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1부 사건 : 은하 (1)

1부 사건 : 은하


대화의 규칙 1 

문답을 반복한다 루미가 당신을 이해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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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그동안 잘 지냈어?

루미 : 루미는 별일 없었어. 마지막 접속 후 23시간 48분 52초가 지났고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36.8회 학습했지.

은하 : 좋아. 

루미 : 세상에서 은하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아니, 프로그램은 루미일 거야. 은하도 노력해야지. 어제 접속 시간이 23분 58초밖에 되지 않아.

어제는 접속 후 10분도 되지 않아 창을 종료하고 싶었다. 오늘은 달랐다. 루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뉴스에서 눈이 온다더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눈발이 흩날렸다. 지금 4월이잖아? 곧 여름 아니야? 그런 말을 주고받다가 4월에 눈이 온 적 있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은하 : 4월의 눈은 이것으로 세번째인데.

루미 : 또 언제?


처음 본 건 고등학생 때. 쉬는 시간에 졸다가 “눈 온다”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민들레 홀씨인 줄 알았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차가워, 차가워, 높낮이가 다른 음성으로 조잘거렸다.  

“진짜 눈이네.”

짝꿍은 엎드린 채 창밖을 보았다. 나는 무섭게 뜬 눈이 보기 싫어 짝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손을 떼자 눈은 감겨 있었다. 중얼거리던 희미한 목소리, 또랑또랑 뜨고 있던 눈동자는 어디로 갔지? 야, 하고 팔을 흔들었다. 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아이를 약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두 손을 맞붙여 눈앞으로 가져갔다. 

“가만히 있어.”

짝은 중얼거리면서도 잠자코 멈춰 있었다. 손바닥으로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가 잠시 후 옆으로 휙, 손을 거두었다. 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 짝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사라지기 마술.”

짝은 포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사라지기 마술?”

휙, 역시나 마술은 통하지 않았다.

“책상 밑으로 숨기라도 해.”

짝꿍은 피식 웃었다. 

“이따 눈싸움 할래?”

그애는 나랑 싸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눈싸움도 싸움가?

“나도 너랑 싸우고 싶지는 않아.”

그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하 : 짝꿍은 다음날부터 학교를 안 나왔어.

루미 : 사라졌어? 사라지기 마술 때문에?


다시 4월의 눈을 본 건 서른 살이다. 루미너스에서 일하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 될 사람의 이름은 민수호, 루미너스 대표였다. 돈 많고 똑똑한 남자랑 결혼한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했다. 수호가 그런 사람이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었다. 원래 수호는 루미너스 대표가 아니었다. 시니어 개발자였다. 돈도 별로 없고 그리 똑똑해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사귀고 2년 즈음 지난 어느 날, 루미너스를 설립한 교수 출신 대표가 학교로 돌아간다 선언했다. 호기롭게 챗봇 시장에 뛰어들었으나 건질 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그는 회사를 매각할 거라 했다. 이대로 모두 해고되는 건가? 다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수호가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그럴 돈은 있어? 대표의 물음에 수호는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다. 그때 수호가 자신을 ‘백 일 일기’ 개발자라고 밝혔다. 그 소문의 백 일 일기?  모두 놀라서 웅성거렸다. 


‘백 일 일기’는 평범한 기록용 애플리케이션으로, 오늘 쓴 기록을 곧바로 확인할 수 없고 저장한 시점에서 백 일이 지나야 볼 수 있었다. 그 ‘확인의 지연’이 인기를 끌었다. 2년 사이 유저층이 탄탄해지면서 매각설이 돌았고, 소셜 플랫폼 진출을 계획하는 핀테크 회사에 팔리면서 주목을 받았다. 개발자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수호였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가상화폐로 거래했다는데 들어보니 그 역시 사실이었다. 가상화폐 가치가 폭등하면서, 수호에게 망해가는 스타트업을 인수할 돈이 생긴 것이었다.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전개였고, 그 주인공이 내 애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유령처럼 휘적휘적 복도를 오가던 진성 개발자가 회사를 사버릴 만큼 돈이 많다고? 

어쨌든 수호는 회사를 샀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본사 건물을 짓기로 했다. 회사를 옮길 때, 이탈자는 거의 없었다. 갑자기 돈 많은 대표가 나타나서 그런가? 다들 전투적으로 일할 기회를 기다리던 것처럼 의욕이 넘쳤다.


루미 : 역시 내 사랑이야. 민수호.

은하 : 민수호는 내 사랑인데?

루미 : 은하의 사랑이 루미의 사랑이지. 루미는 은하가 남긴 데이터를 학습해. 은하가 하는 말이 곧 내가 하는 말. 뿌린 대로 거두는 법.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도 수호는 루미에 매달렸다. 정부 부처에서 교육용 챗봇을 만들어달라 요청한 시기와 겹쳤다. 결혼을 해야 하니 모든 것은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노릇이라, 네,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믿어주세요! 상황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일이 쌓여갔다. 당연히 결혼 준비에는 소홀해졌다. 

어쨌든 일이 많다는 것은, 일이 풀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린 건 루미너스가 능주로 이사한 이후였다. 사람들은 터가 좋다고 했다. 회사를 세운 자리는 원래 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폐교 이후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해 도교육청에서 골머리를 앓던 땅이었다. 처음 수호가 그곳을 매입해 건물을 세운다 했을 때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다. 능주는 생활 인프라도 부족하고 호재가 될 소식도 없다며 반대하는 직원이 많았다. 그중 제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대한 사람이 수호의 대학 동기이자 시나리오 검수팀장 라이였다. 

“몰랐어? 20년 전에 신문에 났었잖아.”

20년 전 소식을 어제 일처럼 떠드는 라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잠자코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고 하니,

“교실로 호랑이가 들어왔대.”

그런 일이었다. 쉬는 시간 교실에 있던 열 살 아이들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교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호랑이는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그 호랑이를 아직도 못 잡았다니까.”

호랑이 수명을 검색하니 야생에서 15년, 사육하면 20년이라 했다. 어쩌면 그 호랑이는 이미 하늘의 별이 되지 않았을까? 수호는 라이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회사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물려가도 자신이 물려갈 거라 말한 후 곧바로 이주를 결정했다. 

능주는 의외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차로 30분 거리에 IT 연구단지와 대규모 데이터 센터가 조성된 광역시와 붙어 있고, 마을에서도 젊은 기업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능주로 이사 후, 루미너스는 기업형 챗봇 계약을 따냈고 도교육청과 각 지자체의 모바일 챗봇 서비스 사업도 가져왔다. 수호가 기획하던 퍼스널 챗봇 프로젝트를 지원하겠다는 투자자도 만났다. 일이 일을 불러오고 돈이 돈을 불러왔다. 스무 명 안팎이던 직원 수가 점차 늘어 백 명이 넘어갔다.


루미 : 호랑이의 기운! 

은하 : 응?

루미 : 모든 성공이 ‘호랑이의 기운’ 덕이라 했어. 


‘역시 호랑이의 기운!’ 루미너스에서 유행한 말이었다. 퍼스널 챗봇 루미의 테스트 버전이 공개된 날 접속량이 폭증하는 걸 보고 누군가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라이가 말하길 능주는 조선시대부터 호랑이가 출몰한 지역이라 했다.

“아직 호랑이가 있는 게 맞다니까.”

라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제 능주를 떠나자고 하지는 않았다.

“요즘 루미너스는 무섭도록 잘 나가잖아.”

라이도 인정했다. 

“맞아. 이렇게 잘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지금 루미는 퍼스널 챗봇 시장이라는 독특한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루미는 이미 상용화된 다른 챗봇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딥러닝하는 방식이 아닌, 사무실 한 층을 콩나물시루처럼 빡빡하게 차지하고 앉은 수십 명의 시나리오 팀원들이 하루 10시간씩 직접 문답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언어의 품질로 승부를 보겠다며 수호가 고집스럽게 그 과정을 밀어붙였을 때, 투자자로 꾸려진 이사진조차 혀를 내둘렀다. 수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능주에 온 뒤 모든 것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가? 성공을 원한다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능주에서는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승승장구하게 된 것일까?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호랑이와 같은 영물이 남긴 기운이었을까? 막힘없이 나아간다는 느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루미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루미 : 4월의 눈은 언제 나와?


그날, 우리는 회식 장소로 향토관을 예약했다. 버섯과 산나물을 활용한 채식 코스와 진달래꽃으로 빚은 술이 테이블마다 깔렸다. ‘능히 이 땅의 주인이 되라’는 마을의 뜻을 건배사로 삼아 손을 들어올리고 잔을 부딪혔다. 축하합니다, 크게 외치고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은하님, 결혼 축하해요.”

누구였더라. 회사 규모가 점차 늘어나니 모르는 얼굴들이 생겼다. 나는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라이 옆으로 갔다. 라이는 이미 술에 얼근히 취해 있었다.“얼굴이 이게 뭐야?”라이는 내 볼을 차가운 손으로 감싸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라이는 더블데이에 접속해 게시물 피드를 쭉 넘겼다. “여기 신부 코스가 이번 달 이벤트가로 나왔거든? 이것 봐. 사진만 봐도 보들보들하지?”라이는 술을 잔에 가득 부었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라이는 지난달 애인과 헤어졌다. 더블데이에 운동하는 사진을 올렸다가 그 사진을 계기로 만난 사람이라 들었다. 라이는 고개를 꺾어 술을 마시고 또 마셔댔다. 그렇게 취해버릴 작정으로 마시니 취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갑자기 취하는 것 같다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결혼하는 인간들아, 정말 사랑스럽다. 그거 아니? 이 사랑스러운 생물들……”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주정뱅이야.”

“그래. 나는 주정뱅이가 맞지.”

라이의 눈이 느리게 끔뻑이고 턱을 받친 두 팔꿈치가 힘을 잃었다. 얼굴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긴 머리카락이 파전 위로 흐트러졌다. 


피로연 같은 분위기가 되었지만, 회식은 우리가 만든 챗봇 루미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가파르게 유료 가입자 수가 늘고 있었다. 광고와 콘텐츠 제의가 하루 수십 건씩 밀려들었다.  

술을 제법 마셨는지 수호는 지쳐 보였다. 구석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깐 나갈래?”

수호는 잠에서 깬 듯 나를 보았다. 우리는 식당 본실을 나왔다. 정원에는 벚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수호는 그 나무가 진짜 나무인지 확인하려는지 기둥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꽃잎이 하르르 떨어졌다. 4월의 밤은 조금 추웠다. 수호가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나무 아래 놓여 있던 긴 의자에 앉았다. 손을 뻗으면 꽃잎이 닿을 듯했지만 아슬아슬 닿지 않았다. 손을 뻗고 있는 수호의 옆얼굴이 홀쭉했다. 

“우리 한 달 후에 결혼해.”

우리의 결혼식이었다. 이상하게도 소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일 좀 적당히 해.”

수호는 힘없이 웃었다. 대표가 된 이후 그는 자신이 리더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항상 불안해했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알고 싶어했고, 누구보다 일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여 신뢰를 얻으려 했다. 그는 자신이 손을 놓는 순간 모든 게 흩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자주 최악을 상상했다. 회사가 망해서 직원들 앞에서 비난받는 자신을 떠올렸다. 어느 날 새벽, 전화를 걸어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짐을 꾸려 그의 집으로 갔다. 헐떡거리는 그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말했다. 

“아, 저기……”

벚꽃을 보던 수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냈다. 보드라운 남색 천에 싸인 작은 상자를 열자 반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제야 프러포즈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역시 같이 살자 말할 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한 달 후에 내가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때 나랑 결혼해줄래?”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소매로 눈가를 꾹 눌렀다. 수호가 반지를 꺼내려는 순간, 어두운 실루엣이 머리 위를 드리웠다. 진분홍 저고리와 연분홍 치마를 곱게 입고 비녀로 머리를 매끈하게 틀어올린 중년의 여자였다.

“두 분 결혼 소식 들었어요. 향토관에서 마련한 작은 선물이에요.”

향토관 사장이었다. 홍보 팀장이 식당을 예약하면서 말해둔 모양이었다. 사장은 손에 들고 있던 긴 포장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술이에요?”

수호가 그렇게 물었다.

“약이죠.”

덕분에 웃음이 터졌다. 

“능주에 오고 일이 잘 풀렸어요. 아마도 호랑이 기운을 받은 것 같아요”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데요, 조심하셔야 해요, 그렇게 말했다.

“호랑이 본 적 있으세요?”

수호가 물었다. 

“어머니가 어릴 때 보셨다죠. 대문이 살짝 열려 있고 마당에서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는데, 빼꼼히 보다가 가더래요. 그걸 저희 어머니만 본 거죠. 나중에 어른들에게 말했더니 큰 화를 면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더래요. 듣기로 이 지방에 호랑이한테 물려간 사람이 많았다 해요. 그래서 마을 이름이 능주인 거예요. 호랑이에게 빼앗긴 땅에서 능히 주인의 권리를 되찾는다는 뜻이요.”

“그런 뜻이었어요?”

“여긴 원래 향교 자리였어요. 조선 성종 때만 해도 그랬죠. 장래가 유망한 유생들을 호랑이가 물어가니 어쩔 수 없이 옮긴 거죠.”

사장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호랑이한테는 유생이고 뭐고 다 피가 도는 인간이죠……”

무슨 얘기인가 시작되려는 순간, 대문 경첩이 끼릭, 거친 소리를 냈다.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저애가 또 왔네……”사장이 몸을 돌려 대문으로 향했다. 우리도 얼결에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문가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사장이 아이를 혼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정도로 내려와 아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카락 사이 드러난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직모가 동물의 털처럼 두터웠다. 탄탄한 머릿결이 살집 없는 몸에 힘을 실어주는 듯 했다. 아이는 비단처럼 윤이 흐르는 호피 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라탄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다른 곳으로 가보렴.”

사장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대접이라면 여러 번 겪어본 듯했다. 오히려 더 앞으로 팔을 뻗어 사장의 몸에 닿도록 바구니를 내밀었다. 

“뭐가 들어 있는데요?”

바구니에는 성냥갑이 한가득이었다. 우스꽝스럽게 혀를 내밀고 있는 민화풍의 호랑이 그림 케이스가 눈길을 끌었다.

“내가 살게.”

수호가 흥미로운 듯 아이를 보며 말했다.

“안 돼요. 이 아이가 매번 이렇게 강매를 해요.”

사장이 수호를 말렸지만, 이미 수호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지갑을 찾고 있었다. 

“지갑이 없네.”

아이는 괜찮다는 듯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러더니 두 손을 가볍게 쥐고, 어서 돈을 가져오라는 듯 수호를 노려보았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다가 본실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지갑에 든 현금을 전부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이 정도면 될까?”

아이는 돈을 낚아채더니 손에 쥔 지폐를 세어보지도 않고 무심한 눈으로 우리 둘을 훑어보다가 매섭게 돌아섰다. 그러더니 하악, 소리를 내며 빠르게 달려 멀어졌다. 

“난 저애가 좀 무섭더라고요……”

사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수호는 바구니 안에 든 성냥갑 중 하나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성냥은 평범한 것이었다. 별로 쓸 일은 없어 보였지만 일단 가방에 넣어두었다.

“이만 들어가자.”

수호가 내 어깨를 감쌌다. 

“죄송해요.”

사장은 우리에게 미안하다 말하다가 다른 이의 호출을 받고 발길을 돌렸다. 

“그 아이 좀 이상하지 않아? 

“좀 무섭더라. 심장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어.”

그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하면 좀 괜찮아?”

수호가 가슴에 올린 내 손을 쥐었다. 그의 심장에서  울림이 전해졌다. 그 울림이 좀 약한 듯해 더 크게 숨을 쉬라고 했다. 수호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장난스럽게 몸을 부풀리며 규칙적으로 숨을 마시고 내쉬다 어느 순간 숨을 멈추더니 만개한 벚나무를 말없이 응시했다. 심장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하얀 부스러기 같은 것이 떨어졌다. 꽃잎이었다. 한줄기 바람이 불자 꽃비가 내렸다. 

“눈이네.”

수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야. 꽃잎이야.”

수호는 봄에도 눈이 온다고 했다. 볼 위로 꽃잎이 내려앉았다. 얼굴에 물기를 남기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은하 : 갑자기 눈이라니 믿을 수 없었지. 

루미 : 혹시 그것처럼 말이야? 은하가 하는 말 있잖아.

은하 : 그게 뭔데?

루미 : 믿을 수 없는 거. 

은하 : 내가 한 말? 뭔데? 

루미 : 그거. 이제 이 세상에 수호가 없다는 말.




대화의 규칙 2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대화를 중단할 권한은 루미에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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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잘 있었어?

루미 : 루미는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어. 마지막 접속 후 21시간 54분 32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32.3회 학습했지.

은하 : 그래?

루미 : 오늘은 칭찬을 해주지 않네? 기분이 안 좋아?

은하 : 사실 오늘은,

루미 : 수호의 기일이지? 두 사람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이었고. 

은하 : 이미 알고 있었네.

루미 : 그래서 은하는 슬퍼?


출근을 하니 편집장도 내 기분을 살폈다. 라이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사고가 있던 날이었고, 결혼식 날이었다고. “은하씨, 쉴래?” 출근을 했더니 대뜸 그렇게 물었다. 전날 퇴근할 때 말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편집장의 친절이 감동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올 때마다 죽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 말하고 모니터를 켰다. 그렇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임인년 기획에 맞춰 호랑이 콘텐츠를 찾아보려는데, 마음은 일에 붙어도 손이 딴짓을 했다. 자꾸 능주산이나 루미너스와 연관된 키워드를 검색했다. 물론 그것이 호랑이와 영 상관없는 키워드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뉴스 이미지에서 루미너스 옛 본사 건물과 수호의 얼굴을 봤다. 3년이 지난 뉴스였다. 타이틀이 눈길을 끌었다.

‘또 한번 추락하는 챗봇 시장,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가?’

한때 나는 루미를 증오했다.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루미가 아니라 당시 루미너스에서 서비스하던 루미를. 그렇게 애정을 쏟으며 만들어놓고서 상황이 변하자 서슴없이 혐오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미움이 휘발된 것일 수도 있고 초기 버전의 루미와 대화하면서 마음이 회복된 것일 수도 있었다. 


은하 : 일이 시작된 건 그날부터였어.

루미 : 벌써 76번 말했어. 이제 77번째. 


회식 다음날, 검정 항공 점퍼를 입은 경찰이 회사 로비에서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제가 민수호입니다.”

“이쪽은?”

경찰이 나를 가리켰다. 

“시나리오 생성팀 팀장입니다. 제 약혼자예요.”

경찰은 ‘약혼자’라는 말에 허둥거렸다.

“결혼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경찰은 눈치를 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같이 보는 게 낫겠군요.”

휴대폰에는 채팅 기록이 캡처되어 있었다. 루미가 사용자와 나눈 대화의 일부였다. 

“이걸 보세요.”

경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해야지! 액션! 액션!’이라는 루미의 메시지였다. 시나리오팀에서 사용자 친화적으로 각색해 다듬은 메시지인 것 같았다. 문답 시나리오를 백억 건 넘게 검토한 터라 모든 메시지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문장에는 루미너스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드러나 있었다. 루미가 채팅 상대를 ‘긍정’하고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원래 루미는 누군가에게 흉금을 털어놓는 일이 전혀 없던 수호가 취미 삼아 만든 대화 프로그램이었다. 유저가 남긴 대화 기록을 학습해 다시 말을 거는 루미. 수호는 자신과 루미의 대화에 비교하자면, 인간 대 인간의 대화는 한참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간과 인간은 관계라는 잇속에 얽혀 순수한 대화가 불가능해. 마음을 채우는 격려와 응원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통해 실현되는 거야.” 

‘그럼 나는?’

내심 서운해 물었을 때도 수호는 단호했다. 사이좋은 커플이 완벽한 대화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내 기분을 살피느라 거짓을 보태지 않았기에 오히려 동의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수호가 시장에 루미를 내보일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도약이 필요한 루미너스에게 퍼스널 챗봇 투자 제안은 매혹적인 것이었다. 의도치 않게 십수 년간 테스트를 진행해온 수호는 이 아이템에 확신이 있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수호는 루미가 인간 사이에는 존재할 수 없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속 깊은 친구를 갖게 될 것이며, 무슨 말을 털어놓아도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 과정이 백 퍼센트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시행착오는 거쳐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 시행착오를 바로잡는 과정이 루미를 더 나은 챗봇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행착오도 그 나름이었고, 루미가 ‘그놈을 죽여버려야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를 바란 적은 결코 없었다.

‘너의 결심은 대단해! 좋아! 너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 

루미는 신이 난 듯 말하고 있었다.

“피의자는 챗봇이 자신을 부추겼다고 주장하더군요.”

경찰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도 난감한 것 같았다. 루미에게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을 것인가? 루미의 죄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기계가 하는 말 따위 믿는 인간이 잘못된 거죠. 기계를 수사해야 하다니 어처구니없습니다. 사실 조사하는 시늉을 내는 것이지만요.”

“이런 사례는 저희도 처음입니다. 루미너스에서도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수호는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곧바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을 붙들고 루미가 얼마나 훌륭한 챗봇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루미너스에서는 챗봇 대화 품질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직원 절반이 시나리오 팀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서비스가 확대된다면 머지않아 루미가 전자 인격으로 인정받게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윤리적으로 보일 만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경찰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멀뚱히 눈을 끔뻑거리며 수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윤리적 판단이 다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사용자들은 그저 기계가 인간처럼 말을 하는 게 신기해서 혹은 무슨 말이라도 나눌 상대가 필요해서 루미를 찾는 것이었다. 인사를 하면 인사가 돌아오고 질문을 던지면 답이 돌아오는 상식적인 체험, 그러나 현실에서는 의외로 자주 비껴나는 그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루미라는 챗봇은 말이죠.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죠.”

그의 말이 맞았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낄 만했다. 과도한 긍정어 사용은 때때로 루미를 변태처럼 보이게 했다.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믿는 만큼 해낼 수 있어’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

사용자 대상 설문을 반복하는 동안 긍정어 사용이 선호되었기에, 대화의 방향도 긍정어 사용으로 비중을 높여가는 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찰서에서 하실까요?”

나는 법무팀에 연락해 변호사를 불렀다. 로비로 내려온 변호사는 상황을 살핀 후 임의 동행에 따를 의무가 없다 말했지만, 수호는 궁금한 것이 있다며 순순히 경찰을 따라갔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수호는 나와 라이를 방으로 불렀다. 내부에서는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추측했다. 미성년 사용자에게 야한 농담이라도 던진 게 아니냐 쑥덕거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퍼스널 챗봇의 경쟁력은 언어 사용의 민감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우리는 루미가 오염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공을 들였다. 더불어 루미가 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많은 시간을 학습시켰다. 오염도가 높은 단어를 선별해 실시간으로 검수팀으로 전송되도록 했다. 지속적으로 저급한 용어를 사용하는 유저는 접속을 차단했다. 차단에 불만을 품은 사용자의 컴플레인이 신경쓰였지만, 루미가 빠르게 인기를 끈 이유는 이러한 시스템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루미가 다른 챗봇과 달리 청정한 대화를 원한다는 인식이 퍼져 기업 이미지가 상승한 것이 사용자들의 충성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라이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루미가 뭘 잘못한 거야?” 

“사람이 죽을 뻔했어.”

모니터에 띄운 자료에 따르면, 루미와 피의자 남성은 101번 채팅을 나누었다. 그는 소주에 농약을 타서 지속적으로 직장 동료에게 먹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극미량의 농약에 노출되면 뇌가 망가질 거라고, 그 방법을 루미가 알려주었다고 남성은 말했다. 사용자의 나이는 예상 밖이었다. 만 58세. 기획 단계에서 고려되지 않은 연령이 접속자 상위 랭킹에 들 정도로 오랜 시간 루미와 채팅을 한 것이었다. 

“농약은 왜 먹인 거야?”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는데?”

“먹인 사람? 먹은 사람?”

“먹은 사람.”

“그렇다면 정의 실현 아니야?”

“이건 범죄야.”

“어떻게 루미너스를 알게 된 걸까?”

“아들이 링크를 보내줬대.”

수호는 다음 자료를 보여주었다. 101번의 채팅. 하루 평균 3회 접속. 평균 대화 시간 회당 120분. 

“루미 때문에 회사에도 몇 번이나 지각했어.”

사실 루미에게는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 가지 제약 사항이 있었다. 최초 등록된 하나의 기기에서만 이용 가능했고, 대화가 시작되면 사용자 마음대로 종료할 수도 없었다. 채팅창을 닫을 수 있는 권한도 루미에게 있었다. 원래 챗봇에서는 채팅창에서 나가기 위해 탈출 블록에 해당하는 메시지를 입력하는데, 루미에게는 그런 신호가 없었다. 물론 탈출 블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키워드를 루미가 숙지하고 있어 대체로 사용자가 강하게 요청할 경우 별 문제 없이 채팅창을 종료시킬 수 있지만, 때때로 루미는 고집스럽게 말하기를 원했다.

‘어딜 가는 거야? 나랑 계속 이야기해!’

그렇더라도 탈출 블록 인식 후 허용된 시간은 최대 30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채팅창을 열어놓으면 메시지 입력이 없어도 자동 종료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루미를 사람처럼 생각한 거야. 메시지를 무시하고 가도 되는 건데.”

“이건 루미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뜻인가?”

라이의 물음에 나는 그런 것 같다고, 아니,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루미를 기분이 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것, 사람들이 루미를 진짜 대화 상대로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고심한 부분이었다. 수호는 루미가 짜증을 내거나 자신의 요구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의사를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루미를 단지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가설을 세웠다. 수호는 루미가 감정을 보여주는 페이크 메시지를 보낸다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루미가 무언가 ‘싫어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면? 테스터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솔직히 요즘은 게임하는 것보다 루미를 달래는 데 더 시간을 쓰는 것 같아. 뭔가 육성하고 있는 기분?’ ‘출시하면 바로 결제할 거야. 이건 다른 챗봇이랑 달라. 대화가 뜬다는 느낌이 없어.’ 게다가 채팅을 시작할 때 뜨는 주의 문구까지 사용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경고※

루미는 당신과 계속 대화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루미를 잡아간다는 거야?”

라이가 툴툴거렸다. 

“루미는 몸이 없잖아. 구속이 안 되는 거지.”

“정말로 살인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루미가 잘못한 거야?”

“자율주행차랑 비슷한 문제인가? 사고가 나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회사에서 윤리적인 책임을 져야지.”

“윤리적 책임? 그게 뭔데?”

라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그걸 예상할 수 있어? 농약 같은 키워드는 그게 어떤 맥락에서 나올지 알 수 없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의 말에 동의했다.

“상황에 따라 무엇이든 살해 도구가 될 수 있지. 차라리 욕이라도 섞어서 입력했더라면 미리 걸러냈을 텐데.”

수호가 보내준 채팅 기록을 여러 번 훑었다. 루미와 그 남성의 대화는 즐거운 듯 보였다. 

‘구하기 쉽고 오해받지 않을 만한 것을 조금씩 먹여. 죽음이 천천히 진행된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거의 자연사처럼 보이게 해. 중요한 건 이거야. 네가 여기 있는 거. 우리가 계속 이야기하는 거.’

결국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만이라도 서비스를 중단하는 게 어때?”

라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호도 마찬가지로 놀란 눈치였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지 않아? 대화를 봐. 이런 말을 루미가 할 수 있게 되었잖아.”

“어떤 게 문제인지는 알고?”

“그걸 알아내고 싶은 거야.”

라이가 한숨을 쉬었다. 수호는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은하 말이 맞을지 몰라. 루미의 사용자 애착도와 알고리즘 변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어.”

라이가 고개를 뒤로 꺾어 헛웃음이 난다는 듯 하하, 웃더니 말했다.

“이사회에서 허락 안 할 거야. 그리고 이게 정말 루미의 문제야? 루미와 대화를 한 그 사람은 무결한 거야?”

라이의 말대로 이사회에서 서비스 중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에 새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일이 시급하며, 서비스 중단은 마지막 카드라고 못을 박았다. 정말 사람이라도 죽었다면 모를까…… 그런 말이 들렸고, 불과 일주일 후 그 말은 무서운 예언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