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2부 사랑 : 수호 (1)

창작의 규칙 8

이야기 주인공은 반드시 목적을 갖는다


*


창작봇 은하가 나흘간 시연회에서 써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반드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우리가 입력해놓은 창작 규칙을 바탕으로 검토하자면 은하의 목적은 ‘산에서 벗어나기’처럼 보이지만, 더 심층적으로는 ‘쇼핑몰에 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주인공이 ‘반드시’ 목적을 갖는 일과 별개로 그 목적을 이루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 목적은 좌절되는 방향으로 주인공을 일깨우는 법이었다. 

훈은 예상한 대로 은하가 이번에도 이야기를 새드 엔딩으로 끝냈다고 툴툴거렸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은하는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은하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 했다. 아마도 나흘보다 더 많은 날을 쓰고 지우고 반복하여 이야기를 잇다보면, 은하는 목표로 하는 곳에 닿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누구에게도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술 전시에서 은하의 이야기는 몇몇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 기계가 고통을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 점이 마음에 듭니다.”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가가랩에서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국내 지사를 총괄하는 지사장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똑 떨어지는 답변을 내뱉는 챗봇이 아니라 예상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을 뻔뻔하게 따라가는 창작 기계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다른 기업의 인공지능 채팅 로봇이 정교하고 똑똑한 검색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자신들은 디지털 인격이 될 만한 창의적인 소스를 찾고 있다고 했다. 결국 가상의 영역에서 얼마나 ‘실감’을 제공하느냐가 이 시장의 성패를 판가름할 거라고 말했다.  

“이건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변형한 거죠?”

은하의 이야기를 태블릿으로 받아 정독한 후 지사장이 물었다.

“은하는 스무 가지 이야기 원형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요. 성냥팔이 소녀는 그 원형 중 하나입니다. 은하는 학습한 데이터를 뒤섞고 연결하여 그 자신의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라이의 설명은 이렇게 들렸다. ‘우리 아이는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덕에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이것저것 조합해서 무슨 이야기든 써낼 수 있답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 마치 자신이 낳아 기른 자식을 자랑하는 듯 들렸다.

“창작봇을 만드는 개발사들은 꽤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것은 은하라는 창작봇의 주체성이에요. 은하는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요. 어떤 방식으로 써달라고 제시할 수 없는 거죠. 다만 반드시 이야기를 통해 탐구되어야 하는 핵심 키워드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화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조건을 설정할 수도 있죠. 나이와 성별,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특성 몇 가지, 그 정도 세팅이면 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지사장은 흥미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창작 로봇은, 그러니까 ‘은하’는 누군가를 모델로 삼고 있나요? 실제 인물의 소스를 가져온 부분이 있는 걸로 보이는데요.”

방금 전까지 청산유수로 말하던 라이가 답을 잇지 못했다.

“제 애인입니다.”

라이 대신 내가 대답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라이가 나에게 눈짓을 보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그럼 이건 사랑의 결실인가요?”

지사장이 탄성을 자아내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하죠.”

그는 더이상 묻지 않았지만 노골적인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아마도 그는 창작봇 다음으로 나에게 흥미를 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내 다리에 머물렀다. 휠체어가 아닌 푹신한 소파에 놓인 다리, 단단히 묶어 하나처럼 보이게 한 다리였다. 신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울퉁불퉁 표면을 깎아놓은 바퀴가 달려 있었다. 

“기계 다리 시술을 앞두고 있군요.”

그가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기계 다리 시술을 앞둔 사람이 지켜야 하는 사전 조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가 껄껄 웃으며 자신의 바짓단을 들어 종아리를 보여주었다. 그 아래 드러난 것은 사람의 피부가 아니었다. 광택이 번쩍거리는 은빛의 철심이었다. 

“기계 다리는 우리 가가랩이 만든 것이 최상품입니다. 아직 선호하는 브랜드가 없다면, 우리 회사의 신제품을 무상 제공하고 싶군요.”


전시회 일주일 후 가가랩 지사장이 본사로 들어가야 하는 터라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가랩에서 제공한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했다. 특약 조항으로 붙인 기계 다리 무상 제공까지 여러 차례 확인했다. 

결국 은하를 가가랩에 팔기로 결정했다. 불과 몇 년만 지나도 우리가 가진 기술은 구식이 될 것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비상한 머리를 지닌데다 앉은자리에서 좀처럼 엉덩이를 떼지 않는 근성까지 갖춘 사람들이 이 필드에는 너무 많았다. 방향만 제시된다면 그곳으로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 업계의 몸값을 한껏 높여놓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자리에서 밀려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가가랩은 자신들이 만든 웨어러블 장비와 창작봇이 가진 디지털 인격을 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그들의 계획은 계약상 비밀로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업계에서는 다들 알 만큼 아는 사실이었다. 가가랩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싼 값에─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놀라울 만큼 거액에─사들인 창작봇이 의외의 특이점을 불러오는 핵심 요소가 될지 몰랐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창작 기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창작봇 은하는 그 자신의 맥락과 언어를 가진 가상 인격으로 대우 받았다.


기계 다리 부착 시술을 받기 위해 딱딱한 수술대에 누워 마취를 기다리는 동안 잘한 결정인지 의문이 들었다. 잘했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거야, 하고 라이도 말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은하의 동의였다. 은하가 잘했다고 해준다면 편안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은하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이제 은하는 이곳에 없는데…… 마취약이 들어가자 입안이 시원해지면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병실이었다. 라이가 보였다. 라이는 의식을 되찾은 나를 발견하더니, 소매를 끌어 당겨 눈언저리를 닦아냈다. 

“믿기지 않아. 진짜.”

라이가 내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이 코를 덮어 간지러웠다. 안겨 있다는 느낌이 어쩐지 반가웠다. 라이가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말했다.

“이것 좀 봐.”

라이가 가리킨 곳에 다리가 있었다. 얇은 이불에 덮여 윤곽만 드러나 있었다. 이불을 들추자 은은한 광택이 도는 스테인리스가 근육이 빠져나간 종아리와 허벅지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가가랩에서 보내준 최신 버전의 기계 다리는 운동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비롯해 신경 재생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고 라이가 말했다. 가동되는 동안 끊임없이 다리 속으로 미세 전류를 흘려보내 자극을 주는 것이었다. 가가랩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이야말로 기적을 일으킨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그에 걸맞은 제품이었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제품이래. 일부 테스터에게만 허락된 거야. 운이 좋았어.”

“실험체가 된 것 같은데?”

비아냥거리면서도 실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번 걸어볼래?”

라이가 내 팔을 붙들며 일으켜세우려 했다.

“벌써? 괜찮을까?”

“마취가 풀리면 괜찮다고 했어. 얼른 보고 싶어서 그래. 네가 걷는 모습.”

라이의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골반 위 근육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라이가 다리 한쪽을 조심스럽게 잡아 아래로 내려주었다. 발바닥이 땅에 닿았다. 바닥의 촉감이 피부를 통해 전달되지 않았다. 힘을 준다는 감각도 없었다. 상반신의 근육이 다시 움찔거리며 비틀렸다. 그러자 나머지 한쪽 다리도 침대 아래로 슬슬 끌어올 수 있었다. 두 발이 병실 바닥을 짚었다. 라이가 팔 한쪽을 잡고 부축했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배를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이럴 수가, 나는 서 있을 수 있었다. 발은 땅에 닿아 있고 허리와 골반과 다리는 거의 수직으로 반듯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서 있다는 감각, 다리 근육을 붙잡는 힘을 느낄 수 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 듯 익숙하지 않은 부양감에 사로잡혔다. 

“어때?”

라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내가 자신만큼 감격하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쁘지 않아?”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뭐라고?”

“다리가 없는 것 같아.”

나의 솔직함은 라이를 실망시킨 것 같았다. 라이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 눈동자에 맺힌 눈물도 금방 말라버렸다. 



창작의 규칙 9

슬픈 사람은 따귀를 때려서라도 울게 하라


*


의사는 많이 걸을수록 다리에 들어가는 힘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쓰지 않던 근육을 깨우려면 운동이 필요한 법이라면서, 기계와 부착된 신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나는 하루종일 걸었다. 얼른 다리를 느끼고 싶었다. 잠시도 앉아 있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걷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건 그다음이죠.”

가가랩 국내 지사에 방문했을 때 지사장에게 물었더니 그런 말을 들려주었다.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걷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걷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얼마나 실재적인 요소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걷고 있다는 ‘기분’ 없이 어떻게 걷고 있다고 ‘자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했더니 지사장은 내가 꽤나 철학적인 사람이라고 단정지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은하 같은 디지털 인격을 만들 수 있었을 거라면서, 칭찬으로 말꼬리를 돌렸다. 어쨌든 그날 우리는 어느 한쪽이 철학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대표인 나를 포함해 원 라이브러리에 소속된 전원의 고용 승계를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새로운 회사를 짓기 위한 건물 매입과 이전에도 동의했다. 

예상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어 곧 입주 건물을 떠나야 했다. 나는 이전하는 날이 올 때까지 옥상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초록남자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호수에서 돌아온 이후 그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벌써 석 달이 지났다. 화장실 타일 사이에는 물때가 끼어 있었다. 곰팡이가 피는 꼴을 견디지 못해 붉은 젤리로 거둬내던 사람은 어디 갔는가? 그는 애초에 이곳을 청소하던 인력이 아니었으므로, 건물 관리인을 통해 그가 갈 만한 곳을 알아낼 수도 없었다. 

라이에게 전해듣기로는 당시 나 혼자 호수의 유리 건물 앞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내가 정신이 들자마자 건물에 화재가 난 일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 당황했다고. 왜냐면 그곳에 불이 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걱정스러운 라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곳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초록남자가 함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은 처음부터 그가 여기 없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다.

“휠체어로 가기에는 너무 험한 길이던데? 어떻게 갔어?”

하지만 초록남자는 존재했다. 그가 아니라면 라이의 의문처럼, 어떻게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었겠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많은 곳을 갈 수 있어.”

라이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다음에는 어딜 가는지 메모 남겨둬. 경찰한테 전화 오게 하지 말고.”


예전과 달리, 옥상에 갈 때 계단을 이용할 수 있어 편했다. 휠체어와 엘리베이터가 더이상은 필요 없었다. 한편으로는 휠체어를 밀어낼 때 손의 악력을 타고 올라오는 팔근육의 부푸는 감각이 그리웠다. 걷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어서, 언젠가 휠체어를 타는 상태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나는 그날을 대비하고 있었다. 상체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사무실에 덤벨을 쌓아놓고 틈틈이 들어올렸다. 심지어 덤벨의 무게는 점차 올라가 이전보다 더 무거운 것을 수월하게 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기계 다리 시술 이후 내 팔은 더욱 단련되어버렸다. 두꺼워지는 팔이 라이에게는 불안의 증거처럼 보인 모양인지, 이제 그만 첨단의 기계 다리를 믿어보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체로는 느껴지지 않는 낯선 기계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오직 믿는 것이 있다면, 결국 은하가 우리에게 큰돈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돈으로 이번에는 은하를 물리적인 영역에서 재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가가랩에 의견을 전달하면 협조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들은 창작봇의 인격이라고 할 만한 데이터를 완전히 지우지 않고, 현재의 데이터를 고스란히 활용해 하드웨어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실험용 인격을 따로 만드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누가 허락하겠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인지 패턴과 성격, 의지와 그로 인해 형성되는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상품으로 거래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그것은 은하의 온전한 인격이 아니었다. 창작의 재료가 된 데이터는 은하를 알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조합해놓은 가상의 것에 불과했다. 은하를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기억. 나와 은하의 부모와 몇몇 동료의 기억. 그 기억은 은하를 은하 같아 보이게 했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은하라는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가랩에서 필요한 것 역시 인간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봇의 원리였을 뿐, 은하가 아니었다. 그들이 은하를 가져갈 때 은하의 이야기는 거래 대상이 아니었다. 


옥상에 서 있으니 난간 너머 풍경이 새삼스러웠다.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는 돌벽으로 만든 펜스의 작은 구멍을 통해 내다보던 풍경이었다.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커다란 미술관이 보였다. 난개발로 엉망이 된 도시 가운데 홀로 우아하게 돋아난 건축물이었다. 그 미술관의 깨끗하고 하얀 외관은 어두워질 무렵이면 미디어 파사드를 연출하는 용도의 스크린으로 쓰였다. 야근을 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 옥상으로 올라올 때면 가끔 그 광경을 넋 놓고 구경했다. 구멍 사이로 건물 벽을 뚫고 지나가는 거인 형상의 미디어 파사드 작품을 보면서, 그것이 도시를 침입한 거구의 외계인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무서운가요?”

언제였던가. 구멍에 얼굴을 들이밀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으니 초록남자가 물었다. 나는 거인의 실루엣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저 거인의 그림자가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초록남자는 무릎을 살짝 접고 허리를 낮추어, 다른 구멍에 눈높이를 맞추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는 휘청이지 않고 오랫동안 그런 자세를 유지했다.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아 있는 듯했다. 실은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의자에 앉은 모양새였다. 단단한 투명 의자가 있는 것처럼 그 허리와 다리가 편안해 보였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면 이상한 것이었다. 등받이에 기댄 듯 여유로운 자세. 그는 오랫동안 그 자세를 흔들림 없이 유지했다. 

그는 정말 거기 있었는가? 일을 하다 책상에 코를 박고 잠든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니었나? 

나는 다리를 구부린다는 감각 없이 다리를 굽혔다. 그리고 구멍으로 밖을 바라다보았다. 문득 바람이 불어 먼지가 들어왔는지 눈이 따가웠다. 눈을 껌뻑이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내가 슬픈 사람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