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연인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한동안 베를린 집에서 홀로 지내게 된 나는 어느 날 순전한 호기심과 충동으로, 소파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책장의 가장 아래 칸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소파를 치우자 먼지가 덮인 책들이 나타났다. 마르코폴로 여행안내서, 심농 추리소설, 지나간 심포지엄이나 행사용 자료,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장 주네, 폴 볼스 등의 책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뒤라스의 『연인』을 발견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일평생 단 하나의 헌책방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그의 서재 세 곳은 책으로 가득하며, 그때그때의 운명과 우연에 따라, 여행과 체류 계획에 따라 각 서재의 책들을 재배치하는 일이 그의 커다란 열정이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싣고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떠난다. 어디로 떠나더라도 여행가방에는 다른 물건은 거의 없이 오직 책이 가득하다. 그의 여행가방은 그 자체로 작은 도서관이다. 명목상으로는 여행중에 읽게 될 책들, 하지만 대부분은 읽는다는 직접적인 필요보다 여행의 장소에 어울린다고, 그러므로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느끼는 책들이다. 그 책들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갈 여행지에 이미 머물렀던 작가들의 작품, 그들이 그곳에서 작업한, 작업했다고 알려진 책들, 그리고 그 작가들의 인터뷰 필름, 오슨 웰스가 그 장소에서 찍은 영화, 지금과는 다른 시대의 예술과 문학과 작가와 영화, 그리고 그런 책과 영화에 관한, 그들의 시대에 관한 다른 저자들의 책들…… 그의 여행가방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충분히클 수가 없다. 헌책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경우,  책을 이미 갖고 있다 할지라도 또다시 구입하는 데 그는 주저함이 없다. 붉은 뺨의 청년이 1972년에 구입한 책과 이후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 21세기에 다시 발견한 책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권을 이 서재에, 다른 한 권을 다른 서재로 옮겨놓기 위하여 기꺼이 여행을 떠난다. 놀랍게도 나는 일생 동안 그런 사람을 몇몇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끌렸고 그들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책과 여행가방으로 대표되는 어느 한 세대의 마지막을 살았던 사람들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헌책방이 아닌 대형 서점은 거의 출입하지 않는데, 일단 책값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근본적으로는 새로 출간된 신간, 베스트셀러, 이런저런 화제성이 큰 책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시간대의 지층이 없이 오직 리얼타임의 사물들만이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쇄신된다. 우리는 산책길에 서점 진열장에 전시된 시대의 영혼을 구경한다. 그리고 산책을 계속한다. 신간을 사야 할 경우 그는 동네의 단골 책방에서 주문을 한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킨들을 선물해주었는데, 전자책이 도서관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고난의 여행에서 그를 해방시켜주리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킨들을 활용하긴 했으나 여행가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여행가방 가득히 자신의 시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간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뒤라스의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 자크 아노 필름의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독일의 책은 한국과 달리 번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드러나지 않는다. 설사 번역자가 작가보다 유명하다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책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이 책을 오래전 대학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읽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 번역자인 R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내가 자신의 번역인 『연인』을 읽고 있다니 무척 기쁘다고, 그 작품은 물론 원문인 프랑스어로 읽는 것이 가장 아름답지만, 그래도 원본 텍스트의 소리와 리듬을 재현하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것들이 결핍된다면 책은 결코 원래의 모습일 수 없기 때문에. 아노의 영화는 그 작품에서 언어와 시poetry가 빠졌을 때 문학의 줄거리가 얼마나 쉽게 포르노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나는 연인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내가 『연인』을 읽고 있는 이 집은 오직 서가이다. 사방의 벽뿐 아니라 그 이상의 공간이 책과 필름, 음반으로 이루어진 장소이다. 나는 화집과 필름 관련 책들이 꽂힌 책장 앞 간신히 마련한 빈자리에 매트리스를 놓고 잠든다. 내 머리맡에는 파솔리니와 데릭 저먼 관련 책이 가득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나는 독일 작가나 문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이 집의 서가는 내게 거대한 카오스 자체로 보였다. 나는 손이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한 권의 책을 꺼내서 살펴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다시 다른 자리에 꽂아놓곤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 서가에 내가 모르는 모종의 질서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책장 앞쪽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에서 구한 토기 인형들이 있는데, 책을 빼내면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대다수는 망가지고 부서진 상태이다. 떨어져나간 팔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여신 칼리 인형이 있는 자리는 힌두신화에 관한 책들 앞이다.

방뿐만 아니라 복도에도 천장까지 책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서 책을 꺼내려면 마치 헌책방에서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한다. 길게 내려온 천장 조명이 비치지 않는 높은 곳의 책을 찾으려면 헤드랜턴이 필요하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아주 이른 나이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일생 동안 책뿐 아니라 일기와 메모, 편지, 엽서, 타이프라이터로 쓴 수천 장의 원고들, 작업을 위한 스케치와 콜라주를 모아두었는데 그것들은 방을 넘어서 주방과 욕실까지 차지하고 있다. 선반에 놓인 그런 수십 년 된 낡은 원고나 그림들을 나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오래 묵은 먼지와 긴 세월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종종 그가 이 혼돈스러워 보이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책들을 찾아내줄 때마다 나는 감탄한다. 하지만 그에게 아프리카에 관한 책이 읽고 싶어라고 말하면 안 된다. “파솔리니와 연관해서 아프리카 여행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참고로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줘라고 해야 한다.

이 집의 우선적인 점유자는 사람이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책과 원고와 자료, 영화필름이며 그 밖의 일상의 사물은 모두 임시이고 부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집은 마치 그의 여행가방과도 같다. 예외라고 한다면 덩치가 커다란 두 개의 사기 난로이다. 하나는 초록색이고 하나는 버터색이다. 석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의 유물이고 라디에이터 난방이 설치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난로 화덕 안에는 사진과 앨범, 편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나는 난로를 옷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옷장이 필요할 만큼 많은 옷을 갖고 있지 않다. 사용하지 않는 난로는 매혹적인 면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집 외부로 연결된 난로의 연통에서 휘파람이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온다.

책상. 내가 처음에 왔을 때 집에는 이미 책상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주로 필름 작업에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탠딩 책상인데 그 위와 아래에도 이미 책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주방의 작은 식탁을 서가로 옮겼지만 그곳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온갖 우편물과 서점의 팸플릿, 종이 더미와 책으로 점령당했다. 우리는 지난가을 중고 가구상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상을 구입했고, 그것을 서가 창가에 놓았다. 양쪽 가장자리를 날개처럼 펼쳐서 넓힐 수 있는 형태의 책상이다. 마침내 나는 책상을 내 세계로 만든다. 그동안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내 책과 연필들, 편지, 서류와 자료들을 책상으로 옮겼다. 읽고 있는 책들과 아직 읽지 않은 책들, 잠시 관심을 갖고는 있으나 어쩌면 영영 읽지 않게 될 책들이 책상 위에 있다. 또한 이미 다 읽은 책들, 그러나 거기 계속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놓인 책들이 있다. 내 글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야 할 책들이기 때문이다. 책들의 산은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고 점점 높아지기만 한다. 나는 책상 위에 독서대를 두고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화집의 한 페이지를 펼쳐놓는 습관이 있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에드워드 호퍼가 있다. <Night Windows>, 1928. 호퍼의 그림 위에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작은 사진 한 장을 클립으로 부착해놓았다. 잡지에서 오려낸 후고 발의 다다이즘 공연 장면이다. 우리는 매일 차를 한 주전자 끓여서 책상 위에 둔다. 그 밖에도 책상 위는 두세 개의 커피잔, 치우지 않은 빵 접시, 연필이 가득찬 컵 두 개, 서가 주인의 필수품인 연필깎이와 가위, 굴러다니는 레몬 반쪽, 카메라 등이 늘 차지한 상태라서 원래의 용도인 글을 쓸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식사시간이면 그곳은 자연스럽게 식탁의 용도를 추가한다. 우리는 물건들을 최대한 한쪽으로 밀어내고 밥을 먹는다. 그는 책상에 식탁보를 깔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원래의 아름다운 짙은 밤색 색상을 천으로 덮고 싶지 않았다. 그의 우려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컵과 쏟아진 음료 등으로 책상에는 얼룩이 생겼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날씨가 좋을 때면 손바닥만한 발코니에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집에서 햇살이 최대로 비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발코니에 작은 정원용 탁자와 소파를 갖다놓고 거기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겨울 내내, 그는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 털모자로 무장한 채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쓰고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그의 고향집에는 놀랍게도 실내가 아니라 집에 딸린 작은 호숫가에 나무 판자로 간이 테라스를 만들고 거기에 책상과 벤치를 고정해 놓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그 자리에서 글을 썼고, 그것이 그의 글쓰기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도 고향에서 머물 때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 자리에서 한밤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글쓰기를 좋아한다. 여름에는 글을 쓰다가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판자 테라스에서 그대로 잠들기도 한다고 했다. 안개가 짙던 어느 날 그는 호숫가에 불을 피우고 불붙은 장작 하나를 든 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수면에 비치는 불의 그림자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썼다.

언젠가 나는 라디오에서 누군가가 오스트리아 작가인 FM의 집을 묘사하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엄청난 혼돈이었죠. 원고와 책이 사방에 가득 쌓여 있었어요. 사실 그녀의 집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는데, 방문자들은 아무도 피아노를 보지 못했을 정도랍니다……

우리의 베를린 집은 그 정도로 극심하게 해체적이지는 않다. 그랜드피아노를 볼 수 없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우리에게는 정말로 그랜드피아노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트램펄린이 있다. 그런데 트램펄린을 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위에 쌓인 책더미를 먼저 치워야 한다. 취리히에 있는 R의 집에도 서가 한가운데 그랜드피아노가 있지만 피아노 주변을 둘러싼 삼면의 책장에 반듯하게 꽂힌 책들은, 마치 개인 도서관처럼, 저자의 알파벳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 집을 방문할 때마다 피아노와 책장 사이의 공간을 마치 박물관에서처럼 이동하며 책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림들이 걸려 있는 R의 서재는 작은 갤러리와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R은 화가 친구들이 많았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 차와 초콜릿을 내왔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메일을 출력해서 발신자별로 상자에 보관해둔다고 말했다. 가늘고 마른 몸매의 그녀는 대개 우아한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고 은발의 머리는 염색하지 않는다. 그녀 서재의 창밖으로는 멀리 호수 건너편 취리히 인근의 산들이 보였다.

 

작가의 작업실은 그의 글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을까. 이것은 종종 내 흥미를 자극한다. 우리의 베를린 집은, 우리의 여름 피난처인 정원 오두막은, 우리의 양식은, 물질에서나 영혼에서나, 시민적이지 않다.

내가 공간의 부족을 불평하면 그는 책들을 다른 서가로 옮겨보겠노라고 말하지만, 그리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서가의 책들을 또다시 어딘가로─아마도 이곳 베를린으로─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기를, 지하의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원 오두막에서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두막은 난방시설이 없고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야 하므로 겨울에는 거주가 불가능하다. 펌프는 자주 고장이 나고, 고장나 있을 때가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더 길다. 보통 매년 부활절 휴가가 끝날 즈음에 오두막으로 들어가고, 한번 오두막에 들어가면 시내에 볼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베를린으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곳 정원과 테라스에서 최대한 오래 머문다.

하지만 여름 정원의 오두막은 고향집과 더불어 그의 또다른 서가이기도 하다. 어느 해 그는 정원에 관한 책들을 모두 모아 오두막 서가로 옮겼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런 종류를 정원문학이라는 장르로 부르고 있다. 오두막 책상은 이집트의 신상들로 가득했다. 나는 담배와 수백자루의 연필과 화집과 책들과 정원용 가위와 장갑과 말라죽은 로우더덴드런 가지가 꽂힌 화병과 쥐덫과 양초와 털양말을 옆으로 치우고 글을 썼다. 전염병이 지속되는 긴 시간 동안 그는 테라스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크릴물감 튜브가 산을 이루었다. 해가 지면 나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추리소설을 읽었다. 그늘진 정원은 싸늘했고 우리는 불을 피웠다. 그곳에서 나는 말 그대로 시간이 정지되는 체험을 했다. 오직 빛과 어둠이, 너울대는 불꽃이, 투야나무 울타리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저녁의 기나긴 황혼이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베를린에서, 나는 『연인』을 읽는다. 그리고 예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디테일을, 주인공이 살던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페스트가 돌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내게 즉시 소설 『베니스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책 역시 콜레라가 엄습한 베니스의 골목길이 등장하며 주인공은 콜레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또다른 작품을 연상시키는 방식은 독자 개인의 독서 경험에 기반한 우연이다. 예를 들면 나는 예전에 뒤라스의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읽는 순간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욕망』이 떠올랐다. 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소설 속의 두 여성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두 작품의 언어와 톤이 그토록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파동을 이룬다.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내면화하는 읽기이다. 내용뿐 아니라 언어에서도.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에서도. 한 소설의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소설 밖으로 걸어나간 후, 다음 순간 그녀는 다른 소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다.

 

언젠가 우리가 베를린을 떠난다면.

얼마 전부터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종종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으로 대화를 나눈다. 새로운 법령의 발표로 조만간 여름 정원 오두막의 체류가 불확실해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오두막에서 은둔할 수 없다면,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고 우체부도 방문객도 없는 그곳에서 살 수 없다면, 우리가 베를린에서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은둔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니다. 은둔할 수 없다면, 여행이 아니다. 베를린은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이다. 내가 그것과 비로소 만난 도시이다. 베를린은 그것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젠가 베를린을 떠날 수 있기를 남몰래 소망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베를린에 올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 베를린을 영영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 두고 온 가방이 있더라도*

베를린에 죽은 자를 두고 왔더라도**

그리고 베를린에서 연인과 재회했다 할지라도.

 



*Ich hab’ noch einen Koffer in Berlin,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노래 제목.

**Ich hab noch einen Toten in Berlin, 울프 미헤의 추리소설 제목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