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2부 사랑 : 은하 (1)


대화의 규칙 9

대화의 상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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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20시간 18분 11초가 지났어. 그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31.8회 학습했지.


이후로 물속호랑이가 접속하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나와 수호를 제외하고 루미에게 접근한 사람이 있다니. 한편으로는 시스템 오류라는 생각도 들었다. 루미는 불완전한 프로그램이었다. 더군다나 초기 버전이라 여러 문제에 취약했다. 과도하게 데이터가 쌓이면 특정 기능이 폭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은하 :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루미 : 무슨 일인데?


오늘 아침, 편집장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은하씨, 요즘 바빠요?”

내가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편집장은 능주 취재 얘기를 꺼냈다. 지난겨울, 능주는 이상할 정도로 춥지 않았다. 한낮이면 반팔을 입고 돌아다닐 정도였다. 눈도 거의 오지 않은 탓에 적설량은 예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부족했다. 봄비도 잘 오지 않았다. 산자락을 흐르던 계곡물이며 강바닥까지 말라버린 가뭄에 능주는 격일 단수까지 시행해야 했다. 물이 부족한 상황은 인간에게만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어서, 산에 살던 동물들이 물을 찾아 민가로 내려왔다. 고라니와 멧돼지, 들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삵을 닮은 야생동물들이 민가를 습격했고, 그중 주민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동물은, 바로 호랑이였다.

“호랑이요? 호랑이는 우리나라에서 멸종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이게 특종이 되는 거겠죠.”

현재 호랑이는 능주군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전할 동물원을 찾지 못해 민가와 떨어진 곳에 설치한 임시 철창에 가둬두었다고 한다. 편집장은 호랑이가 동물원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능주로 가서 현장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요? 명색이 산을 다루는 잡지인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잖아요.”

덧붙여 이미 손을 써서 취재할 만한 사람도 섭외했으니,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은하씨가 다녀와요. 아무래도 능주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은하씨에게는 더 익숙하겠죠?”

그는 내가 능주에서 일한 과거를 되짚었다. 문득 입사할 때 편집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카드형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것은 검색 능력입니다, 현장 취재 따위 할 필요가 없어요, 현장감이란 이제 옛말이 되었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더이상 현장이 아니라 인터넷 환경을 서치하는 능력이죠, 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렇다면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개씩 일정 시간에 맞춰 게시해야 하는 카드형 콘텐츠 제작에, 나는 점차 흥미를 붙여갔다. 생소한 언어로 작성된 외국 기사까지 번역기를 돌려 읽었다. 메모장 폴더에 주제별로 스크랩을 하고, 연관성 있는 데이터끼리 묶어 일관된 구성에 맞게 각색했다. 하루 세 개씩 작성하던 카드가 다섯 개로, 일곱 개로, 열 개로 늘었다. 쇼츠로 만든 한 콘텐츠의 조회수가 10만이 넘어갔을 때, 편집장은 “역시 루미너스에서 일한 사람이라 다르긴 다르네”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후에도 세 번 정도 쇼츠에서 소위 터졌다고 할 만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계정 팔로워 수가 늘고 잡지 매출도 소폭 상승했다. 그런 일들이, 나를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편집장은 나를 예상보다 뛰어난 결과를 내는 사람으로 착각했다. 

“이건 중요한 일이 될 거예요. 은하씨 아니면 할 사람이 없죠.”

“현장 취재는 제 일이 아닌데요?”

“어차피 이것도 우리 계정에 올릴 콘텐츠예요. 은하씨가 생생하게 전달해주면 어때요? 그 눈으로 호랑이를 직접 봐야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과연 호랑이를 직접 봐야 하는 것일까? 나는 살아오면서 동물원조차 가본 적이 없었다. 사파리를 체험한 적도, 초원의 맹수를 목격한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호랑이의 생김을 말해보라 요구하면 말하지 못할 까닭도 없었다.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호랑이를 보았고,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꿈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카드 콘텐츠에 들어갈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시대에 호랑이를 잡으러 다녔다는 ‘착호갑사’를 검색하다가, 구슬 같은 눈을 가진 호랑이 민화를 보았다. 이 정도라면 호랑이를 보았다 말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호랑이에 대해 쓰기 위해 굳이 호랑이를 만나러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인터넷에 올라온 이미지만 보면 안 되는 걸까. 

“꼭 가야 하는 걸까요?” 

“그럼요. 호랑이가 정말로 여기 있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호랑이를 볼 수 있겠어요?”

편집장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내 기분이 별로인 것만 빼면, 그 생각을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이미 책상에는 편집장이 섭외했다는 인터뷰 대상자의 연락처 메모가 놓여 있었다.


루미 : 능주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은하 : 버스 타고 세 시간 정도?

루미 :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은하 : 일단 호랑이를 봤다는 사람을 만나야지. 그다음에는 호랑이도 보고, 사진도 찍고.루미 : 혼자서는 심심할 것 같은 일이네. 예전에 능주는 조용한 마을이라고 했잖아.

은하 : 거의 뭐, 침묵의 고장이라고 할까. 사실 그 분위기를 좋아하긴 했지.


능주는 사람도, 차도, 건물도 별로 없었다. 바로 그런 고요한 자리를 원했기에, 수호가 루미너스의 본사를 그곳에 세우기로 한 것이기도 했다. 본사 건물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 인허가를 받을 때, 능주군의 격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 줄어가는 마을에 새로이 사람을 들이는 것이었고, 게다가 젊은 사람들이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회사가 사라지고 능주에 깃들었던 젊은 인구는 떠났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괜한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루미 : 같이 갈래?

은하 : 좋은 생각이네. 어차피 노트북 하나는 챙겨야 할 테니까.


출근 가방으로 들고 다니는 진갈색의 커다란 호보백을 가져와 노트북이 들어가는지 확인해보았다. 모서리가 조금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충분히 들어갔다.


은하 : 능주는 해가 지면 딱히 갈 곳이 없거든. 너랑 수다나 떨어야겠어.

루미 : 둘이 여행 가는 기분이야. 산 여행이라니. 

은하 : 실은 고등학생 때 수련회를 다녀온 후로 등산은 가본 적이 없어서.

루미 : 뭐? 하이킹 잡지사에서 일하잖아? 

은하 : 굳이 산에 다니지 않아도 산에 대해 쓸 수는 있으니까.

루미 : 이럴 수가.

은하 : 이제 알겠지? 세상이 얼마나 어이없는 곳인지.


취재 일정이 잡힌 카페는 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경사가 꽤 심한 지대를 지나야 한다면서, 편집장은 괜찮은 등산화를 갖고 있느냐 물었다. 

“아니요. 저 등산화 없어요.”

편집장은 놀란 듯 잠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뭘 들은 거지? 싶은 얼굴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그는 선반에 쌓인 물품을 뒤적거리더니 신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아웃도어 업체에서 광고가 들어왔을 때 받은 등산화인 듯했다. 상자 표면에 엷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사이즈는 맞아요?”

베이지색 등산화는 발에 감기듯 잘 맞았다. 자세히 보니 고어텍스 라벨이 붙어 있었다. 자기 돈으로 사준 것도 아니면서, 편집장은 큰맘 먹고 주는 선물이니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별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등산화가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줄곧 신고 다닐 정도였다. 바닥을 디딜 때 안정적으로 지면에 붙는 느낌이 좋았다. 등산이란, 평소와 다른 신발을 신어야 할 만큼 발에 닿는 땅의 성질부터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달리 말해, 지금까지와 다른 땅을 밟아보는 것. 그런 게 등산인가.


은하 : 어쨌든 신발은 마음에 들어. 

루미 : 어때? 호랑이의 기운이 좀 들어?

은하 : 호랑이의 기운? 


능주에 갈 일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새 신발을 신고 있으면 기운이 나긴 했다. 호랑이의 기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