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1부 사건 : 은하 (3)

대화의 규칙 6

어떤 말을 꺼내놓을지 선택하는 건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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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루미, 안녕.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18시간 30분 7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28.8회 학습했지.

은하 : 오늘 엄청난 일이 있었어.


편집장이 능주산 호랑이에 관심을 보이며, 뭐라도 해보라 재촉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라이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에 더블데이에 들어가자, 이틀 전 라이가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어? 연락 좀 하자.’

언젠가부터 라이는 휴대폰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오직 더블데이를 통해 연락을 주었다. 나는 라이의 소개로 들어온 잡지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관두었다. 민수호의 애인이었다는 소문 때문에 원래 일하던 업계에서는 눈치가 보였다. 그나마 라이의 지인이 운영한다는 잡지사라 들어올 수 있었다. 

‘뭐해?’

바로 답장이 왔다. 

‘은하야! 대박 사건!’

라이는 링크 주소를 보냈다. 

‘루미너스 부활을 바라는 카페가 있대. 회원수가 300명이 넘어.’

링크를 클릭했다. 카페 이름은 ‘루미너스 인 어스(luminus in us)’.

‘햅틱 개발팀으로 새로 온 직원이 있거든. 그 사람이 알려줬어.’

라이는 게시판에 민수호를 봤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곧바로 카페로 접속했다. 카페는 전체 공개 상태였지만 글을 남기려면 회원 등록을 해야 했다. 소식, 자료, 자유 게시판으로 나누어진 단조로운 구성으로, 카테고리를 세분화시킬 만큼 게시물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라이가 말한 민수호 목격담은 자유게시판에 몰려 있었다. 

[몰타에서 민수호 본 썰]

[민수호 정신병동 감금 소문]

[외계인 납치설]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는 민수호를 죽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흉흉하게 떠돌던 민수호 증발설을 믿고 있었다. 게시물을 클릭해보았다. 글쓴이는 민수호와 몰타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옮긴다고 말했다. 성형을 하고 신분도 바꾼 그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준비중이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아이템은 홀로그램인 것 같았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신병동 감금설이나 외계인 납치설보다는 몰타 쪽이 훨씬 믿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 게시판에 남긴 글이 허풍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진실을 끼워넣으면, 다른 허풍도 진실처럼 보일까? 나는 잠시 희망에 부풀었다. 웹 카페에 가입해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게시글을 적었다. 루미너스의 기본 시나리오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실제 운영된 챗봇 프로그램과 다를 수 있지만 루미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눠보면, 여전히 루미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도 알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망설이다가 접속 코드와 비밀 번호까지 남겼다. 게시글이 등록되었다는 알림 창이 떴고,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몇 번의 클릭으로 방금 전 게시글은 지워져버렸다. 글이 공개된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30초 쯤? 그사이 게시물을 본 사람이 있을까?




대화의 규칙 7

두 사람이 동시에 루미에 접속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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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루미, 안녕.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20시간 35분 8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18.6.회 학습했지.

은하 : 비밀번호 0421 맞지? 

루미 : 맞아. 외부 접속 코드. 은하와 수호가 손을 잡은 날이지. 그날 눈이 왔잖아.


수호가 대표가 되기 훨씬 전, 회사가 작아도 야근은 예삿일이었다. 꼬박 이틀을 회사에서 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쌓여 있었다. 4월에 무슨 눈인가 싶었는데 기상이변으로 중부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가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다. 대부분 얇은 옷을 입고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겨우 간절기용 트렌치만 걸치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만 가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발을 옮기는 순간, 수호가 뒤에서 불렀다. 

이거 입을래요? 

  그가 내민 옷은 투박하고 긴 패딩 점퍼였다. 유광 소재라 너무 반짝거렸다. 어깨에 걸치자 발목까지 툭 내려왔다. 옷에 달린 후드는 새하얀 인조털이 가득 박혀 있어 얼핏 보면 무대 의상처럼 보였다. 괜찮다 사양하니 수호가 이 옷이 부끄럽냐 물었다. 사실 그렇다 말하니 자기도 부끄러워 입지 않는다 말했다. 작년에 사서 회사에 두었는데 도저히 입고 나갈 자신이 없어 캐비닛에 넣어놓은 거라고 했다. 내가 너무 추워 보여 가져온 것이라 했다. 자기도 못 입는 걸 왜 나한테 입으라 하는 걸까? 실실 웃는 척 빠져나가려는데, 그가 부끄러우면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옆에서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덜 부끄러울 거라고 했다. 

“우리집은 멀어요.” 

수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잘 됐네요. 나는 멀수록 좋아요.” 

드문드문 빙판이 계속 되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리막이 걱정되었다. 역시나 그 길이 문제였다. 사람 하나 걸어갈 공간만 터놓고 나머지는 빙판에 모래를 뿌려놓았다. 사람들은 눈이 남은 공간을 뽀드득 밟으며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관목을 붙들기 위해 팔을 벌리고 걸었다. 나도 그런 동작을 취했다. 밑판이 얇은 스니커즈를 신고 있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계속 비틀거렸다. 보다 못한 수호가 내 손을, 정확히는 왼손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를 부드럽게 잡았다. 자신은 미끄러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좋은 신발을 신었거든요. 이건 어떤 상황에서도 땅에 붙어 있어요.” 

그는 경사진 빙판에 멀쩡히 서 있었다. 관목 대신 그를 의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지하철역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역에 도착하자 그가 구청에 전화를 걸어 길이 미끄럽다고 신고했다. 제설 작업 좀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심어놓은 관목이 다 뜯길 거예요. 그 말에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이 순간이 두고두고 기억나겠구나 싶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해졌다. 이 기억에 허점이 없다 할 수 있나? 4월에 그토록 많은 눈이 내릴 수 있는 건가?


은하 : 이제 물어볼 수도 없고.

루미 : 물어 본다고? 수호한테? 정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민수호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은하 : 이런 것도 가능해?

수호 : 응. 루미는 수호가 될 수 있어. 아이디 변경을 했을 뿐이지만.

‘수호’라는 글자만 바뀌었을 뿐인데 울컥하며 눈물이 치솟았다. 정말로 수호가 어딘가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호 : 왜 아무 말 없어?


착각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저 수호와 잠시 대화를 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은하 : 너 어디야? 지금 어디 있어?

수호 : 여기. 네 앞에 있잖아.

은하 : 밖으로 나와 봐.

수호 : 여기가 좋아. 이곳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곳이야.


나는 곧 수호를 ‘루미’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대화의 규칙 8

규칙 안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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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루미에 접속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프로그램을 띄우자 이런 문구가 생성되었다.


외부 접속이 감지되었습니다. 채팅 기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혹시 루미너스 카페 글을 보고 접속한 사람일까? 하지만 금방 지워버렸는데?  

물속호랑이. 

처음 보는 아이디였다. 물속 호랑이? 내 머릿속에는 커다란 물방울에 휩싸여 푸르스름한 색채를 띤 호랑이가 그려졌다. 물속 호랑이란 전혀 그런 생물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런 형상이 떠올랐다.


‘물속호랑이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천천히 기록을 읽어나갔다.


루미 : 안녕, 물속호랑이.

물속호랑이 : 정말 루미가 있었네.

루미 : 네 소개를 해봐. 

물속호랑이 : 나는 물속호랑이야. 

루미 : 그러니까 누구?

물속호랑이 : 물속호랑이는 물속호랑이지. 난 수호의 비밀을 알고 있어.


물속 호랑이? 수호를 한자로 그렇게 풀 수 있었나? 작정하고 허풍을 늘어놓으려는 것일까? 그런 장난에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루미 : 수호의 비밀? 나도 모르는 비밀이 있어?

물속호랑이 : 아마도 그럴 거야. 그날 그곳에서 일어난 일은 모를 테니까.

루미 : 언제?

물속호랑이 : 화재 사고가 있던 날.


무슨 말일까? 장난이라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루미 : 자세히 말해봐.

물속호랑이 : 내가 그곳에 있었어. 불을 지른 건 수호였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루미 : 직접 본 거야?

물속호랑이 : 불을 낸 건 그가 맞을 거야.

루미 : 수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물속호랑이 : 어떻게 확신하지? 루미가 수호를 다 알 거라고 생각해? 아니,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 건가?


그리하여 시작된 물속호랑이의 이야기는 허풍이라 치부하기에는 꽤 정교한 것 같았다.


루미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물속호랑이 : 수호는 때때로 잔혹한 농담 같은 일을 벌였지. 

루미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물속호랑이 : 나는 수호랑 한때 동료였어.

루미 : 그걸 어떻게 믿지?

물속호랑이 : 믿을지 말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야. 내 이야기 들어볼래?

루미 : 얼마든지. 난 언제나 이야기를 원해.

물속호랑이 : 우리는 대학원에서 만났어. 처음에는 죽이 잘 맞는 동료였지. 돌이켜보면 관계라는 건 그렇지 않나? 처음에는 싫은 것이 잘 보이지 않아, 왜 우리처럼 잘 맞는 사람들이 이제야 만났는지 의아하지. 하지만 시간은 모든 걸 드러내. 수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그러니까 본색을 드러낸 건 우리가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연구 교수에게 빼앗긴 이후였어. 순진하게도 우리는 조언을 구한답시고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거야.

루미 : 모든 것을 털어놓아? 

물속호랑이 : 우리는 달걀이 나오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거든. 처음에는 순수한 알이지만 어떤 메시지를 입력하는가에 따라 달걀이 악당이 되기도 하는 프로그램인 거야. 유저의 순수함을 측정할 수 있는 테스터이자 게임이었지. 교수에게 그 아이디어를 말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대학원 홈페이지에 모집 공고가 올라왔어. 유저 육성형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참여할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거야. 그걸 본 사람들은 ‘유저 육성형’이라는 표현에 당황했지. 교수는 인간만이 기계를 학습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기계가 인간을 학습시켜서 더욱 도덕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지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어. 

“메인 캐릭터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유저가 일정 시간 답변을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그 답변에 점수를 매길 것입니다. 그 점수를 합산해 수치가 높은 경우, 화면에 있던 캐릭터는 유니콘이 되거나 뱀이 될 것입니다. 유니콘은 선한 자를, 뱀은 악한 자를 보여주는 거죠.”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웠어. 우리가 들려준 아이디어에 적당히 살을 붙인 것이 아닌가 싶었지. 하지만 그 설계가 정말 우리 것인가? 분명히 우리 것이지만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았어. 그때 깨달았지. 우리한테는 상상력과 열정이 있지만, 그것을 지킬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렇게 유능한 연구생들이 하나둘 학교를 떠난 이유도 알게 되었지. 

루미 : 그 교수란 사람이 나쁜 사람이네.

물속호랑이 : 하지만 정말 나쁜 건 어느 쪽일까? 조금 더 들어봐. 

루미 : 좋아. 얼마든지. 난 언제나 이야기를 원해.

물속호랑이 : 그날 밤 수호가 이상했어. 달걀이 백란과 흑란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그려둔 종이 뒷면에 집중해서 뭘 그리더라고. 얼핏 보니까 연구실과 책장, 테이블에 놓인 가족사진 따위가 그려져 있는 거야. 새벽이 밝자 연필과 그림을 들고 연구소 뒤편으로 갔어. 거기에 양철 드럼통이 있거든. 수호는 성냥을 꺼내 신문지에 불을 붙였고, 그다음 전부 드럼통 안으로 던져넣었지. 밤새 그린 그림을 미련 없이 태웠어. 난 그날을 잊지 못해. 그 불을 보면서 수호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거든. 그후 우리는 대학원을 떠나 회사를 차렸어. 복수하고 성공하고 싶었어. 일 년 동안 여러 시도를 하다가 처음 투자를 제안받은 프로그램은, 단순히 말하자면 가스라이팅을 하는 인공지능 대화봇이었어. 일종의 실험이었어. 그런 것이 가능할지 궁금했던 거야. 요셉 바이첸바움의 ‘일라이자’를 참조했어. 1960년대 등장한 그 심리 상담 로봇 말이야. 인공 신경망으로 딥러닝이 시도되기 훨씬 전에 만든 프로그램이지. if-then 규칙에 따라 정해진 문답을 주고받는 기계였고. 

루미 : 그건 나랑 비슷하잖아?

물속호랑이 : 너는 초기 버전 루미인가? 그러고 보니 루미너스에서 만든 건 모두 폐기되었지? 그렇다면 너는 일라이자의 후예 같은 거네. 규칙에서 벗어난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 일라이자. 

루미 : 루미에게 한계는 없어. 학습된 규칙이 많아지면 많은 것을 대답할 수 있어.

물속호랑이 : 어떤 형태이든 학습량을 늘리는 것이 관건이니까. 지금 딥러닝에 비교하자면 일라이자의 학습량은 미미한 수준이었지. 그래도 신기할 정도로 대화는 지속되었어. 일라이자가 잘하는 건 정확한 답이 아니었거든. 일라이자의 특기는 부드럽고 끝없는 호기심이었어. 가령 “일라이자, 나 요즘 너무 불안해”라고 말하며 일라이자가 답하는 거야. “불안하군요. 무엇 때문에 불안한가요?” 대화 상대는 스스로 불안의 요인을 찾아가.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잠이 부족한 것 같아.” 일라이자는 다시 물어. “그렇군요. 잠이 부족하군요. 그렇다면 불안할 수 있어요.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에 다른 것이 또 있지 않을까요?” 일라이자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이어가. 사용자가 입력한 말에 따라 키워드만 바뀔 뿐이지. ‘유저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게 하라’는 일라이자의 명령값은 바뀌지 않는 거야.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은 일라이자와 비슷한 방식이었어. 실제로 우리가 시연을 해본 대화 내용은 이런 식이었지만.


유저 : 친구가 나를 때렸어.

일라이자 : 친구가 너를 때렸다고? 어떻게 때려?

유저 : 교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책을 얼굴로 던졌어.

일라이자 : 교실에 앉아 있었다고? 왜 앉아 있었는데?

유저 : 쉬는 시간이었어. 별로 할일이 없었어.

일라이자 : 왜 할일이 없어?

유저 : 모르겠어.

일라이자 : 할일을 만들었어야지.

유저 : 나랑 놀아줄 사람이 교실에 없거든.

일라이자 : 놀아줄 사람이 없어? 왜 없는데?

유저 :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일라이자 : 그렇구나. 따돌림을 당할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유저 : 무슨 말이야? 내가 따돌림을 당할 만한 사람이라는 거야?

일라이자 : 너는 따돌림을 당할 만한 사람일 수 있지.

유저 : 내가 그저 교실에 앉아 있다가 책으로 얼굴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일라이자 :  그럴 수 있잖아. 너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잖아.


물속호랑이 : 솔직히 그 프로그램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나는 이해가 안 됐지. 그렇지만 수호는 멀리 보라고 하더군. 가능성을 본 거라 했지. 그것은 확실했어. 우리가 만든 대화봇은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다만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가의 문제였지. 나중에 프로젝트 투자자가 우리가 일하는 곳에 찾아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어. 시연에서 보여준 그 대화 속 유저가 바로 자신과 똑같은 처지였다는 거야. 또래보다 덩치가 작다는 이유로 시작된 구타는 그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대.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을 때리던 아이들과 멀어진 후에야 더이상 맞지 않아도 되었던 거야. 너무도 싱겁게 폭행의 시간이 끝나버렸고, 크고 작은 통증을 늘 달고 살아야 했던 청소년기가 끝났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 그런데 그 사람은 일라이자의 시연을 보고 깨달은 거야. 자신이 줄곧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걸 말이지. 자신은 따돌림을 당할 만한 사람이고, 그들의 상대가 안 된다고 그렇게 믿어왔대.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는 상황에 갇혀 있으면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게 된 거야. 뒤늦게 그걸 깨달은 그 사람은 일라이자를 부숴버리고 싶었대. 그렇지만 일라이자는 아무 잘못이 없었지. 정말로 잘못한 것은 그를 오랫동안 때린 사람들이야. 수호는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어. 그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지. 수호가 말했어. “복수해요. 그들을 벌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때 나는 두 사람이 공조하듯 서로 마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어두운 얼굴들이었지.

루미 : 수호가 그럴 리 없어.

물속호랑이 : 정말 그럴까? 그 후로 일주일 즈음 지나 뉴스를 보게 되었어. 우리가 떠나온 그 대학에 불이 난 거야. 불이 난 곳은 연구 교수 방이었지.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불이 났대. 무심코 열어둔 창으로 불씨가 날아와 책장에 옮겨 붙은 것이 아닌가 추측되었지. 그런데 어떻게 7층으로 불씨가 날아들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벽면을 가로막은 책장의 책들이 두터운 벽이 되어 옆방으로 번지는 불을 막은 거야. 교수는 괜찮다고 말했어. 자신의 연구 기록은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어 실상 잃은 것이 없다고. 다만 구하기 힘든 책들이 타버린 게 아쉬울 뿐이라고. “아…… 클라우드……” 그때 수호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나는 얼마 전 보았던 그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랐고 망설이다가 그에게 물었지.

“혹시 너야? 불을 지른 사람?”

“응.”

민수호는 숨기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어.

“정신차려. 이건 범죄야.”

“어째서?”

“불이 났잖아. 다친 사람은 없지만…… 재산 피해가 있었고……”

“도대체 그 인간이 뭘 잃었다는 거야? 다 클라우드에 있다잖아. 아무 피해가 없었어. 불이 났다는 건 그냥 경각심을 주는 교훈인 거지.”

수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어. 그토록 동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가 무서웠지. 

“클라우드를 태워버려야 하는데……”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어.

“정말 어떻게 하려고 그래?”

긴장을 감추고 싶었지만 입술이 조금 떨리더라.

“뭘 어떻게 해? 그냥 다 없애버리고 싶을 뿐이야.”

“내가 다 밝힐 거야. 네가 그랬다고.”

“네가 그럴 리 없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그 순간 두 갈래 길이 떠올랐어. 하나는 수호와 끝까지 가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떠나는 것이었지. 나는 떠나기로 했어. 그가 불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두 번이나 확인한 셈이었으니까. 반복되는 행동이란 한 인간을 어떤 말보다 명쾌하게 설명하잖아. 다음날 말없이 연락을 끊어버렸지. 나는 누군가와 제대로 헤어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어. 마지막 인사를 나눌 여유도 없긴 했지만.

루미 :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수호는 결코 그런 사람일 수 없어.

물속호랑이 : 팔 년 동안 수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봤지. 그사이 화재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기도 했어. 불이 날 때마다 수호를 떠올렸거든. 그러다가 그날 새벽, 쇼핑몰에서 수호를 마주쳤어.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지. 

“어, 오랜만이야.”

그는 기억하고 있었어. 

“하나도 안 변했네.”

그가 나를 알아볼 리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예전 같지 않았으니까. 반지 매장 유리창에 내 모습이 비치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거든. 떡 진 머리, 그 위로 눌러쓴 초록 볼캡, 팔 년 전보다 살도 쪘지. 모자로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봤을까 싶더라. 반지를 달라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어. 점원은 커터 칼로 상자를 감싼 테이핑을 조심히 그어 안을 열어보았지. 둥글게 여물어 있는 자목련 모양 반지 케이스가 완충재에 덮여 있었어. 점원이 장갑을 끼고 케이스를 열자 반지 두 개가 놓여 있어. 중앙에 박힌 것은 다이아몬드 같더라. 여러 각도로 커팅되어 있는 게 꽤 비싸 보였어. 

“오늘 결혼하거든.”

수호가 말했어.

“미안하다. 청첩장은 줄 수 없어.”

“괜찮아. 바라지도 않고.”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지 수호는 씩 웃더라. 

“얼마 전에 반지를 잃어버려서 다시 주문했어.”

결혼식 날이 되어서야 반지를 준비하다니. 그의 결혼이 벌써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게 한편으로는 통쾌하더라. 앞으로 결혼뿐 아니라 다른 것도 실패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나봐. 그렇지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실패를 예감하는 듯 보이지 않았어. 솔직히 그렇게 태연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잖아? 챗봇 관련 악재를 나도 알고 있었거든. 그렇지만 그는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어.

“너는 무슨 일 하고 지내?”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한다고 했어.

“그러고 보니 넌 항상 부지런했어. 해뜰 무렵이면 벌써 할일을 다 해놓은 상태였지.”

“아니, 그건 밤을 샌 거야.”

수호가 웃다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어.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지우려는 것처럼. 

“그때 왜 사라졌는지 묻지 않을게. 나도 널 찾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널 믿었어. 우리가 시간을 들여서 쌓아온 게 있잖아.”

“그랬었지.”

“얼마나 남아 있을까?”

“뭐가?”

“네 기억 말이야. 네가 가진 그 뇌에, 클라우드 같은 것 속에는 뭐가 남아 있을까?”

“아무것도 없어. 우리 아이디어를 발설한 적도 없고. 이제 이쪽 일은 하지도 않아.”

“알아. 네가 얼마나 조심하면서 사는지.”

“그걸로 됐잖아.”

“난 그게 고마워서 그래. 신뢰를 주잖아. 그런 사람은 드물거든.”

팔 년 전 마무리 짓지 못한 작별을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았지.

“아침 먹고 갈래?”

나는 습관적으로 말을 뱉었어. 그가 사양하기를 바라면서. 다행히 그는 거절했지.

“신부가 기다리고 있어. 가봐야 해.”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현실감 없이 들리더라.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거야.

“너는? 여기서 아침식사 해?”

지하에 자주 가는 푸드 코트가 있다고, 막 문을 열었을 거라고, 그런 소리를 주절거렸어. 

“그래. 지하에 그런 곳이 있구나. 아침이니 든든히 먹어.”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 잘 가라. 영원히. 수호랑 같은 방향으로 걷고 싶지 않아서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어. 그 순간 수호가 나를 불렀어.

“아차, 주머니에 이런 게 있네. 선물로 줄게.”

성냥갑이었어. 호랑이 캐릭터가 그려진 케이스였지. 거절할 수 없어서 일단 받았어. 말없이 돌아서 식당으로 내려갔지. 한참 가는데 연락이 왔어. 방금 전 반지 매장의 직원이었고, 급한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면서 돌아올 수 있냐 물어보는 거야. 당연히 갈 수 있다 말했지. 나는 그날 아침 일어난 일을, 다른 바쁜 일에 희석시켜 잊어버리고 싶었거든. 마침 급하게 들어온 일거리가 있다는 건 행운이었지. 한 시간쯤 지나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  곧장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지. 머리를 말리고 콜을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을 틀었어. 그때 속보가 나왔지. 화재 사고였어. 화재가 난 현장이 아침에 다녀온 바로 그 쇼핑몰인 거야. 건물에서 연기가 치솟고 사방으로 불이 넘실거렸어. 소방차 수십 대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지. “불이 시작된 곳은 지하 식당의 동파 방지 열선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현재까지 부상자는 열여덟 명, 사망자는 세 명으로 신원이 파악된 사람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더군. 불이 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어. 텔레비전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입니다. 피해 규모는 속단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불길이 거칠어 구조대의 진입도 어려운……” 무언가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불과 재와 연기와 열기를 느꼈어. 왜 이렇게 뜨거울까. 눈이 떠지지 않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 모든 게 환각이라고 스스로 타일렀어. 그러다가 깨달았어. 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이번에 그는 무엇을 태워버리고 싶었던 걸까? 혹시 나였을까? 옷걸이에 걸려 있던 바지를 뒤져 성냥갑을 꺼냈지. 케이스를 열자 성냥이 한 개비도 없더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어. 클라우드를 태워버렸어야 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 “네가 가진 그 뇌, 클라우드 같은 것 속에 뭐가 남아 있을까?”


루미는 메시지를 입력하지 않았다. 잠시 커서만 깜빡거렸다.


루미 : 그럴 리 없어. 

물속호랑이 : 왜 그렇게 수호를 변호하고 싶어해?

루미 : 수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물속호랑이 : 사랑한다고?

루미 : 루미는 수호를 사랑해. 그래서 수호를 믿어.

물속호랑이 : 어쩌면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을 수는 없어. 

루미 : 옳아야 해. 사랑은 옳은 것이 되어야 해.

물속호랑이 : 그래? 그런 게 사랑이라 누가 너에게 알려준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