.”

그녀는 몇 달 동안 방 구하기 카페와 부동산 중개 앱을 구경하고 인근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무수히 드나든 덕분에 제법 괜찮은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창이 난 빌라였다. 엘리베이터 없이 삼층까지 오르내려야 했으나 방이 두 개였고 주인의 인상도 좋았다. 재난 보험도 삼 년째 유지중이었고 등기부등본에도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근처 학교 선생님이라는 소리에 주인이 나서서 누수나 결로를 확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십 분 거리에 마트와 파출소도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건 거꾸로 붙어 있는 장미무늬 벽지였다. 왜 하필 저렇게 붙어 있지? 미지는 애써 무시했다. 찜찜했던 기분은 박미지,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박힌 계약서를 받자 사르르 풀렸다.

혼자 사니?”

. 시간이 있어야 뭐 누굴 만나든가 하죠.” 바로 지난달까지 휴직 기간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좀 초라한 변명이기는 했다. 미지는 재빨리 덧붙였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일 년 더 되지 않았나?”

아닌데요.”

국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는데…… 미지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그래. 결혼할 사람 생기면 데려와도 돼.”

결혼 안 할 수도 있잖아요.”

맘대로 해라. 국 더 줄까?”

. 나 진짜로 나가도 되는 거 맞죠?”

그러라니까.”

예상한 것보다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미지는 국자를 힐끔거렸다. 국자는 이전처럼 설득하고 회유하기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하고 대답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야. 미지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는 곧 있으면 서른이었고 친구들도 대부분 집에서 독립하거나, 결혼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그럼 요리 좀 가르쳐줘요. 일단 이 미역국.”

인터넷 찾아봐.”

아니, 엄마. 그렇게 해결될 문제였으면……미지는 열다섯번째 어버이날 기념으로 끓였던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인터넷에 나온 조리법대로 만들었으나 국물은 김치를 헹군 물처럼 밍밍했고 푹 끓인 김치도 왠지 뻣뻣해서 가위로도 잘리지 않았다. 아빠가 시작이 반이라며 칭찬했으나 정작 한 그릇도 다 비우지 못했다. 국자는 아예 입도 대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하는데요?”

물 끓으면 미역 넣어서 푹 끓여.”

된장찌개는 된장 넣고 끓이고 파전은 파를 반죽에 넣고 부치면 되겠네.”

미지는 요리 박사가 되느니 사 먹기로 했다. 국자의 대답은 늘 짧았다. 조리법에 관해서 대답할 때는 더 짧고 두루뭉술했다. 미지가 질풍노도 같은 사춘기였을 때도 국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보통은 딸이 말을 안 해서 엄마가 안달을 낸다던데, 미지와 국자는 반대였다. 우리집은 왜 이러냐고 말하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빤했다. 그럴 수도 있지. 덕분에 미지의 사춘기는 무탈하게 지나갔다.

김치 새로 꺼냈어. 먹어봐.”

국자의 젓가락이 김치를 가리켰다. 미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배추 고유의 단맛과 매콤한 양념이 한데 어우러져 알싸했다. 국자가 직접 담근 김치였다. 그녀의 김치는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쉬기도 전에 다 바닥이 나곤 했다. 매년 김치를 백 포기 넘게 담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김치를 미리 한 통 빼놓지 않으면 국자가 끓여주는 시원한 묵은지 찜이나 찌개도 먹을 수 없었다. 바깥에서 접한 김치들은 식감이 너무 흐물거리거나 뻣뻣했고 맛은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만큼 맨송맨송하거나 매웠다. 미지는 차라리 국자에게 김치 한 통만 달라고 할지 고민했다. 그렇지만 집에서 먹을 김치도 부족한데, 한 통 달라고 하자니 좀 계면쩍었다. 자칫하면 국자가 미지더러 그냥 집에서 먹으라고 설득하려 들지도 몰랐다. 세번째 독립마저 실패할 수는 없었다.

필요한 건 없나, 세탁기는?”

있어요.”

냉장고는?”

엄마, 요즘은 그런 거 옵션으로 다 있어.”

전자레인지는?”

그건 혜수가 해준대.”

가출한 애.” 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하고는 잘 지낸대?”

잘 지내겠지. 미지는 대답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국자가 집에 들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국자의 친구 경남과 은수 삼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다였다. 아빠도 친구나 직장 동료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미지의 친구들이 놀러오면 국자는 용돈을 주면서 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개중 몇 명이 호기롭게 방으로 들어가도 오랜 시간 머무르는 일은 드물었다. 국자는 무조건 식사시간 전에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조별 과제라고 핑계를 대면 탕수육이나 피자를 시켜주었다. 직접 만들어놓은 간식이 냉장고에 떡하니 있어도 호불호가 갈릴 거라며 막았다.

딱 한 번 미지의 성화에 못 이겨 떡볶이를 만들어준 적은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떡볶이 떡 대신 넓적한 떡국용 떡에 고추장만 넣고 휘휘 저어서 대충 비빈 모양새였다. 어묵이나 튀김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 초라한 떡볶이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하굣길에 샀던 프랜차이즈 감자튀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미지는 친구들이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다.

혜수가 아니었더라면 미지는 국자의 요리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 줄 몰랐을 터였다. 국자가 제대로 만든 요리를 먹어본 친구는 혜수가 유일했다. 국자는 가출한 혜수를 선선히 집에 들였다. 미지는 행복했다. 가장 친한 혜수와 등하교를 함께하고 수다를 떠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가능하면 평생토록 함께 살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가출은 단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혜수가 먼저 부모님과 화해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미지는 실망했다. 며칠만이라도 더 머무르라고 꼬드겼으나 혜수는 되레 그녀에게 국자의 김치 비법을 물었다. 그 김치면 라면 두 그릇은 족히 먹겠어.

십대 미지는 아직 포기하는 법을 몰랐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국자가 자신의 비법을 숨기는 줄로만 알았다. 국자의 환심을 사겠답시고 손톱 밑에서 큼큼한 냄새가 날 때까지 시래기를 다듬었고 손가락이 시큰거려도 이쑤시개로 열심히 매실 꼭지를 따기도 했다. 그러나 국자의 답은 늘 같았다. 정성. 미지는 답답한 마음에 국자를 다그쳤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김치를 다 발로 담그게? 국자는 웃지도 않고 되물었다. 발로 어떻게 김치를 담가?

미지가 기대했던 비법은 몇 년 묵은 태양초 고추장이나 고산지대에서 이슬을 맞고 자란 배추, 태안 앞바다에서 공수한 소금이나 아직도 파닥거리며 살아 있는 생새우라든지 며칠 동안 보릿짚에 재운 새우젓처럼 거창한 재료였다. 국자의 김치 담그는 법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조리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답은 하나였다. 손맛. 미지는 친구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 식탁에서 깨달았다. 친구가 입이 닳도록 자랑했던 동태찌개나 고시히카리 쌀로 만들었다는 밥도 딱히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반찬도 너무 짜거나 달고 기름졌다. 미지가 깨작거리는 동안 친구는 맛있게 먹었다. 친구 어머니가 미지에게 입에 안 맞냐고 묻자 친구가 대신 대답했다. , 얘가 원래 입이 짧아. 그날 미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펐다.

 

국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 더 줄까. 미지는 국그릇을 내밀었다. 어차피 한 그릇 더 먹을 생각이긴 했다. 굴 미역국을 두 그릇만 먹자니 아쉬웠다. 국에 밥 반 공기만 말아먹고 식사를 마치기로 했다. “이사는 언제 해?”

다음주 금요일이요.”

“3? 네 아빠는 제주도에서 4일에 오는데.”

친구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미지는 아빠의 출장 일정을 일찌감치 파악해둔 터였다. 성공적인 독립을 위한 초석이었다. “아빠한테 말 좀 잘해줘요.”

서운해하겠네.”

보나 마나지. 삐지겠죠.”

아빠는 툭하면 삐졌다. 말없이 방문을 닫거나 잘 주무시라는 인사를 빼먹었다고 토라지곤 했다. 앞선 두 번의 독립 선언이 실패했을 때도 아빠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미지의 말에 툭툭 딴지를 걸었다.

아빠는 자식이 너 하나뿐이잖아.”

미지 역시 아빠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혹시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독립하는 순간 자신이 늙고 무기력해질까 두려운 게 아닐까? 딸이 혼자서 생활하느라 겪을 고난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심리학 관련 책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아빠에 대한 짜증과 분노를 애틋한 마음으로 승화하려고 애썼다. 정작 아빠는 대화 도중 말문이 막히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방문을 두드리며 제발 좀 얘기하자고 간청하는 쪽은 미지였다.

외동딸에 관한 세간의 편견과 달리 미지는 무엇이든 가지고 싶은 대로 다 가진 적도 없었거니와 안 되는 일에 울면서 떼를 쓴 적도 없었다. 국자는 미지가 바닥에 드러누워도 가만히 팔짱을 끼고 관망할 터였다. 아빠는? 아빠는 고집을 꺾어본 적이 없었다. 미지도 더는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가 삐져도 더는 집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미지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내가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잖아요. 아빠도 이제 딸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셔야지.”

네 아빠도 알지.”

알고 있다니 너무 다행이네. 두 분 다 이제 여행도 다니고 재밌게 사세요.”

안 돼. 아직 둘 다 일하니까.”

엄마는 봉사활동이잖아.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좀 쉬엄쉬엄해. 돈 받는 일도 아닌데.”

미지가 대학교에 합격한 뒤로 국자는 오전 열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성당 마당부터 역 앞까지 장소는 매달 바뀌었고 배식 인원은 줄어들기는커녕 나날이 늘어났다. 국이나 반찬을 나눠주는 것도 모자라 직접 재료를 고르고 사서 다듬은 후 만든다고 했다. 국자는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한 번도 봉사활동을 빠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손목 인대가 늘어난 날에도 기어코 깁스를 차고 갔다.

돈 받는데.”

차라리 내가 용돈을 줄게.”

대타도 없어.”

봉사활동에 무슨 대타야.”

밥 더 가져다 먹어.” 국자가 반찬통을 가져오더니 가지 조림을 더 덜었다. “다른 반찬도 먹을래?”

경남 아줌마는 대체 뭐하는 거야? 저번에 보니까 한가하던데. 엄마만 일하고.”

걔는 요리를 못하잖아. 다른 일 해.”

미지는 차마 경남 아줌마가 끓여줬던 라면맛을 잊지 못했다. 퉁퉁 불어터진 면은 라면이 아니라 우동에 가까웠고, 국물은 홍수라도 난 양 그릇 가장자리에 찰랑거릴 정도였는데 맛은 혀가 쓰릴 정도로 짰다. 심지어 미지에게 맛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아직 어렸던 미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요리에 문외한인 사람이 왜 하고많은 봉사활동 중 무료 급식소를 선택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국자가 결국 그 뒤치다꺼리는 다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좀 쉬었다가 해. 휴가라고 생각하고.”

휴가는 허가를 잘 안 내줘.”

아니, 봉사활동 잠깐 쉬겠다는데 무슨 허가가 필요해?”

복잡해.”

국자는 딱 잘라 대답했다. 미지는 어렸을 적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국자의 장점은 책임감이고, 단점도 책임감이라고 했다. 미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점이 어떻게 단점이 될 수 있지? 책임감은 보통 칭찬할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이제 그녀는 할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책임질 수 있는 일에 책임감을 지니는 건 좋았다. 하지만 모든 일을 책임질 수는 없었고,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지려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자만이기도 하지. 미지는 생각했다.

엄마를 대신할 사람이 없겠어? 음식 만들고 나르는 건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거야. 그냥 모르는 척해.”

안 돼.”

?”

영웅이라 그래.” 국자의 손가락이 미지의 밥그릇을 가리켰다. “더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