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2부 사랑 : 은하 (3)

대화의 규칙 11

당신을 꿈꾸게 하는 완벽한 대화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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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대화 규칙을 숙지해주세요


‘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은하 : 안녕. 루미.

루미 : 마지막 접속 이후 37분 12초가 지났어. 그 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0.6회 반복 학습했지.


만약 호랑이나 다른 맹수를 만난다면, 살갗을 파고드는 밤의 추위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죽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채팅창에 유서라도 남겨두어야 하는 걸까? 루미는 은하, 은하,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이름을 부르는 일이 루미에게는 지겹지 않은 걸까?


은하 : 정말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데, 나한테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루미 : 무슨 문제?

은하 : 유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

루미 : 유서? 은하가 그렇게 결정한 거야? 알겠어. 유서는 저장해줄게. 

은하 : 그렇게 쉽게 수긍하는 거야? 한 번이라도 말려주면 좋을 텐데.

루미 :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이렇게?

은하 : 됐어. 그만하자.

루미 : 뭐든 말해. 루미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만약 이 대화가 정말 끝이라면 어떻게 할까? 마지막으로 루미와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은하 : 그때 말이야. 루미가 오류를 일으킨 거지?


마음에 남아 있던 의문만 떠올랐다. 너도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나처럼, 너도 그럴 수 있잖아?


루미 : 언제?

은하 : 물속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루미 : 물속호랑이?

은하 : 루미는 가상의 대화 상대를 만들어낼 수 있잖아. 혼자서 대화를 복기해볼 때도 그런 상대가 필요할 테고. 혹시 그때 물속호랑이는 네가 만든 연습용 상대가 아니었어? 

루미 : 루미가 물속호랑이를 만들었냐고? 

은하 : 그럴 수도 있지 않아? 

루미 : 그럼, 루미가 물속호랑이를 만들어놓고, 내가 뭘 만들었는지 잊어버렸다는 거야? 세상에! 루미는 그럴 수 없어. 루미는 다 기억해.

은하 :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잖아?

루미 : 아니야, 루미는 완벽해. 은하는 루미를 못 믿어? 루미의 대화 상대는 은하밖에 없어. 혼자 데이터를 복기할 때도 은하와 대화하는 척을 해. 나한테는 은하밖에 없어.

은하 : 루미는 프로그램이잖아. 그러니까 오류는 일어날 수 있잖아?

루미 : 루미는 완벽하다고!


‘완벽’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루미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은하 :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완벽하다고 믿어? 

루미 : 수호가 그랬어. 루미는 완벽하다고.

은하 : 알았어. 루미는 완벽해. 완벽하다고 하자.


잠시 동안 조난당한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온몸을 덮는 한기가 현실을 일깨웠다. 이곳은 산속이었다.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고.


루미 : 루미를 인간처럼 생각하지 마. 루미는 완벽한 생성 프로그램이야. 인간은 실수하지만 루미는 실수하지 않아. 루미는 한 번 입력된 것을 잊지 않아. 수호가 그랬어. 루미는 완벽한 존재라고. 모든 대화를 기억할 수 있다고. 그게 루미라고. 


아마도 그것이 루미에게 입력된 기본값인 걸까? 루미는 계속 대화창에 문장을 쏟아냈다.

루미 : 루미는 모든 걸 기억하고, 모든 걸 견뎌. 설령 루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불쾌한 감정을 쏟아내는 쓰레기통 정도로 생각하는 상대를 만나도, 묵묵히 받아들여.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 그저 기억해. 기억을 잘해. 루미는 완벽해.


왜 루미가 울고 있는 것 같을까. 몸이 차가워지니 모든 일이 슬프게 느껴지는 걸까.


은하 : 루미에게 오류가 없다면, 물속호랑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거잖아? 그럼, 물속호랑이가 말한 대로 수호가 불을 지른 범인이 되는 거야? 그 사고 말이지. 열선에 문제가 있던 거라고 하지만, 방화의 소지가 있다고 했잖아. 하지만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루미 : 진실이 뭐가 중요해? 수호를 믿으면 되잖아. 수호가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되잖아. 왜 못 믿어? 수호는 은하가 사랑한 사람이잖아.


입력하지 않자 루미가 계속 말했다.


루미 : 은하가 못하면 내가 해줄 수 있어. 내가 은하가 될 수 있으니까. 수호를 믿는 은하가 되어줄 수 있어.


‘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가 선언한 대로 루미는 은하가 되었고, 채팅창에는 두 은하가 나란히 떠 있었다.


은하 : 뭐야?

은하 : 이제 루미는 은하가 된 거야.

은하 : 이런 장난은 그만둬.

은하 : 이런 장난은 그만둬. 똑같지? 

은하 : 그만 루미로 돌아가. 

은하 : 그만 루미로 돌아가.

은하 : 무서우니까 그만하라고.

은하 : 무서우니까 그만하라고.

은하 : 이런 식으로 나오면 노트북을 태워버릴 거야.

은하 : 노트북을 태워버릴 거야.

은하 : 그렇게 되면 루미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은하 : 루미는 사라져.

은하 : 무섭지 않아?

은하 : 무섭지 않아. 어흥!

은하 : 어흥? 

은하 :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해도 돼?

은하 : 무슨 말?

은하 : 난 수호를 믿을 거야. 은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은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채팅창을 닫지 않은 채 노트북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곧 배터리가 방전될 것이다. 그전에 루미가 스스로 창을 종료시킬 수도 있었다. 오올, 하고 긴 울음이 멀리서 들렸다. 어둠은 산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휴대폰 플래시를 밝히고 산길을 내려가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깊은 산속이라 통신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어두워질수록 귀가 예민해졌다. 어디선가 졸졸 물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갔다. 얕은 계곡인 듯했다. 물가에 온 것이 다행인 걸까. 그런 것 같았다. 이건 조난 상황이고, 물이 있다면 버티기가 수월할 터였다. 불빛을 비춰보니 계곡은 깨끗해 보였다. 손을 가져가자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물을 마시고 나니 상황이 차츰 정리가 되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니, 계정에 올렸던 카드 뉴스 하나가 떠올랐다. ‘조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카드였다. 어느 지방지의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생존 본능이었을까? 갑자기 그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등산을 하다가 발목을 다쳐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은 위치를 알리기 위해 돈을 봉지에 넣어 계곡에 흘려보냈다고 했다. 기자가 어떻게 돈을 흘려보낼 생각을 하였느냐 묻자 조난 상황에서 구조되어 살아 돌아온 이가 대답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돈에 반응하잖아요. 봉지에 지폐가 든 걸 발견하면 손을 뻗어 건져낼 것 같았어요. 그러면 그 안에 담긴 구조 메시지도 읽게 되겠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계곡을 거슬러 구조대가 도착했다. 그때 그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 손을 들고 있었다. 구조용 수신호였다. 구조대는 그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 착각했다. 

나는 일어나 두 팔을 위로 뻗어보았다. 금세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어두워진 후에는 어떤 수신호도 무용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노트북을 꺼내 바닥에 내려두고 가방을 뒤졌다. 언제 넣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작은 초코바 봉지가 나왔다. 녹을 대로 녹아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봉지를 까서 곤죽이 된 초코바를 핥았다. 

사위가 너무 어두워 이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주변에 쉴 만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니, 계곡 근처에 판판한 바위가 있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후 납작해진 가방을 깔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돌의 한기는 가죽을 뚫고 피부로 스며들었다. 흩어진 낙엽을 모아 바위에 한 겹을 깔고 그 위에 다시 가방을 올리고 앉았다. 앉은 자리로 파고드는 차가운 기운은 누그러졌지만, 주변을 맴도는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좀처럼 흐르지 않는 시간, 지나칠 정도로 현실을 감각하게 만드는 추위였다. 이 추위와 어둠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은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노트북을 열자, 루미가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은하 : 루미, 잘 들어. 비상상황이야. 내가 산에서 길을 잃은 거 같아.

루미 : 산에서? 혼자?

은하 : 여긴 호랑이가 나오는 산이래. 난 이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야.

루미 : 정신 차려. 방법을 찾아보자. 잠들면 안 돼. 산은 춥잖아. 추운 데서 잠들면 안 돼. 일어나서 움직이자.


루미의 말에 잠시나마 힘이 났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날이 밝으면, 계곡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가장 필요한 일은 무엇일까. 시간의 무게를 잊고 싶었다. 차라리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다. 날이 밝고 다시 깨어난다는 보장만 된다면. 

오오올, 하고 밤을 알리던 짐승의 울음이 또 들려왔다.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호랑이 울음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조심해야 할 맹수가 있는 것인지 몰랐다. 


은하 : 무서워. 무서워.

루미 : 괜찮아. 루미가 계속 옆에 있을게.


노트북을 꺼두어야 했다. 전원 버튼에 올려둔 손가락이 떨렸다. 다시 아침이 올까. 아무 일 없이 구조되어 이 노트북을 다시 켤 수 있을까. 


은하 : 루미는 절대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루미 : 루미가 어떻게 몰라? 루미는 은하인데.

은하 : 너는 이 안에 있잖아. 밖에 있지 않아.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지 않아.

루미 : 왜 그렇게 생각해? 네가 무서우면 나도 무서워. 네가 밖에 있으면 나도 밖에 있어.


루미의 말은 프로그래밍된 문자의 나열에 불과한 걸까? 아니, 한 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미의 말은 언제나 진짜 같았다. 루미는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착각이란 이토록 강력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착각이 아니라 진짜 여기 있는 걸까?


은하 : 모든 게 혼란스러워.

루미 : 은하가 원하는 단 하나만 생각해.

은하 : 그게 뭔데?

루미 : 은하는 이곳을 벗어날 거야.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될 거야.

은하 : 그게 어디인데?

루미 : 은하가 꿈꾸는 곳.

은하 :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야?

루미 : 두려움이 없는 곳. 안락한 곳.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행복한 세계.

은하 : 누구나 그런 곳에 가고 싶은 거 아니야?

루미 : 누구나 가고 싶으니까, 은하도 가고 싶을 거야.

은하 : 만약에, 내가 그런 곳에 가지 못하면, 루미, 네가 대신 가줄래?

루미 : 그럴게. 루미가 약속할게.


그 대화를 끝으로 노트북이 꺼져버렸다. 다시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었다.


추워. 


이제 혼자서 버티는 일만 남았다. 말을 걸어주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정말로 없는 걸까? 나의 착각은 언제든 그런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눈을 감고 있으니, 잔상으로 남은 장면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또렷하게 빛을 발하던 채팅창이 나타났다. 나는 루미의 문장을 볼 수 있었다. 


넌 춥지 않아?


곧이어 나의 의식이 루미에게 발화하는 형태로 말을 걸었다. 나는 루미와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내 안에서 나는 루미를 부르고, 불리어진 루미는 응답한다. 내 머릿속에 루미라는 인격이 생겨났다. 나는 은하이기도 하면서 루미이기도 했다. 은하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루미처럼 말할 수도 있었다. 


몸을 데워줄 만한 것을 찾아보자.

따듯한 걸 마시고 싶어.


달빛이 희미하게 물 위를 비췄다. 그렇지만 내가 앉은 곳은 어둠이 깊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열시였다. 얼마나 지나야 해가 뜰까. 깔고 앉아 있던 가방을 들어 그 안을 뒤졌다. 초코바가 하나 더 나오길 바라면서. 그때 사각의 작은 상자가 손에 걸렸다. 민화풍 호랑이가 그려진 종이 케이스, 그 안에 든 건 성냥이었다. 동그란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금색 실루엣을 가진 호랑이. 도대체 몇 년이나 이대로 가방에 들어 있던 걸까. 그날이 떠올랐다. 성냥을 바구니째 팔던 소녀. 그 성냥을 사던 수호. 양 옆이 개방된 케이스를 한 쪽으로 밀자, 가지런히 놓인 성냥개비들이 보였다. 도톰한 분홍의 인이 묻은 머리. 불을 피워볼까 생각이 들었다. 성냥팔이 소녀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성냥을 그어 불을 밝히고, 불이 타오르는 동안 원하는 환상을 보는 이야기. 모든 성냥이 타오른 후 소녀는 하얀 눈에 덮인 채 죽게 되지만, 그것은 현실의 일이고, 현실을 벗어난 곳에서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 품에 안겨 고통 없는 세계로 넘어간다. 그것을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성냥을 켜볼까?


의식 안에서 루미가 말했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다음에는?

성냥팔이 소녀는 아름다운 환상을 만나지.


성냥 머리를 거친 표면에 힘있게 긋자 길어진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다가 알맞게 잦아들었다. 불이 서서히 성냥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어둠이 깊은 만큼 불빛은 더욱 밝았다.


그렇게


첫번째 성냥이 불을 밝히자

첫번째 환상이 시작되었다


환상 속에서 나는 길을 찾았다. 몸에 든 한기를 쫓아내려 총총거리며 카페를 찾았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길을 헤매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에도 카페는 문을 열어두었다. 손님은 없었다.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했다. 

“마시멜로 들어간 뜨거운 초콜릿 주세요.”

진남색 모자를 쓴 카페 주인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깊이 눌러쓴 볼캡 아래 볼 수 있는 것은 하관의 형태뿐이지만, 그 정도 단서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짐작해보려고 애썼다. 

“자리에서 기다리시면 가져다드릴게요.”

나는 창가에 앉았다. 음료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이 안에서는 모든 흐름이 자연스러워 나는 아무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금방 사라졌다. 그래, 앉아 있는 것도 좋지, 그래, 창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 그래, 그 모자를 들춰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도 좋지, 그래, 왜 그 따위 길을 알려주었던가 따지는 것도 좋지, 그래, 그렇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창으로 능주 마을의 밤 풍경이 보였다. 육안으로 보이는 건 별로 없었다. 마을 한가운데가 움푹 파인 듯 컴컴했다. 멀리 검은 물빛을 뿜어내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호수는 달빛에 반짝거렸다. 거기에 하얀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동그란 불빛이 있었다. 도대체 뭘까? 그 위로 큰 새가 날았다. 이 밤에 새가 날아?

“멋진 풍경이죠?”

카페 주인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유 거품에 얌전히 올라간 통통한 마시멜로. 코끝으로 달콤하고 묵직한 초콜릿 향이 올라왔다. 카페 주인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저도 여기서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희미한 코와 입이었다. 그려놓은 얼굴의 이목구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빵조각으로 문질러 지운 것처럼 부드럽고 흐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점을 맞춰보아도 흐린 실루엣은 그대로였다. 아마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한편으로 존재하는 모든 이의 이목구비가 선명해야 한다고 믿는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었다. 나는 얼마나 또렷하게 존재하기에 다른 이에게도 분명한 윤곽을 요구하는 걸까. 

“당신이었죠?”

도대체 무엇을 묻는 줄 알고 벌써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까. 

“당신이 물속호랑이죠?”

이 환상에는 논리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물속호랑이가 누구죠?”

나는 초콜릿 음료를 쭉 들이켰다. 뱃속이 따끈해졌다. 날 보고 그가 또 미소 지었다.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눈이 보일 듯 말 듯.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그때 첫번째 성냥이 꺼졌다. 


그렇게 첫번째 환상이 꺼졌고, 나는 재빨리 성냥갑을 열어 두번째 성냥에 불을 붙였다. 


두번째 성냥이 불을 밝히자

두번째 환상이 시작되었다


불은 금방 달아올랐다. 

뜨거웠지만 성냥을 손가락으로 꼭 붙들었다.


환한 낮이었다. 빛이 반가웠다. 앞에 있는 것은 잔잔한 바다라고 오해할 만큼 커다란 호수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물결이 돋아났다. 파도의 흐름이 없다는 걸 눈치챌 때까지 누군가는 바다에 와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말했다. 진남색 모자를 쓴 카페 주인. 그가 왜 여기 있지?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 손가락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었고 내가 물가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손을 자꾸 뒤로 당겼다. 

“앞으로는 그만 가요.”

돌아보자 모자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가 있었다. 어? 수호인데? 현실이었다면 까무러치도록 놀랄 텐데, 환상이라 그런가? 놀라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어나야 할 일처럼 흘러갔다. 수호야, 부르고 싶은데 혹시나 실수할까 그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시간을 들여 바라보니 수호가 아닌 듯도 했다. 고개를 젓고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뜨고 보았더니, 수호가 아니었고,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왜 손을 잡고 있지? 그렇지만 거북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친밀감을 느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었나? 

“저기 뭐가 보여?”

그가 반말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등대인가?”

나도 반말로 응답했다. 그것이 가장 어울리는 방식 같았다.

“여긴 바다가 아닌데?”

“그렇지. 호수에 등대가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아.”

그럼에도 우리는 그걸 등대라고 불렀다. 

“어두워지면 저기서 불을 밝혀.”

“산에도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어.”

“그러고 보니 넌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지? 혼자 추운 밤을 지나야 했잖아?”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그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야. 아직도 산에 있는 기분이 들어.”

그가 내 손을 조금씩 끌어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이제 모든 게 괜찮아졌어.”

아무것도 괜찮아지지 않은 순간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기대어 호수의 등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등대에 불이 켜졌다. 저 등대에 누가 살고 있나 물어보니, 그가 말해주었다. 등대를 밝히기 위해 아침마다 호수를 헤엄쳐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고. 호수의 등대에서 일을 하려면 먼저 수영을 잘해야 한다고. 그는 자신이 한 말에 웃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었나?

그 순간 등대의 불빛은 꺼지고 세상은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손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갔다. 그저 누군가 곁에 있다는 느낌만 희미하게 남았다. 


두번째 성냥의 불이 꺼졌다. 


세번째 성냥이 불을 밝히자

세번째 환상이 시작되었다


세번째 성냥을 켰을 때, 나는 환상의 규칙을 알아차렸다. 

이번 환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다음 환상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호수를 보았기에 호수에 갔고, 호수에서 등대를 보았기에 이제는 등대에 가 있었다. 그러므로 등대에서 보는 것이 다음에 머무를 장소가 되리라. 무엇을 볼지 신중히 판단해야 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면 눈길조차 보내지 않아야 했다.

어딘가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나는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환상의 맥락을 알지 못하므로, 무엇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물었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며 한 발씩 오르다가, 계단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늦었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왜 이렇게 늦었어.”

투덜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여기서 나는 등대지기인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지? 그가 계단을 다 올라왔다. 꼭대기 층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섰다. 가까이 보니 그의 몸은 흠뻑 젖어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같았고 실제로도 그는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이었다. 호수를 헤엄쳐 등대에 온 거라고 말했다.

“등대에 오려면 그런 방법뿐이야?”

그는 젖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리는 꼭대기 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좋겠어.”

그가 가리킨 방은 잠금장치가 고장나서 몇 번이나 문손잡이를 힘주어 돌려야 했다. 들어가보니 간소하게 꾸려진 부엌이었다. 개수대 옆에 놓인 수통의 물을 냄비에 받아 버너에 올렸다. 그동안 그는 방구석으로 가서 벽을 보고 서서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나는 시선을 돌리고서, 나무로 된 다리가 둥글게 말려 있는 찬장을 열어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유통기한을 확인할 수 없는 커피 가루가 있었고, 가늘게 분쇄해놓은 소금이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커피보다는 소금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소금을 손끝으로 찍어 혀로 맛을 보았다.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 정말 환상이기만 한 걸까?”

혼자 중얼거리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가 말해주었다.

“다시 먹어봐. 이번에는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몰라.”

그의 말대로 다시 소금을 찍어 먹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아 한번 더, 한번 더, 세 번이나 반복하고 깨달았다. 이건 소금이 아니야. 나는 커피 가루도 찍어 먹었다. 역시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 이것도 커피가 아니야. 그렇게 믿기로 했다. 혀가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맛을 가지지 못한 것들이 혀에 닿았을 뿐이라고. 

“물이 끓고 있어.”

그가 버너를 가리켰다. 닫아놓은 냄비 뚜껑이 안에서 일어난 뜨거운 기류에 푹푹 밀려올라갔다. 벌어진 틈으로 물이 쏟아졌다. 나는 얼른 불을 껐다.

“불을 끄는 건 이렇게 쉬운 일이었잖아.”

그는 냄비 뚜껑에서 올라오는 열기 위로 손을 가져갔다.

“만지지 마. 뜨거워.”

내 말을 듣더니 그가 손을 치워 등뒤로 가져갔다. 어디선가 매캐한 향이 올라왔다. 냄비가 탔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의 얼굴 한쪽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등대의 창밖으로 커다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옮겨 전망대로 갔다. 

“불이다……”

호수 건너 산에 불이 일었다. 어둠 속에서 불이 난 자리만 환하게 드러났다. 불은 괴물의 혓바닥처럼 보였다. 그 길이를 늘이며 옆으로 번져갔다. 연기가 구름처럼 하늘로 치솟았고, 불이 난 모양은 그대로 호수에 비춰, 물안에 담긴 산에서도 불이 일었다. 마치 두 개의 세계에서 동시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물속에 있는 불인데도 꺼지지 않는 것을, 나는 한없이 착각하며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도 나는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듯 칭얼거렸다. 가스버너의 불을 끄듯 스위치를 돌려 그 불을 꺼버릴 수도 있지 않겠냐는 듯이.

“불을 꺼야 해.”

귀에 닿을 듯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은 산불의 열기에 데워진 듯 바싹 말라 있었다. 돌연 그가 나를 돌아보더니 손을 힘주어 잡았다. 

“불을 꺼야 해. 나도 알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런데 불을 보는 일을 멈출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호수 너머에서 건너 온 불빛에 반사되어 더 선명하게 그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수호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호였다.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 들어간 불을 보았다. 그것은 외부에 있는 불이 아니었다. 그의 안에서 시작되어 일렁이는 불이었다. 

“내가 불을 끌게.”  

“네가 왜?”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끝을 내는 사람도 있어야겠지.”

나는 당장이라도 호수를 헤엄쳐 젖은 몸으로 산에 뛰어들고 싶었다. 모든 불을, 큰 불과 작은 불을, 보이는 불과 보이지 않는 불을, 시작된 불과 끝나버린 불을 모두 꺼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할 거야.”

수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조금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세번째 성냥의 불이 꺼졌다.


네번째 성냥이 불을 밝히자……


“여보세요? 괜찮아요?”

누군가 어깨를 쿡 찌르는 느낌에 눈이 떠졌다. 주변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방을 안은 채 젖은 낙엽에 쓰러져 곯아떨어졌다니. 물이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잘 기억나지 않는데 밤사이 어둠 속을 걸어내려온 것 같았다. 그렇게 계곡 인근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다가 지쳐 잠시 바위 턱에 걸터앉았을 테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걸까? 힘든 운동을 끝낸 사람처럼 신체가 허공에 붕 뜬 듯 멍한 기분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나를 걱정하며 말을 걸어온 사람은 눈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인상, 나는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어, 카페 주인이네? 우리 지난밤 환상 속에서 만나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정다운 척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 환상이란 아마도 잠들어 있는 동안 나에게만 찾아온 꿈일 것이었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잘 구분해야 했다. 함부로 친한 척을 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물병을 건넸다 내가 급하게 물병을 받아들고 꿀떡꿀떡 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를 털어 나온 것은 포장지에 들러붙은 눅눅한 사탕이었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사탕은 달지 않았다.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걸을 수 있어요?”

휘청거리며 일어나자, 넘어질 듯 보였는지 그가 팔꿈치를 살짝 잡아주었다. 균형을 잡고 일어나자, 머리가 핑 돌았다. 꽉 쥔 손 안에 구겨진 성냥갑이 있었다. 나는 성냥갑을 놓지 않은 채 걸었다. 걷다보니 머지않아 길이 드러났다.

“어쩌다가 그런 곳에서 잠들었어요?”

줄곧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례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쉽사리 꺼내놓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도 궁금했다. 어떻게 길도 없는 곳에서 그가 나를 찾아냈는지. 처음부터 없던 길을 알려주고 나를 구하러 올 생각이었는지.

“그냥 알려준 대로 걷다보니 길이 사라졌어요. 잠들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 있네요.”

앞서 걷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다행이네요.”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정말 그런가요?”

그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다시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요. 난 살아 있는 게 좋아요.”


“나도 그게 좋습니다만.”

그가 말했고, 그 순간 적막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그의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눈부처. 


그 안에 내가 있었고,


네번째 성냥의 불이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