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분수대 밖, 쏟아지는

분수대 밖, 쏟아지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매직 분수쇼를 보려면 엄청난 인파들과 도보를 이동해야 한다. 폭이 넓은 도보에는 중간중간에 작은 분수들이 물을 뿜고 있다. 정원 한가운데를 한참 걷다보면 도보 가장자리에 에스파냐계처럼 보이는 소매치기들 대신 마라톤 선수처럼 보이는 흑인들이 물건을 판다.(그중 다수는 소매치기들이다. 팀을 이루어 구경하는 관광객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종류도 다양하다. 바르셀로나 기념품―축구 유니폼, 티셔츠, 줄이 달린 펜 그리고 유럽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부채. 단단한 유리 재질의 새모양 피리나 철사를 구부려 만든 모형이나 팔찌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명품 이미테이션 가방이나 티셔츠다. 이 구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다. 타인의 평판을 신경쓰지 않는 유럽인들도 명품 가방에 관심이 있는 걸까. 다채로운 머리 색, 수많은 언어…… 유럽을 특정할 순 없겠지만.

 

도보에 길게 이어진 좌판에는 명품 이미테이션 가방과 지갑을 파는 흑인들이 서있다. 커다란 키와 늘씬한 몸이 한눈에 들어온다. 코코아빛의 기다란 다리…… 약간 충혈된 눈망울이 매우 맑다. 흥정을 지켜보다 이미테이션 물건들이 정말, 비싼 스페인 땅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백오십 유로 블랙 입생로랑 핸드백. 메이드 인 차이나? 중국에서 스페인은 너무 멀지 않은가? 항공과 선박…… 운송이 가능한 거리일까.

 

무장 경찰 몇이 갑자기 그들 곁으로 걸어간다.

 

호기심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가격을 흥정하던 흑인들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인다. 펼쳐 있던 보자기 귀퉁이 끈을 재빨리 잡아당긴다. 커다란 보자기가 널려 있던 핸드백들을 만두피처럼 감싼다. 마술사처럼 손을 휘두르니 짐들이 작은 봇짐처럼 착 접힌다. 수리부엉이가 쥐를 낚아 날아가듯. 밧줄을 어깨에 감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질주 속도는 상인이 아니라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 선수 같다. 트로피를 목표로 국가를 대표해 달리느냐 아니느냐 정도의 차이일까. 누군가 상인들이 도망치는 속도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해도 케냐인 상인들은 개의치 않을 것 같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겠지. 그들에게도 생존은 마법이었을까.

 

그들이 어디를 거쳐왔는지. 육상, 해상, 항공 아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막히던 일들의 연속에서. 자국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을 버렸는지. 그것을 물을 새도 없이 총을 겨눈 브로커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하루치 생존을 위해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지 않는 동안 기억, 고통도 동전 몇 개로 바닥에 떨어진다. 그날 밤 숙소에서 달리기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지운다. 진정한 달리기는 지난 감정을 떠올릴 수 없다.

 

 

다시 이동수단

 

이동의 고단함은 다음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쉽게 잊힌다.

따가운 풍광 아래 보사노바, 목가적 리듬에 몸을 맡기는 지상에서의 행복한 시간. 떠올리고자 하면 언제든 떠오르는 장면들. 이 만끽은, 어디에서든지 삶의 위로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온다.

 

행복 회로를 열심히 돌리는 동안에도 한편으로 이 여정의 치명적인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열두 시간이 걸리는 여정은 몇십 년의 삶을 한번에 살아버린 뱀파이어의 하루처럼 권태롭고 고단하겠지. 혹사의 여정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물레이션해본다.

 

그러나 그 틈으로 반얀나무 뿌리가 물가에 늘어진, 햇빛에 반사되며 더 푸르고 깊어지는 바다를 품은 해변이 떠오른다. 바위로 매서운 파도가 몰아치는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일. 한여름 눈부심 아래서 밀려오는 바람을 느낀다. 눈을 감아도 눈을 감지 않아도 나의 숨쉬기를 다시 그리면 된다. 나의 호흡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

 

바닷물이 달아오른 피부를 차갑게 식혀준다.

파도는 커다랗게 밀려왔다 빠져나간다.

열망, 포옹

까뮈가 알제리에서 쓴 에세이 구절처럼 그 앞에서 삶의 기쁨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의 말처럼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발상 역시 쾌락주의시대를 향유하는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생각을 멈추는 것은 자연스럽다. 단순해도 더 친밀해도 괜찮다. 일순간 감정이 일어도, 떠오르는 단어, 언어가 없더라도 지금 내게 온 순간을 느끼면 된다.

 

 

High diving

 

안온하고 빈약한 세상보다, 어렵지만 더 나은 세상이 필요하다. 조던 피터슨의 말처럼 천국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천국을 앞당기려면 하나님이 에덴동산 앞에 세워놓은 심판의 화염검과 죽은 천사들에게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책에서 니체의 유명한 전언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잠시 귀중한 말을 잊고 있었다.

 

조던 피터슨의 말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는 한계를 넘어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하는 의무가 내게도 있다. 고통이 찾아온다면 고통을 낮추는 법을 찾을 것이고 그 고통을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나의 본성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당신도 나도 힘겨운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 부끄러운 자의식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의 그림자는 자기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 중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살아온 날들의 불가피한 학습이었다. 죄책감 없이 맘껏 내 삶을 사랑해도 된다.

 

삶이 기본적으로 비극임을 받아들이고 의지를 가지고 미지를 향해 도전한다면 내가 만든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 사회의 수준 낮은 눈속임, 속임수에서 벗어나 진실을 봐야 할 의무를 기억하며. 비열과 위선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하잘것없는 세계가 공고해지는 것을 두고 볼 필요가 없다. 그런 세계라면 파도가 아니라 파도의 포말에도 무너질 테니.

 

경직된 한국적 사고에 갇혀 후퇴와 패배를 나눌 필요가 없단 것을, 깨진 화면이 틀어주는 오래되고 익숙한 절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을. 글이 아니라 이제 몸으로 부딪힌 것들을 통해 배운다. 더 끔찍한 고통만이 남았으리란 낙담을 우리는 벗어도 된다. 벗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넘나들 수 있는 통로가 창살 틈이라도, 세상을 언제든 구경하고 만끽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트랜스에서 발버둥치지 않아도 된다고. 지난날, 겁에 질린 나의 손을 서늘한 손으로 잡아준다. 소외되고 격리된 존재들과 함께하고 했던 꿈, 나는 이제 그 길을 나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호스텔 커다란 나무, 커다란 창

어떤 날은 빛이 가슴을 통과하고

어떤 날은 창문을 부술 듯 폭우가 내리치고

어떤 날은 한꺼번에 들어왔다

들어왔던 모든 것들이 나간다.

 

바닥, 화장실 나무문에 일렁이는 빛줄기

열려 있고, 닫혀 있는

뜨겁고 서늘한 그곳에서 나지막히 따라오던 질문들이 흩어진다.

끝나거나 기다려도, 허우적거려도

원한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원하지 않는다면 원한 적 없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텅 빈, 새소리

판단이 나를 훑고 간 자리

바닥에 앉아

Sea

sand

salt

증명하기를 그만 둔다, 쓰기로

Sea

sand

salt

바람, 새의 지저귐

I can do that

I can do it alone

Everything is enough

I’m good at that

I’m not good at that

What do you care

Bay

Bay

Bay

Day by day

Day by day

노트에 적힌

노트를 닫으면

 

혼돈을 떠나 모래알갱이로 씹히는 언어들

 

사랑에 답할 수 있다.

Can you remember?

Can you remember?

 

forget it. 어떤 일이 생겼을 때 호스텔 매니저가 내게 forget it이라고 말해주었는데 어떤 대답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잊지 못하는 것들 속에 있었다. 그때 나는 작은 랜턴 하나 켜있지 않은 어두운 길목이었다. 어디를 올려다봐도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었다.

 

겁 많은 물고기떼처럼 흩어지는 의미, 단어들. 이제 와 지난날 나를 후회하기에는, 나라는 건 후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나는 그저 후회하는 나를 바라볼 수 있다. 호스텔 창으로 새가 요란하게 지줘귄다. 단어 뜻을 기억해내려는 나의 주의를 뺏어간다. 뜻 찾기를 멈춘다. 말의 의미를, 의미는 발버둥칠 때 잠깐 생겨났다 사라진다.

 

“so beautiful”

차가운 인상을 가진 호스텔 매니저가 환히 웃는다.

“맞아, 너무 좋아 이곳은”

무언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입에 물고 길을 건너가는 개는 단 한 번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 삶은 아름다운 아침만을 되풀이한다.

 

 

from bay

 

한국이 아닌 곳에서 가끔 한국 신문의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들을 허망한 심정으로 본다. 영혼이라는 단어가 그 현실 앞에서 재로 흩어진다. 영혼이 있다면 신도 있을 것이다. 신이 있었다면 인간 사회를 악이 포식하며 폭력과 불법이 판치도록, 삶과 억울한 죽음들이 뒤섞이게 두었을까. 이 끔찍함을 도저히 믿기 힘들다.

그것에 연명하던 인간들이 현실을 자각할 틈도 없이 무자비 속에 소멸되는 것을 목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갖추지 못했더라도 시대의 참상 앞에서 그도 할말을 잃었을 것이다.

 

사회의 여러 갈등을 바라보다보면 나의 정신 역시 붕괴될 때가 있다. 이 모든 게 정치와 언론이 만든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까. 이곳을 살 만한 곳이라 여기지 못하도록 더 많은 갈등, 더 격렬한 분노로 우리를 내몰기 위한 부추김이라 추측하는 편이 정신적 안정에 더 나을 것 같다.

 

유튜브 창을 닫는다. 그것은 실존이 아니다. 매스컴이 떠드는 세상에 대한 정보는 가공이 쉽다.(매스컴이 떠드는 세상에 대한 정보는 가공된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정보의 전부라면 이제 그만 알아도 될 것 같다.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팔다리 피부가 지글지글 타들어간다.

커다란 나무그늘만 골라 걸으며 숙소로 돌아간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핸드폰, 전자제품을 비닐팩으로 밀봉해 가방에 넣는다.

빗속에서 다시 생각한다. 젖을 만한 게 또 있던가. 오직 빗물로 넘치는 거리가 마음에 든다. 우비를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주위가 커다랗고 투명한 어항처럼 느껴진다.

 

얇은 유리 천장에 균열이 가고

나는 이 여름이 완전히 깨지길 바라는 사람처럼 심장이 뛴다.

작은 균열들이 뻗어나간다.

어떤 두려움

어떤 시간

낙담이 심했던 어떤 여름, 점박이 지네떼가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고 흔적도 없이 떠내려간 지네떼가 아침이면 도로 잎사귀 아래를 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호텔 직원은 함께 그것을 지켜보며 말했다. 걔네는 어제 죽었고 오늘은 다시 태어나는 거야 매일매일 그들은 grow up한다.

 

한국의 엑소더스에 휩쓸려 살아가던 날들이 아득히 스쳐지나간다. 뫼비우스의띠, 같은 패턴으로 이어지는 주제, 사건, 화제…… Full…… Full…… 여기저기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물살에 휩쓸린 누군가를 건져올리는 동안 나도 그 물살에 휩쓸리곤 했는데, 왜 나는 살려달라 말하지 못했을까. 웅얼웅얼 살고 싶다는 혼잣말로 끝냈을까.

마지막 경련처럼 보였지만 매번 시시하게 깨지는 여름이 있었지. 다음 여름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올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불완전한 일들에 대해 다른 것을 해보자고. 삶을 바라보는 고정된 생각을 내려놓을 때, 있는 그대로의 삶에 자유롭게 온 마음 다해 ‘예스’를 말할 수 있다고.***

 

점심에 헬시 푸드를 먹는 것도, 근처 gym을 부리나케 검색하고 정해진 시간에 원고 쓰는 짓도 모두 관두고 싶어. 나는 이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다만 그 충동이 과거의 기억에서 흘러나왔음을 알아차릴 뿐이다.

뙤약볕 카페에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아도, 죽도록 일한 기분이 든다. 어느 날 자정에 숙소에서 뛰쳐나와 오토바이를 몰고 붐비는 지역, 가장 큰 힙합 클럽으로 향했다. 〈해리 포터〉의 호그와트 성문 같은 으리으리한 문을 밀자 〈미녀와 야수〉에 나올 법한 높고 우아한 계단이 보였다. 외국인, 로컬 할 것 없이 그 안은 꽤 많은 인파로 붐볐다. 버터플라이 비키니 차림의 여자 댄서들이 네온사인 날개를 펄럭이며 곁에 다가와 춤을 춘다. 네온사인 날갯짓. 멍하니 그것을 바라본다.

엉망으로 오늘밤을 보내리라 다짐했지만 피로했다. 조용한 곳에서 조용하게 쉬고 싶었다. 다시 호그와트의 성문을 밀고 나오자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도로 가장자리에는 숙소로 돌아가려는 손님을 태우려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들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날 보자마자 택시, 택시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주차한 오토바이를 끌고 가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뛰었다. 택시, 택시하고 손짓하던 기사들이 다급하게 be caerful! be caerful! 하고 외쳤다. 차도 없는데 무엇을 조심하라는 걸까. 본 적도, 심지어 자신들의 오토바이를 탈 사람도 아닌데…… 다정하고 애정어린 시선들이 무계획으로 쏘다니는 여행중의 나를 늘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때론 나의 잘못된 계획을 수정해주고 조언을 건네고 지퍼가 열린 가방에서 줄줄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주곤 했다. 그 전날, 종일 더위 속에 손님을 태우고 다녔을 그들이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얼굴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며 손을 흔든다. ‘내 종교는 친절이다’ 라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미소로 그들과 아침을 함께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담벼락 너머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 모든 것이 실재로 깨어있음을 느끼며.

 

 


 

* 조던 B.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강주헌 옮김, 메이븐, 2023.

** 타라 브랙, 『받아들임』, 김선주, 김정호 옮김, 2012, 불광출판사. 

***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