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1부 사건 : 수호 (2)

창작의 규칙 3

결말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


은하는 3년 전 죽었다. 화재 사고였다. 연기에 질식했다는 검시 결과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은하는 우그러져 아귀가 맞지 않게 된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한 뼘 열린 문틈으로 코와 입을 밀어넣은 채였다.


그날 은하는 스카프를 한 장 사달라고 했다. 그 이틀 전, 은하의 생일을 잊고 지나가버렸다. 은하는 이해했다. 너무 바쁘면 그럴 수도 있다면서 아무것도 필요 없다 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 일부러 시간을 비워 은하에게 쇼핑몰로 나오라 연락했다. 은하는 굳이 무언가를 사주고 싶다면 사계절 내내 가방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얇은 스카프를 선물해 달라 했다. 

은하는 매대 위 실크 스카프를 턱 아래 대어보면서, 의외로 베이지색이나 회색처럼 무난한 색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말하더니, 작은 별이 무수히 프린트 되어 있는 파란 스카프를 골랐다. 

“어때?”

뭐든지 다 어울린다고 말했다. 성의가 없는 대답처럼 들렸겠지만 사실이었다. 은하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없었다. 

“이걸로 할게. 더 둘러볼 시간도 없을 거야.”

“괜찮아. 시간 비워뒀어.”

“그럴 리가. 항상 바쁘잖아.”

그렇지 않다 말해도 소용없었다.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바쁘면 가도 돼.”

“안 간다니까.”

은하는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럼 위에 가볼래? 쇼핑몰에 서점이 생긴 거 알아? 오픈이라서 연필을 나눠준대.”

“고작 연필 하나 받으러?”

“고작이라니?”

은하가 씨익 웃었다. 여덟 개 앞니를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눈매를 둥그렇게 내렸다. 웃을 때마다 그 얼굴은 다른 사람인 양 신기로웠다. 그래서인가. 은하가 웃을 때마다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갈 거야, 말 거야?”

“서점이라면 한참 구경하겠지?”

“아마도?”

“난 여기서 기다릴게.”

은하는 혼자 8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사이 나는 별이 새겨진 스카프를 다시 구입하기 위해 쇼핑몰 1층으로 내려갔다. 매장 직원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똑같은 모양의 스카프를 살 수 있다며 이벤트 매장에 가보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쿠폰을 받으면 만원 정도 차이가 났다. 은하가 땅을 파면 그 돈이 나오냐고, 나를 떠밀었다. 서로 할일을 마치고 1층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내 손에는 스카프가 담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그즈음이면 은하의 손에도 연필 한 자루가 들려 있을 것이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은하의 자리에 놓인 수십 자루 연필을 떠올렸다. 은하는 무언가를 읽을 때, 책이든 신문이든 모든 문장에 엷은 줄을 긋는 버릇이 있었고, 연필은 은하가 일종의 난독이라고 할 만한 증상을 극복하게 한 도구였다. 우리가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하는 책이 읽히지 않는다며 툴툴거렸다. 쓰고 싶은 마음이 읽고 싶은 마음을 삼켜버리는 것 같다고 했다. 쓰는 동안에는 읽을 수 없고 읽는 동안에는 쓸 수 없으니 한쪽은 늘 다른 한쪽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책을 붙잡고 읽으려 할 때마다 눈동자가 어느새 책 바깥으로 벗어난다고 말했다. 

어느 날, 은하는 굉장한 방법을 찾아냈다면서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곧이어 고개를 숙이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이렇게 읽으면 책에 붙들려 있을 수 있다며 좋아했다. “연필은 나를 돌아오게 해. 정말 멋지지 않아?” 그런 소소한 발견에 놀라워하는 은하가 사랑스러웠다. “마법 도구 같아. 어릴 때는 싸구려 요술봉을 들고 놀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왜 휘둘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른이 된 은하는 자신이 찾은 마법의 도구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이번에 은하는 어떤 연필을 가져올까? 은색이나 보라색? 큐빅 참이 달린 것? 그 연필이 은하의 손에 들리고, 밑줄을 그어갈 때마다 작은 참이 영롱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은하의 연필이 파랑색이고 지우개가 달려 있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은하의 가방 속에 새 연필 한 자루가 불타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불은 쇼핑몰 지하 주차장 깨진 바닥 공사를 위해 설치해놓은 가벽에서 시작되었다. 공사비를 줄이다보니 현장을 막는 가벽은 화기에 취약한 것을 쓴 것이었다. 불이 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불은 번져 주차장 한쪽에 쌓아놓은 종이 박스로 옮겨 붙었다. 순식간에 연기가 주차장에 퍼졌다. 소화기를 들고 온 경비원은 불길을 잡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점차 연기가 위로 솟았다. 불이 났다는 외침이 들리자 사람들은 밖으로 통하는 문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위층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내려왔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나 역시 가까스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 펑 터지더니 순식간에 까만 연기가 3층 높이까지 솟았다. 그 순간 은하가 8층에 있으리란 사실이, 아직 불이 난 것을 모를 수 있으리란 생각이 스쳤다. 내 손목에는 스카프가 들어 있는 쇼핑백 손잡이가 수갑처럼 감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맡아달라 부탁했다. “미쳤어요? 지금 어딜 들어가요?” 그가 내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으나, 나는 뒤로 밀치듯 떼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방차 사이렌소리가 꿈결처럼 들렸다. 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나아갔다. 아직 연기가 닿지 않은 왼쪽 비상구로 올라가면 8층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층 중앙의 인공 분수에 팔을 담가 소매를 적시고, 물기가 흥건한 옷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소리를 지르며 계단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에 떠밀렸다. 난간을 붙잡고 오른팔로 사람들을 옆으로 쓸어내며 올라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이 사라지고 숫자가 보였다. 8층이었다. 그러나 비상문이 닫혀 있었다. 문 너머에서 쾅쾅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지금 문이 안 열려요.”

“왜 이래요? 119도 먹통이잖아요.” 

그런 목소리들. 그 틈에서 은하의 목소리를 찾으려 애썼다. 

“은하야, 거기 있어?” 

문 너머에서 “은하? 은하?” 이름을 묻는 말들이 퍼졌다. “저예요 제가 은하예요” 목소리가 들리고 은하가 “수호야?” 내 이름을 부르자 긴장이 풀어져 주저앉아버렸다.  

“문이 이상해. 열리지 않아.”

그 말대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모두들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은하를 비롯해 8층 비상문 근처에 고립된 이들은 안에서 밖으로 문을 밀어냈다. 나는 그 힘을 받아 문 손잡이를 끌어 당겼다. 퍽, 하더니 문틈이 살짝 벌어졌다. 은하가 보였다. 은하 얼굴이 절반 보였다. 

“왜 이러지? 이상해. 문이 왜 안 열려?” 

은하가 문틈 사이로 손가락을 뻗었다. 나는 그 손가락을 잡았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퍼석하고 차가웠다. “다시 해볼게.” 문을 밀고 당겼다. 그러나 문은 어긋난 채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문틈으로 은하의 눈이 보였다. 

“이거 안 열리는 것 같아.”

은하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문틈으로 다시 뻗었다. 손가락 위로 은하의 눈이 반짝거렸다. 눈동자가 번진 듯 흐렸고 눈물이 차 있었다.  

“수호야. 내려가.” 

나는 힘을 주어 품안으로 문을 끌어당겼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내려가서 방법을 찾아줘.” 

우리가 1층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 8층 비상구 문을 사이에 두고 절반만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쯤 우리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로가 가져온 것을, 연필과 스카프를 꺼내 보이고 있어야 했다. 여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문 너머에서 웅성거렸다.

“이봐요. 빨리 내려가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잖아요.”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말해줘요. 얼른 가서 도와달라고 해요.”

나는 문틈으로 손을 욱여넣었다. 손등 피부가 문에 쓸려 얇게 벗겨졌다. 맞은편에서 은하가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가 닿도록 깍지를 끼고 몇 초 정도 덜덜 떨며 잡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훗날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추억이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기다려. 금방 올게.”

그렇게 말하고 은하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돌아설 때 은하가 고마워, 라고 말했다. 나는 기다려, 라고 크게 대답했다. 미친듯이 발을 굴려 3층까지 내려왔을 때, 더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속도를 내어 겨우 2층까지 내려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옆에 닿자마자 모든 장기가 막혀버린 듯 갑갑했다. 그때 창문이 깨져 있는 걸 발견했다. 마치 그곳으로 탈출하라는 듯 뚫어놓은 것 같았다.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곧바로 몸을 날렸다. 나는 아래로 추락했다. 문 너머에 있던 사람들은 나에게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했었다. 나는 그 순간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내 몸은 창밖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땅에 부딪혔다. 왼쪽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당한 듯 몸이 절로 구부러졌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구조 요원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 나는 안에 사람이 있다고 웅얼거리면서, 몇 층이냐 묻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다음의 일들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린 듯 기억나지 않았다.



창작의 규칙 4

오래 숨겨 온 비밀을 끝내 발설하라


*


초록 남자는 옥상에 있었다. 

“또 여기 있었네요.”

내가 다가가자 초록 남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네. 저야 언제나 여기 있죠.”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초록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곳은 거리였다. 손바닥이 붉은 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봉투는 쓰레기로 가득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혹을 붙인 것 같았다. 출근길 주차장으로 들어오다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매번 눈길이 갔다. 이후 두어 달이 흘러 말을 걸 기회가 생겼다. 그가 회사 입구에 떨어진 컵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던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손에 컵을 들고 말없이 돌아보았다. 가까이 보니 우람한 체격과 달리 볼이 홀쭉했다. 피부에 들러붙은 기생충 따위가 그 하관의 영양분을 쏙 빨아먹은 듯 입과 턱 주변이 졸아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이마는 반듯해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를 타는군요.”

그가 날 보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초면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죄송합니다, 하더니 장갑 낀 손으로 입술을 긁적였다. 턱에 난 붉은 여드름 자국은 아마도 위생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손을 자꾸 얼굴에 가져간 탓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피부 문제까지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죄송합니다, 하고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초록색 옷을 입었네요, 라고 말했다. 

“네?”

“선생님은 초록색 옷을 입으셨어요. 저는 휠체어를 타고.”

그가 곰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쓰레기를 줍고 선생님은 출근합니다.”

우리의 대화는 어긋나 있었다. 그렇지만 꼭 들어맞는 대화를 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엇이든 말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커피 마십니까?”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마셨지만 초록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밀크입니까? 블랙입니까?”

“밀크로 할게요.” 

초록 남자는 옥상 구석에 있는 자판기로 가볍게 달려갔다.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잠시 후 종이컵에 담긴 연갈색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는 설탕 커피를 마셨다.

“이제 네 번 남았습니다.”

초록 남자는 나에게 커피를 열 번 사주기로 했고, 오늘이 여섯번째였다.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대가였다. 

한 달 전, 초록 남자는 화장실 타일에 낀 곰팡이를 떼어내고 있었다. 마침 화장실 입구에서 그를 발견한 내가 뭘 하느냐 물었더니, 그는 아무리 강한 약을 써도 죽지 않는 곰팡이가 있다면서 없애버리기 위해 특별한 것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마침 화장실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보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붉었다. 곰팡이를 먹는 젤리라고 했다. 그걸 타일에 붙이면 곰팡이가 사라질 거라고 했다. 젤리는 진득한 피처럼 보였다. 타일에 잘 달라붙지도 않았다.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떼어내면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결국 그 이상한 젤리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몇 시간 후 다시 화장실에 갔을 때,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연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글루 건을 사용해 타일 사이를 덮고 있었다. 그동안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 몰랐지만, 그날 나는 건물을 청소하는 이들이 모두 연보라색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건물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청소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색 옷을 입느냐 물었고, 관리인은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은 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정리를 하자면, 초록 남자는 건물에서 고용한 청소 인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화장실 타일에 낀 곰팡이를 제거할 의무는 없었다. 다음날, 초록 남자에게 내가 알아낸 것을 말하자, 그는 비밀로 해달라 부탁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마땅히 일할 곳이 없다면서. 돈도 받지 않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는 이 건물을 오가며 아들 또래로 보이는 이들을 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가끔 그들이 자신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넬 때 기쁘다고 했다. 나는 그의 사정을 대충 짐작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초록 남자는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커피를 열 번 사겠다고 했다. 커피 열 잔이란 보상이 없더라도 어디에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기어코 커피를 사주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는 점심시간마다 건물 옥상에 있을 테니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면 언제든 그곳에서 보자고 했다. 

그렇게 옥상에서 커피를 얻어 마시는 동안,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나에게 적당히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은하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소설 쓰는 컴퓨터는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은하 말이죠?”

“예. 그것 말입니다.”

그는 은하가 죽은 이의 이름을 빌린 창작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소설 쓰는 컴퓨터’라고 불렀다. 은하의 부모가 은하를 ‘소설 쓰는 창작 기계’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왜 은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나요?”

“이름을 부르면 너무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거든요.”

은하의 부모가 딸의 이름으로 그 프로그램을 부르지 않는 까닭도 같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착각을 즐기고 있었다. 은하, 은하, 부르다보면 은하가 아직 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란 여기 이곳에 그 이름을 가진 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은하를 은하라고 부르는 일처럼 초록 남자를 초록 남자로 부르는 일도 그랬다. 초록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멋대로 그를 ‘초록 남자’라 부르기로 했다.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습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초록 남자’라고 부르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이름입니까?”

“항상 초록색 옷을 입으시잖아요.”

“그렇다면 알맞은 이름이군요. 내 옷장에는 이런 옷이 백 벌은 넘게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를 초록 남자라고 부르다보니, 그것이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드디어 곰팡이를 제거했습니다.”

그가 커피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더니, 잠시 후 붉은 젤리를 꺼냈다. 동그랗게 뭉쳐진 젤리 안에 작고 검은 구슬이 들어 있었다. 

“이 안에 든 것이 곰팡이의 핵입니다. 타일 벽면에 기생하던 것을 드디어 여기로 옮겼죠.”

“그렇게 하면 곰팡이가 죽나요?”

“젤리 속 독을 먹고 서서히 죽습니다.”

“독이었군요.”

갑자기 그가 손가락에 달라붙은 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거리더니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독이긴 해도 이 정도는 사람한테 해가 되지 않아요.”

“많이 먹으면 문제가 생기겠죠?”

“그렇겠죠. 많이 먹으면 큰 일이 날 겁니다.”

그는 젤리를 콩알만큼 떼어 건네주었다.

“조금만 죽고 싶을 때 먹어봐요.”

“그게 어떻게 죽는 건가요?”

“다 죽지는 않고 조금만 죽는 거죠.”

마약 같은 건가 싶었다.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가 젤리를 떼어 또 입에 넣었다.

“방금 조금만 죽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가 껄껄 웃었다. 바람이 불어 빈 종이컵이 옥상 바닥을 굴렀다. 초록 남자는 떨어진 종이컵을 잡아 힘주어 구겼다. 그리고 선 자리 그대로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잠시 후 초록 남자는 젤리를 또 떼어 입에 넣었고, 이번에는 나도 손에 든 붉은 젤리를 혀 위에 올려보았다. 젤리에서는 딸기맛이 났다. 시중에서 파는 인공의 딸기맛이었다. 

“방금 당신도 조금만 죽고 싶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요.”

나는 웃지 않고 답했다. 

“지금은 조금도 죽을 수 없어요. 곧 중요한 이벤트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