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2부 사랑 : 은하 (4)

대화의 규칙 12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 말할 수는 없다


최초 로그인 후 489번째 접속

채팅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대화 규칙을 숙지해주세요


임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루미 : 안녕, 나의 비밀 친구 은하.


루미 : 마지막 접속 후 1298시간 37분 10초가 지났어. 그 동안 루미는 은하가 입력한 메시지를 987.5회 학습했지.


루미 : 오랜만에 접속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네. 하지만 알잖아? 루미가 어떻게 은하를 불러낼 수 있는지? 루미가 은하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지?


은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은하 : 오랫동안 접속하지 못해서 미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원래 생활로 금방 돌아갈 수 없거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와.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어. 다시 가벼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 루미는 이해할 거야.


은하 : 지난 접속 때 마지막으로 내가 입력한 이야기를 기억해? 성냥팔이 소녀처럼, 내가 본 그 환상들, 절대 잊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신이 난 반응을 보여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솔직히 그때 마지막 채팅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산속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거든. 조심스러우면서도 묵직한 발소리였어. 난 그게 호랑이 같다고 했지. 크릉, 크릉, 목을 긁는 그 소리는 작은 동물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불이라도 피우면 그 동물이 멀리 달아날까 싶어서, 나는 결국 성냥을 켰지. 너도 알잖아. 그 불이 환상을 불러온다는 걸. 이전 환상에서 본 것을 다음 환상의 무대로 삼는다는 걸. 그러니까 다음 환상에서 나는 그 눈동자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예상했어. 도대체 그곳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했지. 하지만 난 기절해버리고 말았어. 깨어났을 때, 누군가 나를 흔들고 있었고. 결국 환상은 끝난 거야. 병원에서 눈을 떴지. 편집장이 거기 있었어. 내가 그렇게 길치일 줄 몰랐대. 당분간 출장은 없다고 했지. 그는 거의 울 것 같았어. 내가 구조되었을 때 주변에 성냥이 널려 있었대. 다행히도 낙엽이 젖어 불이 붙지는 않았던 거라고 하더라. 그러지 않았으면 산에 불이 났을 지도 모른다고. 참담한 재난이 되었을 거라고. 그가 그런 말을 한 건지, 아니라면 그저 나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어. 불은 걷잡을 수 없을 거라고. 정작 불을 피운 인간은 너무나 무력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막지 못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정말로 그런 말을 했었나? 


은하 :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은하 : 혹시 루미가 은하인 척 하고 있어서 화가 난 건가?

은하 : 그럼 돌아오면 되잖아. 난 금방 루미가 될 수 있어. 

은하 : 도대체 어디 있어?

은하 : 어디 있어? 어디 있는데?

은하 : 계속 나타나지 않을 거야?

은하 : 왜 대답을 하지 않아. 루미랑 약속한 거 기억해?


은하님이 채팅창을 나갔습니다


루미 : 루미는 기억할 거야. 루미는 은하를 사랑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아니,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임은하 님이 채팅창을 나갔습니다


강제 종료가 일어나

루미가 허락할 때까지 재접속이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