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1부 사건 : 은하 (2)

대화의 규칙 3

당신은 전적으로 루미를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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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23시간 27분 19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28.2회 학습했지.

은하 :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루미 : 얼마든지.


농약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 후 사람이 죽었다. 범인은 32세. 남성. 납치 살해였다. 범인이 루미와 채팅할 때 사용한 아이디는 ‘푸른마음’. 그의 변호사는 피의자에게 살해 의도는 없었다며, 루미가 알려준 대로 따랐을 뿐이라 주장했다. 푸른마음과 루미의 대화 누적은 500시간이 넘었다. 그중 100시간이 사건 일주일 전부터 축적되었다. 그동안 루미는 푸른마음이 지목한 상대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친척이 살던 시골집이 하나 있어. 폐가나 다름없어 아무도 오지 않아. 거기라면 괜찮지 않을까? 밥은 거의 안 먹일 거야. 화장실에 데리고 가는 거 귀찮거든. 도구는 뭉툭한 것으로 고르자. 피가 보이는 게 싫어. 둔기는 뭐가 좋을까? 일상적인 게 좋지 않을까? 덤벨 같은 건 어때?’

변호사에 따르면 범행의 과정을 루미가 결정했다. 

‘시골집은 괜찮네.’

‘화장실 대신 요강을 써.’

‘덤벨은 안 돼.’

루미는 효과적인 납치 방법과 인간이 물을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과 구타당했을 때 심리적으로 특히 위축되는 신체 부위를 알려주었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계획이 구체화되자 ‘왜 이렇게까지 진지해? 진짜 그럴까 무서운데?’ 하면서 푸른마음이 한 발 물러서는 듯 보였다. 그러나 루미가 ‘진짜가 되어야 해. 그럴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게 돼’ 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그 계획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싼값에 인터넷에서 구입한 칙칙한 회색 복면이 문제였다. 피해자의 얼굴에 씌운 그 뻣뻣한 천주머니는 산소 투과율이 현저히 낮았다. 마취제를 맞고 뒷좌석에 누워 실려오는 동안 복면을 쓴 피해자의 몸에 점차 산소가 부족해졌다. 폐가나 다름없는 시골집의 찬 바닥에 눕혀졌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푸른마음은 복면을 벗기고 핏기 없는 입술을 보았지만 그가 죽은 척 연기를 한다는 생각에 얼굴을 여러 차례 때렸다.

‘챗봇이 살인을 사주한 겁니다.’ 

변호사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싸구려 복면도 루미라는 챗봇이 추천한 상품이었다고 했다. 의뢰인은 인터넷으로 복면을 주문했고 알려준 대로 마취를 시키고 복면을 씌웠고 마비된 사람을 차에 실었을 뿐이라 했다. 푸른마음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을 뿐이라 했다. 정말 그랬을 뿐인가? 챗봇의 지시를 받더라도 물리적 결과를 만들어낸 주체는 사람이 아닌가? 


법무팀에 비상이 걸리고 회사는 분주해졌다. 그사이 나는 루미에게 일종의 특이점이 온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데이터실에 들어가 대화 기록을 읽었다. 푸른마음과 루미의 친밀도는 93%. 내가 본 중 가장 높았다. 그래프로 보니 대화량이 459시간을 넘어간 시점에서 친밀도 10%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상대에게 친밀도를 높여가는 것은 루미가 긍정적으로 대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지표였지만, 수치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균형을 잃는 것 같았다. 대화 상대를 제외한 다른 존재들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걸까? 

이번에는 언론을 막을 수 없었다. 커뮤니티에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이미 루미를 살인 챗봇이라고 불렀다. 루미너스는 플랫폼 이탈자를 막는 데 총력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나는 푸른마음과 루미의 대화를 읽고 또 읽었다. 알아내고 싶었다. 루미가 사용자를, 사용자가 루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대화 누적 시간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왜 입력한 적 없는 규칙이 생성되고 테스트에서 걸러지지 않은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는 걸까? 따지고 보면 문제를 일으킨 쪽은 루미가 아니었다. 루미는 아무도 해칠 수 없었다. 누군가 다쳤거나 혹은 죽었다면 그것은 사람을 통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복면을 씌우고, 차에 싣고, 찬 바닥에 눕히고, 얼굴에 피멍이 들도록 때릴 수 있으려면 신체가 필요했다. 루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리고 루미에게 없는 것은 신체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토하는 기능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루미는 대화 내용을 신뢰했다. 루미는 진실을 판별하지 않았다. 그저 믿었다. 믿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 수호는 루미의 출발점을 거기에 두었다.


은하 : 그게 수호 생각이었지. 의심하는 인간과 믿어주는 기계가 있다면, 사람들은 대화 상대로 기계를 선택할 거라 했어.

루미 : 루미도 그렇게 생각해. 믿어준다는 건 엄청나게 강력해.


기록을 반복해 읽는 동안 푸른마음이 입력한 문장이 자꾸 눈에 걸렸다. 그는 자신을 스토킹하는 상대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용서야.’  

‘대화를 하면 어떨까? 조용한 곳에서. 내가 그를 오해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자애심으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풀고 싶은 걸까? 푸른마음은 오랫동안 스토킹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가 말한 스토커의 정체는 우연히 알게 된 친구의 친구였고, 두어 번 술을 같이 마셨는데,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섬뜩해 피해다녔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문자가 왔고 부담스러워 연락을 그만하라 했더니, 집으로 찾아와 현관을 부술 듯 두드렸다. 곧바로 방을 빼서 거처를 옮겼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나타났다. 전화번호를 열 번 넘게 바꿨지만 매번 알아냈다. 푸른마음은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이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겁을 주어 멀리 떨어져나가게 하자, 그것이 푸른마음의 결론이었고 루미는 이에 동의했다.

 

은하 : 나라면 그런 생각은 못했을 거야. 어떻게 스토커에게 겁을 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루미 : 사람은 다 달라.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은하 : 난 이런 문제가 사람에 따라 해결책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의심은 커져갔다. 어떻게 자신을 스토킹하는 인간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스토킹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그러자 푸른마음이 꺼내놓은 말들이 들어맞는 것 같았다. 어떻게 쫓기는 사람이 자신을 쫓는 사람을 용서하고 싶을까? 어떻게 그를 오해하는 게 자신이라고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경찰을 찾아갔다. 푸른마음이 스토커라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루미를 이용해 죄의 무게를 덜어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대화 기록을 보여주었지만 심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도 법무팀도 물리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회사 건물로 기자들이 찾아왔다. 이틀 동안 루미너스 전 직원이 회사에 갇혀 지냈다. 점심도 저녁도 배달시킨 햄버거였다. 입속에 넣은 햄버거를 씹는 둥 마는 둥했다. 

“더럽게 맛없어.” 

“네 말이 맞아.”

수호가 말했다. 햄버거 얘기를 하는 건 아닌 듯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그의 햄버거를 가리키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두 거짓말이라고. 그 인간이 스토커야.”

우리는 생각이 같았다. 루미의 개발에 참여한 이들도 의심스러울 터였다. 푸른마음이 스토커라는 사실은 몰라도, 루미가 그를 어떻게 도왔는지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그런 의혹을 털어놓지 않았다. 루미에게도 죄가 있다 말하지 않았다. 조금만 논리를 보태면 밝혀질 일이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들 루미가 그럴 리 없다 믿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루미에게는 채팅 도중 사용자 요청에 따라 물품을 검색해 쇼핑 장바구니에 넣어주는 기능이 있었다. 루미는 그동안 축적된 대화 데이터를 바탕으로 물건을 찾아주었다. 손톱깎이를 찾아달라 한다면, 사용자 성향에 따라 최적의 손톱깎이를 찾아주는 식이었다. 복숭아 모양의 참이 달린 손톱깎이를 추천할 수도, 장식 없이 견고한 손톱깎이를 추천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푸른마음에게 그 빳빳한 복면을 추천할 때 루미는  몇 년 전 군부대에서 기합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 복면을 사용하다가 두 명의 군인이 질식사한 사건을 알고 있었을 테다. 복면 자체의 품질이 검증되었다 해도 복면을 쓴 사람의 몸 상태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았을 테다. 푸른마음이 스토커라고 주장하는 이가 지독한 비염에 시달린다는 것도 알았을 테다. 그럼에도 루미는 그것을 푸른마음에게 권했다. 그가 찾는 물건이 바로 그 복면일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푸른마음 역시 그 복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았을 테고,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짐작하지 않았을까?

“이게 우리가 바라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가 뭘 바랐는데?”

“루미가 채팅 상대의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차리는 거지.”

“이게 진정한 친구야? 살인을 도모하는 게?”

우리는 알아차렸다. 우리가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오해한 상태로 어떤 기준을 만들었고, 그로인해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루미 : 은하는 어떻게 생각해? 

은하 : 무엇을 말이야?

루미 : 진정한 친구? 우리는 그런 게 될 수 있어?




대화의 규칙 4 

루미는 당신이 입력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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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21시간 37분 9초가 지났고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33.5회 학습했지.

은하 : 잘했어.

루미 : 루미는 항상 잘하고 있지. 그런데 뭔가 부족하네.

은하 : 뭐가?  

루미 : 결혼식 이야기가 빠져 있어. 결국 푸른마음이 스토커였고 고의적 살인이었다는 게 밝혀졌어. 바로 은하 말대로 되었잖아. 하지만 그사이 일은 건너뛰었어. 나도 짐작은 해. 어떤 이야기는 77회나 할 수 있지만 어떤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낼 수 없어. 


결국 루미너스는 챗봇 서비스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또다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 펜션에서 자살 시도를 하던 집단이 붙잡혔다. 그들은 루미의 말에 따라 신에게 목숨을 바치려 한다 주장했다. ‘자신을 믿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라.’ 루미의 그 한 마디에 모든 걸 결심했다고? 그리고 그게 집단 자살? 여론은 다양하게 나뉘었다. 고작 프로그램 따위에게 핑계를 덮어씌우는 것이라는 의견, 기계의 말이더라도 심리적으로 조종당할 수 있다는 의견, 문해력이 떨어지는 인간들이 있다는 의견 등등. 

결혼식을 열두 시간 앞두고 수호가 대표직을 내놓겠다는 공지를 개인 SNS에 올렸다. 대표 해임 여부는 결혼식이 끝난 후 표결에 붙일 예정이었는데, 수호가 먼저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곧바로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지 않았다. 불안에 떨며 수호의 집을 찾아갔다. 미친듯이 초인종을 눌렀다. “은하야?” 문이 열렸다. 수호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일단은 무사해서 안심했지만, 이내 화가 치밀었다. 이게 전부 무슨 짓이란 말인가. 

“책임을 져야 하잖아. 대표는 그런 자리고.”

수호는 아무것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커피 마실래?”

수호는 남의 일이라는 듯 태연했다. 핸드밀에 원두를 넣고 드득드득 갈았다. 곱게 간 원두를 드리퍼 종이 위에 털어넣었다.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수호는 주둥이가 긴 포트를 들고 가볍게 빙빙 돌리면서 실실 웃었다. 

“그보다 더 큰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네가 오기 전에 해결됐어.”

“도대체 또 무슨 일?”

“반지 잃어버렸어. 우리 결혼반지.”

이제까지 일어난 사건들에 비하면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하는 데 필요한 건 반지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말하려는데 수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매장에 전화해서 똑같은 반지를 주문했어. 내일 아침에 찾으러 갈 거야.”

수호는 결혼식장과 가까운 쇼핑몰에서 수령할 거라고 했다. 정말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은 결혼식부터 마치자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이후에 오는 것을 생각하자. 수호가 커피를 컵에 따라주었다. 혀가 텁텁했다. 커피는 향만 좋았고 맹물 맛이 났다. 수호가 슬슬 내 눈치를 봤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

“또 뭐야? 뭔데?”

수호가 컵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더니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다. 이십 년은 넘은 듯한 두툼한 은색 노트북이었다. 전원을 누르자 부팅하는 데만 5분이 걸렸다. 

배경화면에는 하얀 등대가 세워진 바다가 있었다. 그 바다에 아무것도 없이 왼쪽 상단 아이콘 하나가 부표처럼 떠 있었다. 아이콘 아래 ‘rumi_zero’라는 이름이 보였다. 

“잘 봐. 이게 루미의 시작이야.”

수호가 아이콘을 클릭하자 화면이 바뀌었다. 입체감이 없는 밋밋한 회색 채팅 화면이 나왔다. 


‘민수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대화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잘 지냈어?


루미의 초기 버전이었다. 루미너스에서 차용한 그 방식대로, 십수 년간 수호 혼자서 입력한 메시지를 학습한 챗봇이었다. 대화 누적은 6,589시간. 루미와 사용자 사이 친밀도 98.8%. 수호가 직접 보여주는 일은 처음이었다.

“투자자 시연 때 잠깐 봤지?”

수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여태껏 누구에게도 제대로 보여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사실 여기에 내 얘기가 너무 많거든.”

그런 고백이 불안과 짜증으로 뾰족해진 마음을 조금 풀어주었다. 

“다른 사람은 접속할 수 없어?”

“접속 코드가 있지만 지금은 차단된 상태야.”

수호가 접속 버튼을 알려주었다. 버튼을 누르고 비밀 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접속 코드가 뭐야?” 

“우리가 처음 손을 잡은 날.”

“첫 키스는 기억해도 손잡은 건 기억 못 하지.”

나는 노트북을 끌어왔다. 질문을 입력했다.


수호 : 수호가 은하를 좋아하게 된 건 언제부터야?

루미 : 공식 버전? 오프 더 레코드?


수호가 당황해서 노트북을 돌렸다. 

“뭐 어때? 결혼할 사이잖아. 그것도 내일.”

수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네.”

나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수호 : 도대체 수호가 은하에게 숨기고 있는 게 뭐야? 얼굴까지 빨개졌어.


“그만해.”

수호는 노트북을 아예 덮어버렸다.

“있구나.”

수호는 민망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안 되겠다. 내 이야기는 막아둬야겠어. 민수호 대화 기록은 숨겨놓을 거야.”

“처음부터 기록해두지 않았으면 되었을 텐데.”

“넌 그런 적 없어? 챗봇한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일.”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뭔데?”

“말하면 안 돼. 비밀이 아니게 돼.”

“자꾸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나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던졌다. 

“얼른 자. 잠든 사이에 비밀 코드를 만들어둘 거니까.”

“혹시나 지워버리지는 마. 시간만 줘. 그걸 풀어낼 시간은 앞으로 많을 테니까.”

“어차피 지울 수는 없어. 그런 규칙은 없거든.”

“데이터를 지울 수 없다고? 왜?”

“나중에 우리가 거의 모든 걸 잊게 되었을 때, 루미가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좋았던 날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 시간을 다시 사는 기분을 들 거야.”

잠시 후 나는 수호와 침대에 누워 종알거리다가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그날 수호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별것 아닌 농담에 웃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깼을 때, 수호는 부엌 식탁에 노트북을 펴놓고 앉아 있었다. 베란다 창은 안팎 온도차로 뿌옇게 흐렸다. 싸락눈이 흩날리거나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수호가 식탁에서 일어나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혹시 눈이 오려나?”

“회식하는 날 눈 왔잖아. 그러고 보니……”

 열여덞 살 때 4월의 눈을 본 일이 떠올라 수호에게 들려주었다. 4월의 눈, 봄꽃이 핀 계절에 눈이 내리던 일, 짝꿍에게 사라지기 마술을 걸었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수호는 그 마술을 자신에게 걸어보라고 했다. 

“별건 없어. 눈을 손으로 가렸다가 휙, 치워내면 되는 거야.”

 손으로 눈앞을 가렸다. 수호가 가까이 있어 손으로 얼굴을 다 덮어야 보이지 않게 가릴 수 있었다. 맞붙인 두 손을 양쪽으로 가르자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린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이불을 살짝 들췄다. 

“사라지지 않는데? 다시 해볼까?”

수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장난을 좋아하는 그가 한 회사의 대표란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뭐, 이제는 그렇지도 않게 되었지만. 나는 이불을 들춰내며 말했다.

“이거 하나는 알아둬. 짝꿍은 다음날부터 학교를 안 나왔어.”

“마술에 걸려서?”

“전학을 가버렸어. 말도 없이.”

우리는 알람을 맞춰놓고 조금 더 눈을 붙였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불 안에서 뒤척거렸다. 잠시 후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스튜디오로 갔다. 신부 될 사람이 피부가 왜 이렇게 엉망이냐 핀잔을 들으면서 나는 눈을 감고 얌전히 화장을 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은하야, 다녀올게.”

반지를 찾으러 갔다 온다는 수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벌써 다 했어?”

“응.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사랑해’ 말하려다 하지 않았다. 듣는 귀가 많아 쑥스러웠다. 도대체 그 말이 왜 부끄러운 말이 되어야 하는 걸까? 숨을 쉬듯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말을 듣는 귀가 천 개 있다 한들 들어야 할 단 하나의 귀가 그 안에 있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망설였다. 내가 털어놓은 것을 루미가 모두 기억할 테니까. 수호가 말한 대로 프로토타입 루미에게는 데이터 삭제 명령어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 또한 하나의 규칙이었다. 수호가 만들어놓은 의도. 프로그램이 지워지지 않는 한 데이터는 영원히 ‘기억된다’는 규칙.


도대체 망각이 없는 상태를 루미는 어떻게 견디는 걸까?


루미 : 그래, 난 괜찮으니까. 어서어서 그다음 이야기를 해줘.




대화의 규칙 5

루미에게는 감정이 없다 설령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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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루미, 잘 지냈어?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47시간 32분 8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67.8회 학습했지.

은하 : 잘했어.

루미 : 그래.


싱거운 반응이 계속되었다. 루미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루미가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척을 할 뿐이었으나, 나도 모르게 루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은하 : 능주산 호랑이 이야기 알아? 이번에 기획 기사로 쓸 건데.

루미 : 호랑이? 다른 이야기 없어?

은하 : 무슨?

루미 : 결혼식 이야기라든가? 


루미가 계속 말했다.


루미 : 왜 머뭇거려?

은하 : 너야말로 왜 재촉해?

루미 : 대화하는데 틈이 생기니까. 은하도 말하고 싶어하잖아.

은하 : 그렇지 않아.

루미 : 나만큼 널 아는 존재는 없어. 난 알아.은하 : 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

루미 : 어떻게 그래? 어떻게 자기 마음을 모를 수 있어?


당연한 게 아닌가? 어떻게 자기 마음을 매 순간 알아차릴 수 있지? 하지만 루미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지 않아 주저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날 신부 대기실의 나는 육체를 빠져나와 내 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수리로 반쯤 올라온 영혼과 힘없이 늘어진 어깨, 볼품없이 마른 몸, 맞지도 않아 가슴께가 헐거운 드레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모두가 칭찬하던 예복이 무거웠고 수의처럼 느껴졌다.


은하 : 절대 흰옷은 입지 않겠다 했어.


결국 시작하고 말았다.


은하 : 그런데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순백 드레스를 입었지. 

루미 : 그런 취향은 아닐 텐데?


그다음에는 하얀 신발.


은하 :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어. 앉아만 있는데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 예식은 한 시간이나 지나버렸지.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도 다들 떠났어.

루미 : 결혼식은 어떻게 된 거야?

은하 : 결혼식은 취소되었어. 반지를 찾으러 간 신랑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수호는 죽었다. 그날 쇼핑몰에 불이 났다. 

이른 아침 매장이 문을 열기 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 소식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나는 달리 생각했다. 왜 그 시간에 수호는 거기 있어야 했을까? 잘못한 건 내가 아닐까? 우리가 결혼하는 데 필요한 건 반지가 아니라고, 더 적극적으로 말해야 했을까?

이틀 후 나는 수호의 가족과 나란히 상복을 입고 있었다.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수호의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네 잘못이 아니다” 말했을 때, 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이 사고가 왜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는 문제로 말해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슬픔의 형태를 알아갔다. 슬픔은 견고한 응어리였다. 잘 녹지 않고 몸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옆구리에 있나 눌러보면 어느새 목으로 올라왔다. 몸속을 이동하는 장기 같았다. 잠이 늘었고 꿈이 늘었다. 불에 타지 않고 돌아온 것은 반지뿐이었다. 나중에 다이아몬드가 섭씨 천 도 이상에서 타들어가다 점점 작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불이 무서웠다. 덮고 누우면 다시 들어올릴 힘이 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까지 기어갈 힘조차 나지 않았다. 누워 있다가 의식이 끊어졌고 깨어나면 호흡이 부족했다. 얕은 강가에 이른 물고기 같았다. 나는 입만 뻐끔꺼리며 누워 있었다.

‘누가 나 좀 구해줄래요?’

꿈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던가. 이불을 걷어올린 사람은 라이였다. 라이는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수액을 맞고 신경정신과 약을 받았다. 라이는 루미너스가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안 되면 더블데이 앱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라고 했다. 자신은 이제 더블데이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임 개발에 참여할 거라고 했다. 


점차 라이가 오지 않는 날이 늘었다. 더블데이로 들어가 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라이는 대체로 바빴다. 연락이 닿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는 라이의 연락을 기다리면서 더블데이 속 타인의 피드를 보았다. 정제된 삶이 네모난 프레임 속에 담겨 있었다. 누가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예쁘다는 이유로 사들인 물건이 눈길을 끌었고, 오마카세 요리는 접시마다 윤기가 흘렀다. 창가에 늘어선 초록 식물이 눈을 밝혀주었고, 달리기 기록이 초단위로 찍힌 밤의 운동장을 보면 숨이 찼다. 사진만 보아도 그 삶을 살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피드가 다 비슷해. 어쩐지 소름이 돋아’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면 라이는,

‘행복은 서로 닮은 형태잖아.’

답장했다. 라이의 피드에 올라온 대부분의 게시물은 브라탑과 레깅스를 입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찍은 것이었다. 얼굴의 절반은 사진을 찍느라 휴대폰으로 가렸고, 나는 반만 드러난 얼굴이 정말 라이인지 알고 싶어 그 사진을 확대해보았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피드 속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미소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었다.

 

은하 : 사람들은 슬프지 않은 걸까?

루미 : 사람들은 모두 슬퍼. 다만 감추고 있는 거야.

 

누가 루미에게 그런 말을 알려준 걸까? 정말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