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으름 씨 뱉기(2)

*

 

채림이 현우에게 미국 투자이민 설명회에 가보자고 제안한 건 지난봄이었다.

“이 티켓 완전 구하기 어려운 거야.”

“그럼 너 매일 낮에 같이 커피 마시는 육아 동지들이랑 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현우를 쫓아다니며 채림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받은 티켓은 딱 한 장이고 동반 인원은 한 명으로 제한돼 있단 말이야. 워커힐에서 하는데 식사도 준대.”

“투자이민은 아무나 가는 줄 알아? 피곤해 죽겠는데 세미나는 무슨.”

그즈음 현우는 회사의 AI 시스템 기술 특허를 앞두고 넉 달째 일주일에 한 번씩만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현우는 더벅머리에 수염을 기른 피로한 얼굴로,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승진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들떠 있었다. 언젠가, 군대도 아니고 부장의 정장을 왜 네가 드라이 맡겨야 하냐는 채림의 말에, 현우는 개발팀 전체는 물론이고 아마도 전 사를 통틀어 자신이 졸업한 대학교 출신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우리 팀만 해도 유학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성과를 보여줘야 승진 누락이 없을 텐데 우선 그 성과를 보여주려면 부장에게 잘 보여야 업무 분장을 잘 해주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 얻게 된 기회라 그런지 현우는 몇 달째 이어지는 야근을 마다않고 하고 있었다. 채림이 무슨 프로젝트냐고 물으면 대외비라면서 채림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 내용을 짐작만 할 수 있게끔 흘리곤 했다. 너 AI 주차의 핵심이 뭔지 알아? 갑자기 차에 뛰어든 게 동물인지 사람인지 AI가 어떻게 구분할 것 같아? 만약에 말이야, 네가 야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인데 갑자기 고라니가 튀어나왔어. 뒤에선 트럭이 미친 속도로 달려오는 상황이야. 그러면 이론적으론 고라니를 치고 지나가는 게 맞는데, 네 무의식이 고라니를 칠 수 있을까?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까? 너 그렇게 일어나는 교통사고가 일 년에 몇 건일 것 같아? 채림아, 미래엔 말이야, 미래엔, 미래에는…… 현우는 ‘미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마치 그것을 미리 보고 오기라도 한 듯이.

‘특급호텔 공짜 밥’이 통하지 않자, 채림은 작전을 바꿔 소파에 앉으며 심드렁한 척 말했다.

“너 청림학원 알지? 거기 대표가 무슨 사업을 시작했는지 알아?”

청림? 현우가 등을 긁으며 채림을 바라보았다.

“미국 투자이민 사업이야. 너, 한 나라의 교육이 그 나라의 ‘미래’란 건 알지? 청림학원 대표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이 어딘지 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그 사람이 직접 하는 세미나야?”

현우는 채림이 식탁 위에 올려둔 검은색 티켓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하지.”

티켓을 쥔 현우가 채림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림 대표가 오지에도 사교육이 닿을 수 있게 한다면서 공짜 강의 많이 풀었었는데. 나 과탐 그걸로 들었거든.”

“그래? 그거 청림 대표 시조카가 준 거야. 지수 친구 엄마.”

 

수요일 저녁, 호텔에 도착한 현우는 세미나도 밥도 다 무료인 대신 주차비가 폭탄으로 나오는 거 아니냐며 구시렁댔고, 연회장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한 뒤 휴대폰을 걷는 걸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참 나, 국정원이야 뭐야? 뭐 이렇게까지 해?”

그러나 연회장에 들어서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원탁에 앉은 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채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제부터 두리번거리지 말기.”

그런 현우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채림은 테이블에 세팅된 포크를 집어 현우의 손등을 살짝 찌르는 장난을 쳤다. 그러나 현우는 아랑곳 않고 가지런히 놓인 식기들을 보며 난처한 듯 ‘바깥쪽부터 쓰는 건지 안쪽부터 쓰는 건지 까먹었다’고 속삭였다. 세미나가 시작되자 현우는 청림학원 대표의 설명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 시간 반 내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입장할 때 받은 가죽 수첩에 한미 세법과 영주권 조건 해제 내용에 대해 꼼꼼히 메모했고, 귀퉁이에 긴 숫자를 적어가며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기도 했다. 청림학원 대표는 설명회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아이들을 좋은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서, 해도 더 많이 받고, 물도 더 많이 먹고, 그렇게 누구나 자기 앞마당에 심고 싶어하는, 욕심나는 나무가 되게끔 하는 것.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자제분들은 그렇게 성장해선 안 됩니다.”

채림은 하품을 하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좋은 나무를 알아보는 법을 배우며 자라야죠. 그 나무를 얼마 주고 사는 게 합당할지, 자기 마당 어디에 어떻게 심어 쓰는 게 좋을지,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 아이만의 숲을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거대한 스크린 속 파워포인트 화면에 아마존강 사진을 띄웠다. 채림은 그 사진이 너무 뜬금없는데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대단한 특권이라는 듯 말하는 대표가 우스워 현우를 쳐다보았다. 현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마존강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회장을 나서며 현우는 ‘퍼스널 비자 컨설턴트’라는 직원에게 자신이 통화가 가능한 시간까지 적어넣어 명함을 건넸다. 그러곤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채림에게 물었다.

“그 티켓, 지수 친구 엄마가 줬댔지? 엄마들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야?”

“응. 왜? 달리 보여? 언제는 헛바람 든다고 모임 가지 말라더니?”

“내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표정은 꿈에 부푼 사람의 그것이었다. 차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이 마침 〈라라랜드〉의 오프닝곡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다.

“밥이라도 사. 그리고 우리 진지하게 투자이민 알아보자. 내가 볼 땐 이민이 지수를 실어 보낼 노아의 방주야.”

채림은 당황스러웠다. 그저 현우가 솔깃할 제안을 해 단둘이 시간을 보내다 오고 싶은 거였지, 투자이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현우에게 엄마들 모임은 네가 생각하듯 한가히 수다떠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비즈니스에 가깝다고, 이렇게 특별히 초대된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세미나장에 올 수 있는 이유가 다 내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엄마 커뮤니티 덕분이라고, 좀 생색을 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현우야 왜 그래. 너 그 사람 말에 홀렸어?”

“청림 대표 말이 아니라, 그 대표가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이라는 게 핵심이야. 너 주식 해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국내 주식에서 개미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야.”

주가가 오른다는 소식이 개미에게 닿았다면, 그땐 이미 늦은 거니까. 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 그 사람이 출산율 말하는 거 들었지. 0.6명이야 0.6명. 그 수치는 말이야, 한국은 이미 끝났다는 말이라고. 국민연금은 진작에 바닥났는데 지수 세대가 부양할 노인 인구가 몇인지 알아? 우리가 지금 결심하면 지수는 멍 때리다 막차 안 타고 일찌감치 첫차 타는 거야. 이 땅의 미래엔,”

‘미래’라는 말에 채림은 속에서 뭔가가 치미는 것 같았다.

“그놈의 미래 소리 좀 작작 해. 너만 지수 생각하는 줄 알아?”

채림은 찬 손으로 이마를 식혔다. 현우의 말에 기분이 나쁜 이유를 요목조목 따지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고, 그보다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였다. 육남매 중 다섯째인 현우는 신혼 때부터 단호하게 아이는 딱 하나만 낳아 잘 기르고 싶다고 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최소한 자신이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은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현우의 육아관이었다. 현우는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차지하기 위해 다퉈야 했고, 미술이나 음악 시간에 준비물이 겹치면 집안에 하나 뿐인 그것들이 전부 누나와 형들 차지가 돼 자기가 이런 악착 같은 사람이 된 거라고 했다. 한번은 미술 시간 내내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는데, 애들이 웃고 까부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자긴 맞을까봐 무서워서 실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고. 현우가 지금 이렇게 흥분한 건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채림은 생각했다. 당당히 앞장서 나아갔는데 막다른 길을 마주한 느낌. 아무것도 모른 채 뒤따라오고 있는 지수. 눈을 질끈 감고 견뎌야 했던 자신의 어둠을 물려주고 말 거란 공포.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던 현우가 다시 입을 연 건 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지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곳에서 교육받아야 돼. 너도 알잖아.”

알다마다. 채림은 가슴이 갑갑해져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지수가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건 채림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채림이 가장 먼저 결심했던 한 가지는, 아이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는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채림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엄마에게 시달린 기억밖에 없었고, 커서도 어려운 사람이 끼어 있는 식사 자리에서 밥을 먹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옷소매에 음식이 묻진 않을지, 식기를 떨어뜨리진 않을지, 방금 전 너무 큰 소리로 웃은 건 아닌지. 그러니 태어날 지수는 평범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나이대에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밖에서 흙을 묻혀오고 음식을 흘리고 묶어준 머리가 흐트러져도 절대 혼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소통할 수 있는 엄마가 될게’라는 정치인의 슬로건 같은 문장을 산모 수첩에 적어둔 건 채림이 그만큼 진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지수가 웩슬러 지능검사를 받은 게 여섯 살. 결과는 언어 이해, 유동 추론, 시공간, 작업 기억의 지표 수준에서 모두 상위 0.1퍼센트였다. 목성의 띠와 대를 관측하고 싶다며 백삼십만원짜리 천체망원경을 사달라 조르고, 일주일 전 박물관에서 본 영조의 붓글씨를 일기장에 적어넣으며 ‘연잉군 시절, 1700년, 송,죽松竹’이라 부연해놓은 것이 지수가 네 살 때의 일이었다. 어휘는 나날이 늘어 채림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새벽에 방에 불이 켜져 있어 깜짝 놀라 문을 열어보면 현우의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논어』를 펼쳐둔 채 잠든 척을 하고 있어 채림은 이걸 나무라야 하나 칭찬해야 하나 난감했다.

“알았으니까 우선 흥분 좀 가라앉히고, 가서 지수한테도 물어보자. 지수는 한국에서 살고 싶어할 수도 있을 거 아냐.”

채림 딴엔 현우를 진정시키려 한 말이었는데, 현우는 차갑게 대꾸했다.

“애한테 그걸 묻는다고? 왜,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었는지도 물어보지.”

 

현우의 끈질긴 고집은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프로젝트고 뭐고 연차를 내곤 홀로 투자이민 설명회를 들으러 갔고, 다녀와서는 채림을 불러 앉히곤 비교표까지 만든 엑셀 파일을 보여주며 자긴 청림으로 결정했는데 넌 어떠냐고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은 열린 문틈으로 지수가 고개를 내밀고 있건 말건 지수를 언급하며 다퉜다. 지수를 위해서, 지수를 방주에 태우려면, 우리가 욕심을 내면 지수는.

여름이 되었을 때 채림은 결국 지수를 영어만 사용하는 영재원에 보내보자고 말했다. 적응 문제에 대한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이민을 가게 된다면 그전에 언어를 먼저 익힐 수 있어 좋을 것이고, 가지 않게 되더라도 그런대로 잃을 건 없는 선택이었다. 현우는 그마저도 답답한 눈치였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따져봐도 청림만큼 안정적인 조건으로 컨설팅을 해주는 업체를 찾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지수가 우선이 되어야 해.”

“누가 뭐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렇게 채림은 지수의 손을 잡고 사설 영재원을 찾아 갔다. 아이들이 유학을 가지 않고도 아이비리그에 진학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는 그곳은 ‘대통령 손주가 와도 진단 검사를 통과하지 않고는 못 들어간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그날, 여섯 시간에 걸친 진단 검사가 끝난 뒤 지수는 잘 먹지도 않던 도넛이 먹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머리를 하도 써서 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럽던 한여름, 채림은 지수의 손을 잡고 역 근처 도넛 가게로 향하며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수가 검사를 받는 사이 부원장의 안내로 둘러본 영재원 내부의 어떤 풍경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너무 작은 아이들이 자그마한 책상 앞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저애들은 몇 살이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만 세 살’이었다. 채림은 그 순간 이곳에 지수를 보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영재원을 나서자마자 채림은 지수와 눈을 맞추며 어땠느냐고 물었다.

“너무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게 고민이라고 했더니요, 선생님이 왜 그게 고민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래서 인간 수명의 한계와 제 머릿속 로직에 대해 설명했더니, 너는 꿈을 이루는 아이가 아니라 창조하는 아이가 되겠다고 하셨어요.”

지수는 뺨을 붉힌 채 웃었다.

‘제대로 맘에 들었구나.’

채림은 외꺼풀 눈이며 얄쌍한 코까지 자신과 똑 닮은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엄마에게 수없이 들어온 말이자 무척이나 싫어했던 말을 속으로 되뇌였다. 너는,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에어컨 온도가 지나치게 낮아 한여름에 오한이 드는 가게에서, 도넛을 연달아 네 개째 먹고 있는 지수를 바라보며 채림은 지난 주말에 본 자연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책상만한 빙하덩어리라도 붙잡고 살겠다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북극곰과, 절벽에서 뛰어내려 집단 자살하는 바다사자들. 그걸 보며 느낀 불안과 지수를 볼 때 드는 감정이 어떻게 이어지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채림은 혼란스러웠다.

“지수야, 여기 너무 춥지 않아?”

채림은 점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지수에게 물었다. 손님도 우리뿐인데 에어컨 온도 좀 올려줄 수 있느냐고 말해볼까. 젠장, 지구 명줄이 단축되고 있다는데 한여름에 추위를 느끼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말해? 말아? 채림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지수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카디건 안 챙기셨어요?”

순간 채림은 지수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 한구석이 움츠러들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엄마의 말에 어린 채림은 약한 사람을 돕는 이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엄마는 채림을 무척 기특해하며, 그러려면 지금처럼 왕따란 왕따는 다 집으로 데려와서 밥 먹이는 약해빠진 사람이 아니라,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버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왜냐하면 약자에게 약자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그저 짐일 뿐이니까, 하고 말했다.

영재원의 공부량에 지수가 지치지 않을지, 적응 스트레스에 정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저렇게 공부만 하다 친구 하나 없는 기득권 소시오패스가 되는 건 아닌지, 자신이 똑똑하단 걸 인지하고 안하무인으로 굴진 않을지. 채림은 그간 걱정해왔으나, 그 순간 그 걱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엄마가 말한 약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지수에게 짐이 되는 약한 엄마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심각한 표정의 채림을 의식한 건지 지수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조금 춥다고 말했다. 채림은 가방을 챙기고 트레이를 반납한 뒤 지수의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도는 영재원 아이들의 자그마한 뒤통수나 물속에서 힘겹게 허우적거리는 북극곰이나 절벽에서 투신하는 바다사자나, 모두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 전원을 끄듯 꺼버려야 한다고. 그게 지수를 위하는 거라고. 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나가자 더운 김이 순식간에 얼굴을 덮쳤다. 어쩌면 한여름에 추운 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채림은 역 앞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며 얘기했다.

“엄마가 다음부턴 꼭 카디건 챙길게.”

 

*

 

잠들었던 지수가 일어나며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자연스레 소풍이 됐다.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한 건지,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난 건지, 지수는 토끼처럼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선물이라며 현우에게 건네고, 오미자를 따 볼에 비비고, 연보랏빛 들꽃과 풀을 꺾어다가 꽃다발을 만들어 채림에게 주기도 했다. 그 바람에 도착은 더뎌졌지만, 지수가 그 나이대 아이처럼 노는 모습에 기뻐 채림은 걸음을 늦췄다. 이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절하고 얼른 내려가 점심을 먹어야 한다고 지수를 달래던 현우도, 자고 일어나니 산에 있는 게 꿈결 같다는 지수의 말에 감동한 후로 점퍼 주머니 양쪽이 솔방울로 불룩해진 채 지수의 뒤를 따라다니며 채집을 도왔다.

“아빠, 이걸 꽃다발에 장식할 풀로 쓰면 되겠다.”

그렇게 말하며 지수는 수풀이 우거진 부근에 쪼그려앉았다.

“지수야, 이게 뭔지 알아? 고사리야.”

“고사리라고요? 반찬으로 먹었던 거랑 다른데.”

“지수가 먹은 고사리는 막 자란 고사리고, 이건 완전히 핀 고사리야.”

지수는 고사리의 얇은 대와 화려한 잎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 자라면 이렇게나 달라지는군요.”

채림은 야생화 꽃다발을 든 손으로 햇살을 가린 채 몇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현우는 지수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게 기쁜 눈치였다. 지수는 종종 논리를 몇 단계 뛰어넘은 말을 하거나, 최근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연설하듯 빠르고 길게 이야기하는 면이 있었다. 하물며 한국말도 그런데, 이제 미국에 가 영어를 쓰기 시작하면 그런 식의 불통은 더 심해질 거였다. 채림은 ‘낙엽 보고 나무 이름 맞히기’ 게임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옅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시선을 멀리해 소담한 산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지수를 데리고 가을 산에 와본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화담숲에 갔을 땐 다리가 아프다며 집에 가자고 하더니,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나올걸. 채림은 지수와 현우가 이런 풍경 속에 함께 있는 게 꼭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아, 더 자세히 기억해두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쪼그려앉은 지수 옆에 퍼질러앉은 현우, 그리고 그 옆에 울긋불긋한 나뭇잎으로 무성한 저 나무를 기억해두겠다고. 저 나무의 이름이 ‘나도박달나무’라는 걸 알려준 게 너의 아빠라고. 저 나무의 어떤 가지는 마디가 무척 굵었다고, 잠깐만, 저 마디가, 저게

“아악!”

채림이 비명을 지르며 현우에게 달려갔다.

“야! 뱀! 뱀!”

현우와 지수가 고개를 돌려 채림이 손으로 가리킨 나무를 바라보았다. 지수가 먼저 일어나 나무 가까이로 갔다. 현우는 뱀? 하고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수야, 이리 와! 위험해!”

발을 구르며 소리치는 채림에게 지수는 뒤돌아 단호한 표정으로 양손을 아래로 누르며 맘, 플리즈 컴 다운, 뱀이 놀라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사이 나뭇가지를 휘어 감은 뱀을 발견한 현우는 좀처럼 뱀을 찾지 못하는 지수를 목말 태워 가까이에서 보게 했다.

“보여? 나무랑 색이 똑같지?”

“찾았어요! 와, 진짜 뱀이네. 눈이 엄청 작다.”

채림은 질겁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린 채 두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책에서 봤을 땐 피부가 매끄러운 줄 알았는데 실물을 보니 질감이 거칠다는 둥, 얘는 대가리 모양을 보니 독사 같은데 아직 새끼 같다는 둥, 두 사람은 앞에 있는 뱀을 두고 미술작품을 관람하듯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채림이 역정을 내자 마지못한 듯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