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무도회

마침내 이심이 무도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같은 팀 동료들은 입을 모아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말했다. 옷은 어떻게 입고 가는 게 일반적이냐는 질문은 웃음을 샀다.

그런 고민은 잘 보여야 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이선생은 가서 무슨 기준으로 골라볼까, 그 고민이나 하세요.”

팀장은 가정의학과 전공의라는 직업이 적힌 접수증을 달고 무도회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왕관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며 이심의 어깨를 두드리고 갔다. 한동안 무도회에 탐닉하던 박선생은 일부러 가장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골라서 입고 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마치 절세 미녀가 된 것처럼 주목받는 느낌이 짜릿했지만 가족 구성은 보류한 상태였다. 아직은 원가족과 사는 삶이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선생은 자신도 무도회를 경험해보고 싶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의대 재학중에 결혼을 감행하다니 도대체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재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제각각이었으나 어찌됐든 왕진 2팀을 이루는 다섯 명 중 세 명은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집합가족에 편입한 최선생은 이심과 같은 동네에 살며 비교적 가까이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묘하게 말을 아꼈다. 오직 딸인 선민에 관해 얘기할 때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도회가 열리기 전날 밤에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최선생은 우리 선민이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말이야.” 하고 입을 열었다.

이선생 애 생각은 아예 없었던가?”

그럴걸요.”

애매한 대답을 내뱉으면서 이심은 자신이 집합가족 편입을 고려하면서 그 문제를 제대로 고민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접 낳아 키울 마음이 없다는 점은 명확했다. 그렇다고 해도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사는 일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었다. 물론 정반대로 그런 짐작이 섣부른 것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었다.

애들 볼 일이 잘 없으니까 그런지 감이 안 오네요.”

난 추천. 우리 선민이처럼 희망을 주는 애를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최선생의 어투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럼, 이런 사람이 있으면 끌리겠다 싶은 타입은 있어?”

글쎄요, 결국은 오순도순 같이 세금 나눠 낼 사람들 구하려고 가는 거죠.”

가기 전부터 왜 이래, 재미없게.”

가끔 체온을 좀 올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기야 하겠네요.”

그럼, 체온이야말로 또, 면역력의 지표 아니겠니?” 최선생은 유쾌하게 웃더니 일단 무도회장에 입장하고 나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강조하는 다자 연애 그룹 가족이 제일 눈에 띄기는 할 거라고 귀띔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무도회장까지 가는 길을 한번 더 확인한 후에 이심은 난방 온도를 1도 올리는 것과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지금보다는 따듯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환경. 내일 만나는 가족들을 살필 때 그 점을 첫번째로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 위에 눕자마자 습관처럼 화살표 게임을 실행시켰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쓴 데이터의 사용량을 체크하지 않은 것이었다. 곧 독신세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음미하며 평소보다 오래 게임을 한 탓이었을까. 첫 무도회 당일에 이심은 늦잠을 잤다. 그리하여 별수없이 전날 출근하며 입었던 옷을 그대로 꿰어 입고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12월에 접어들었지만 잠시 봄볕을 빌려온 양 포근한 날씨였다. 역까지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뱄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패딩 점퍼를 벗고 자리에 앉자 펑퍼짐한 면바지 위에 난 주름이 눈에 띄었다. 미색 면 셔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심은 조금 겸연쩍어졌다. 이래서야 의도적으로 형편없는 옷차림을 골랐다던 박선생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곱씹는 것처럼 무용한 것은 없었다. 이심은 일정표와 실내 배치도를 점검하기 위해 메이드의 홀로그램 프레임을 띄우고 네온 컬러로 반짝이는 웹자보를 클릭했다.

 

혈연의 제약을 벗어던진 애착의 공동체

집합가족의 일원이 되어보세요!

 

한 시간 남짓이라는 1티타임에는 가능한 한 많은 가족과 통성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두세 가족으로 후보를 좁힌 후, 2부에는 눈여겨보게 된 가족을 더 구체적으로 탐색해보기로 했다. 이심은 바 카운터가 연회장 안쪽 벽에 면해 있다는 사실도 체크했다. 칵테일을 마실 기회는 흔치 않으므로 2부에는 줄을 서더라도 두세 잔쯤 즐기는 일도 빠뜨리지 말자고 가볍게 다짐하며 지하철역 출구로 나갔다.

연회장 앞에 다다른 이심은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긴장되는 일을 치르기 전에는 맹수를 떠올리며 몸을 크게 만들어보라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초등학생 때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엄마가 그보다 더 일찍, 어린이집에 다니던 때부터 강조했던 것은 숱한 사람이 만졌을 문고리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직접 손으로 누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심은 오른쪽 어깨로 연회장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참여자 대부분은 이미 입장을 마친 듯 접수대는 한산했다.

“1인 참석이시네요. 환영합니다, 선생님. 최적의 가족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랄게요.”

스태프가 건넨 이름표는 손바닥 반만한 이면지를 코팅하여 옷핀을 부착한 것으로 이름과 직업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숨겼다가 인사를 한 뒤에 꺼내 보이면 더 드라마틱한 결과를 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심은 그런 장난을 떠올렸지만 주최측에서 정한 규칙대로 접수증을 왼쪽 가슴 위에 달았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저마다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 앞에서 철저히 연습을 마친 듯 정중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심은 그들의 손에 들린 잔을 보고서야 준비물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챙긴 기억이 아예 없으니 가방 속을 살펴볼 필요도 없었고, 따라서 환경부담금을 추가로 내거나 음료 일체를 포기해야 했다. 입장료를 반쯤 날렸다 허탈해하던 그 순간, 한 남자가 이심에게 말을 걸었다.

원하시는 음료가 있으신가요, 선생님? 말씀만 하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이십대 중반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의 이름표에는 청명이라고, 직업란에는 이벤트 기획자라고 쓰여 있었다. 올이 굵은 잿빛 니트 스웨터는 언뜻 보아도 낡은 것이었지만 그 점이 외려 그의 말간 피부톤과 실팍한 어깨를 돋보이게 했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을 때 이마에서 콧날로 이어지는 선을 바라보며 이심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조각 같다는 비유를 처음으로 사용한 어떤 인류는 그와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을 마주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제가 컵을 챙겨 오는 걸 깜빡했어요.”

이런 게 인연이군요. 마침 저희는 여분을 챙겨 왔거든요. 리키! 은혜 데리고 이쪽으로 와 봐.”

청명은 자기 가족들을 부르더니 손에 든 잔을 가리키며 더 가져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와서 이심 앞에 선 리키는 밀크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피부에 키가 족히 190cm은 되어 보였다. 턱선을 조금 넘는 길이의 곱슬머리는 살짝 말아쥐었다 놓은 듯한 모양으로 느슨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묶여 있었다. 이심은 어릴 적 엄마를 따라 갔던 미용실에서 본 패션 잡지 속 청바지나 향수의 모델을 떠올렸다.

리키라고 합니다. 진범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고요. 편한 쪽으로 불러주세요, 선생님.” 그는 이심의 접수증으로 향했던 시선을 재빨리 얼굴 쪽으로 끌어올리며 투명한 멜라민 잔을 건넸다. “아무도 입을 대지 않은 새 잔이고, 녹차 안에는 저희 가족의 애정이 듬뿍 담겼답니다.”

거기에 특별한 향신료도 첨가됐고요.” 풀빛 슬립 드레스 위에 얇은 재킷을 걸쳐 입은 은혜가 검지로 연회장의 천장 쪽을 찌르듯 가리키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여기는 전에 교회로 쓰이던 건물이거든요. 그러니까 경건하고 영적인 어떤 거, 아니면 뭔가 배덕한 게 섞여 들어갔을 거예요.”

그렇군요.” 이심이 웃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그 둘은 상반되는 개념 같은데요?”

맞아요. 그러니까 둘 중에 어느 쪽을 원하시는지 저희한테만 살짝 알려주세요. 선생님이 진짜 원하시는 걸요.”

은혜의 말이 큐 사인이라도 되는 양 리키가 오른쪽 눈썹을 찡긋거리더니 이심과 눈을 맞췄다. 이심은 미지근한 차를 한 모금 천천히 마신 다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일단 제가 원하는 녹차의 맛은 이거보다는 좀더 진한 것 같네요.”

셋은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양 웃음을 터뜨리더니 빈말은 못하는 분 같다고 추켜세웠다. 키가 가장 큰 리키를 가운데 두고 선 그들의 모습은 꽃다발을 연상시켰다.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공공 의료 센터의 좁은 사무실에서 원격으로 진료를 볼 때든, 일주일에 사흘 왕진에 나서 직접 환자를 상대할 때든 이심이 주로 만나게 되는 사람은 노인들이었다. 발작적인 기침과 만성 통증에 지친 이들을 쉼없이 상대하다보면 이 도시 자체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세금을 부담할 인구가 적으니 세율이 높은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지난 삼 년간 매해 가파르게 인상되는 독신세를 부담하면서도 가급적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애써오기도 했다. 그랬건만 무도회에 발을 들이자마자 젊음과 미모로 반짝이는 무리가 다가와 만면에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성적 취향에 관한 암시가 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기도 쉽지 않네요.” 이심이 말했다. “방금만 해도 세 분에게 상당히 실례되는 생각이 들어서요.”

다시금 유쾌한 웃음이 번지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굳은 것은 그들 뒤를 서성이던 한 남성 때문이었다. 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깍듯한 어투로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하며 이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은혜는 경계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리키는 아직 자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니 차례를 기다려달라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리키의 몸에 가려서 이심은 남자의 이름이나 직업을 확인하지 못했다.

멈췄던 대화가 재개되자마자 은혜는 오늘 셋이 참석했지만 자기들 가족은 총 일곱 명이라며 몇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서른한 살인 자신 외에는 이십대인데다가 모두 당장은 의료 바우처를 써야 할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강조했다. 리키는 은혜의 진지한 태도가 부담스럽게 비칠까 걱정된다는 듯 그녀가 말하는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오른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아침잠이 없는 편인 자기를 매일 아침마다 알람으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인종 배경이 된 곳의 언어로 깨워줄 수 있다며 그는 스페인어와 오키나와어, 제주 방언으로 아침 인사를 읊었다.

리키, 나 얘기 좀 마저 하게 해줘.” 은혜가 부드럽게 눈짓을 보내자 리키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세요, 선생님. 이런 점도 저희 가족의 장점이에요.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 습관이 붙었다니까요. 무엇이든 똑같이 나눠주겠다는 얘기만 하는 정치인들하고도 다르고, 실리적인 이유 아니면 모이지 않았을 다른 집합가족하고도 달라요. 게다가 리키는 잘 깨워주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손이 빨라서 뚝딱뚝딱 아침도 해준다니까요.”

이심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그들 가족의 사진을 살폈다. 오늘 참석하지 않은 사람 중 두세 명 정도는 비교적 평범한 외모로 보였다. 사진이 찍힌 곳은 그 집의 거실 겸 부엌이었고 이심이 기대하는 집에 비하면 좁은 것 같았다. 리키와 청명이 둘의 방에서 찍은 사진은 더 적나라하게 집의 규모를 드러냈다. 막 잠에서 깬 듯 나른해 보이는 둘이 누워 있는 방은 용케도 두 개의 침대를 밀어넣었구나 싶은 크기였다. 도대체 짐은 다 어디에 보관하는 걸까. 그들이 사는 집에 과연 누군가를 더 받아들일 공간이 있기는 할까.

이심은 미지근한 녹차를 마셔 없앤 뒤 리키에게 빈 컵을 내밀었다. 왼손을 컵받침처럼 펼치고 오른손으로 잔을 받아드는 그의 손끝이 이심의 손등을 스쳤다. 이심은 아쉬움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화장실을 찾는다는 핑계로 그들과 멀어졌다.

 

아직 칵테일 타임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바 카운터 앞에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뭔가를 얻으려면 어디에서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일은 놀랄 만한 게 아니었지만 넌더리가 나는 마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별수없이 줄 끝으로 가서 가볍게 한숨을 쉬자 앞에 서 있던 단발머리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심의 이름표를 보자마자 지친 듯 다소 울적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잔이 없으신가보군요. 그럼 저희 앞으로 서세요, 선생님. 아마 대여해주는 잔은 여분이 몇 개 없을 거예요.”

이심이 예의를 차리며 거절했지만 그녀는 잔을 채우고 나거든 모쪼록 자기 가족들과 얘기할 기회를 달라며 이심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겸연쩍은 얼굴을 한 채 그녀 앞으로 이동하자마자 작지만 알찬 스마트 팜을 갖춘 건물에서 산다는 가족이 재빨리 인사를 건네며 다시 이심에게 앞자리를 내어주었다. 사람들은 이심을 앞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을 자처하며 원하는 것은 그저 약간의 관심뿐이라고 강조했다.

딱 한 명,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느닷없이 다가와 어깨 통증을 호소하기는 했다. 그는 공공 의료 센터 쪽에서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통증이 심해지기만 하면 마냥 참거나 빚을 내서 영리 병원에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이냐고 따지듯 묻더니 제풀에 지쳐 자리를 떴다. 그 짧은 소란을 제외하면 이심은 이어지는 양보와 배려를 받으며 순식간에 줄 맨 앞에서 다섯번째까지 왔다. 네번째 순서로 선 남자는 지금껏 스쳐지나온 사람들과 달리 이심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뒷모습이 익숙했으므로 이심은 오늘의 무도회에서 원래 알던 사람을 만날 가능성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일순 남자의 모습이 눈에 익은 이유를 깨닫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남자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모두가 그러듯 이심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이시구나. 어쩐지. 그래서 사람들이 새치기를 시켜줬나보군요. 아까부터 계속 앞으로 가세요, 앞으로 가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남자는 자못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지적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하고 나서 제 앞으로 오시라고 하는 것도 뭣하고 뭐, 아무튼 신경쓰지 마십시오.”

자기 혼자 상황을 정리한 남자의 이름표에는 훈민이라는 이름이, 그 아래는 공개 제한 직업을 뜻하는 빈 괄호 표기가 적혀 있었다. 직업이야 무엇이든 이심은 분명 조금 전 리키과 청명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려 애쓰던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듯 구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나르시시즘이 심한 성격이라 무시당한 경험은 어떤 형태로든 갚아주는 게 중요한 타입인지도 몰랐다. 혹은 이런 식으로 주의를 끌려는 작전인 것일까.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동안 대부분 사람들의 이름표에까지 시선이 가지 않았던 것과 달리 그의 이름표를 확인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가족에게 관심이 갈 리는 없었고,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는지 물을 필요 또한 느끼지 못했다. 남자가 다시 앞을 바라보자 이심에게 방금 전 자리를 양보한 바로 뒤의 커플 중 여자 쪽이 당신은 저러지 마.” 하고 주의를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회성 없는 티 내고, 피곤하게 구는 남자랑 자청해서 가족을 하겠다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 방긋방긋 웃어.”

이심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리자 뒷자리의 여자는 안 그래요, 선생님?” 하고 상체를 기울이며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저런 분들한테 고마운 면도 있어요.” 뒷자리의 남자가 손바닥을 입가에 대며 귀엣말을 전하는 포즈를 취했다. “저렇게 까칠한 분들 아니었으면 지금도 어색하게 춤추고 게임하고 그랬을지 모르니까요.”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집합가족을 구성하는 개념이 막 각광받기 시작하던 때의 무도회는 어설픈 사교 파티와 레크리에이션이 뒤섞인 형태였고, 이심은 공영 뉴스에서 짧은 인터뷰를 본 것만으로도 참여자들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어색함이 옮아오는 듯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영상을 몇 차례 접한 후에는 한동안 뉴스 알고리즘에서 무도회를 삭제해버렸던 이십대의 자신을 떠올리며 이심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그때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면 적극적으로 가족을 찾아나서야 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산가가 아닌 사람이 독신세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본가로 돌아갈 계획은 없었으므로. 마냥 관심을 두지 않고 버틸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만하면 다행이었다. 무도회는 다과회 같은 형태로 바뀌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방향으로 정비되었고, 왕관처럼 작용하는 직업을 얻은 덕분에 긴 줄 끝에서 단숨에 바텐더 앞에까지 올 수 있게 된 게 어디냐고 안도하며 이심은 다섯 가지의 심플한 칵테일 메뉴를 훑었다. 진토닉과 쿠바 리브레 중에 뭐가 좋을까. 등뒤의 긴 줄을 의식하자 더 마음을 정하기 힘들었는데, 다행히 바텐더는 평생 재촉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심이 마침내 주문을 하려는 순간, 훈민이 도로 이심 앞으로 끼어들며 바텐더를 향해 자기 잔을 내밀었다.

술이 잘못 나온 것 같은데요.”

손님. 레드와인 글라스 아니셨나요?”

와인 쿨러 골랐는데요. 이거 색깔만 봐도……

아직 안 드신 거죠? 그럼, 그거 저 주세요.” 이심이 나섰다. “잔 하나 대여해주시고 그냥 잔에 부어주세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훈민은 난처하다는 듯 귓가를 긁적이더니 이심이 잔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도로 자기 잔을 거둬갔다. 괜찮다는 이심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한테 여태 양보를 받으셨는데, 막상 선생님이 자기 메뉴도 직접 못 고르면 좀 아까우실 것 같네요.”

이심은 그가 자기 나름으로 배려하는 것인지 비꼬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곤한 타입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물러나는 훈민의 모습을 보며 뒷자리의 커플은 입을 모아 서로에게 당신은 저러지 마.” 하고 속닥거렸다.

바텐더는 이심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며 두꺼운 종이 재질의 코스터를 내밀었다. 코스터 바닥 면에 인쇄된 큐알 코드에 접속해 쿠폰을 등록하고 자신이 일하고 있는 바에 방문하면 한 잔을 무료로 서비스하겠다면서. 마치 카지노 클럽처럼 외국 영화를 통해서나 구경해본 칵테일 바에 돈을 들이지 않고 방문할 수 있다니. 이심은 횡재한 기분으로 쿠폰을 등록해둔 후에 진토닉을 만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숙달된 동작과는 거리가 있는 허둥거리는 손놀림과 당장이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만 같은 평온한 얼굴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녀는 잠시 뒤에 뭔가 재미있는 거라도 발견한 얼굴이시네요.” 하고 웃으며 투명한 칵테일이 든 잔을 건넸다. 맑고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심은 그 점에 관해 재치 있는 칭찬을 건네며 그녀와 대화를 이어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긴 줄과 이곳에 온 목적을 되새기며 서둘러 등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향했다.

 

묽은 진토닉을 홀짝이는 동안, 이심은 저마다 다른 형태를 띤 다섯 가족과 통성명을 했다. 잔이 비자 주변을 서성거리며 대화할 기회를 노리던 여자가 대신 주문을 받아 오겠다며 나섰다. 이심은 잠시 고민했지만 남은 시간이 삼십 분가량에 불과했으므로 결국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새 칵테일을 가지고 와서 이심을 놀라게 했다.

제가 선생님 곁을 지키는 동안 한 명은 줄을 서고 있었거든요. 저희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치는 무엇보다 협동에 있죠.”

그녀가 속해 있는 가족은 총 여덟 명이었고 그중 여섯은 그들이 거주하는 건물 일층의 스마트 팜을 꾸리고 연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구성원 모두는 건강식과 자립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으므로 만일 전쟁이나 기후변화로 체제가 붕괴를 맞는 상황에서도 몇 해 동안은 버틸 수 있다고 말한 후에는 잠시 설명을 멈추고 이심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시점에서 격하게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족의 일원이 되는 데 적합할 터였다. 이심으로서는 요즘은 확실히 스마트 팜을 일구는 게 인기인가보다 싶고, 장황한 설명이 이어질까봐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허벅지 뒤편을 부드러운 손길로 간질이자 이심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집에는요, 샴푸의 요정이 있어요!”

아이는 우주복처럼 하의부터 모자까지 한 벌로 붙어 있는 에코 퍼 소재의 점프 슈트 차림이었다. 모자 위로는 앙증맞은 하얀 귀가 쫑긋 솟아 있어 영락없이 토끼를 연상시켰다. 아이의 가족은 오늘 이 옷에 상당한 전략을 기울였구나. 이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들부들한 귀 한쪽을 살짝 쥐어보았다. 그러자 입력된 명령어에 대한 반응값처럼 아이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저는 로아예요. 다섯 살. 우리집에는, 샴푸의 요정이 있어요. 기계가 머리 감고 다 말려줘요, 오 분밖에 안 걸려요.”

너 오늘 여기에서 그 얘기 엄청 많이 했겠다. 그치?”

이심은 너희 가족을 찾으러 가자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협동적 가족에게 재빨리 양해를 구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실상 이 아이의 가족들 역시 이미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가책은 느끼지 않았다.

실제로 몇 걸음 떼자마자 이심은 예상한 대로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의 가족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만 그 가족의 구성원 중에 뜻밖의 인물이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맥이 풀려 아이의 손을 놓으면서 이심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세상에, 도시 괴담을 마주한 기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