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hollyland

hollyland

 

매미들이 싼 오줌을 맞는다. 미스트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져 내리는, 맑고 투명한 방울들이 얼굴 위로 떨어진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 핀 커다란 잎사귀들. 오토바이 위에서 눈을 감는다.

 

캐리어를 싸기 시작한다. 이번에 떠날 곳은 다이버들의 성지로 불리는 섬이다.

 

하늘길로 간다면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고 배도 한 번 타야 한다. 육로로 간다면 여덟 시간 정도 슬리핑 기차나 나이트 버스를 타야 한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와 배를 한번 더 타야 한다. 인내심이 짧아질 때로 짧아진 우기의 더위에 슬리핑 기차와 나이트 버스라니. 더 나은 선택지를 고민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바다에서 사막으로, 사막에서 도시로, 비행기와 운하로, 고대 유물과 미술관, 대서양과 지중해로 문명을 파괴하며 전 세계 랜드마크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 인파를 피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인류의 남은 운명인지도.

 

한국에 머물 땐 종종 지도나 부동산 어플리케이션을 검색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수중에 있는 금액으로 마음에 드는 컨디션의 집을 찾는 것이 동남아 편도 비행기 티켓 값으로 유럽 왕복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한 허무맹랑한 바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화장실 문에 걸리는 이층 침대, 좁은 원룸 사진을 바라보다 스카이 스캐너를 열어 편도 비행기표를 검색한다.

 

전 재산을 쏟아붓고도 온전히 쉴 수 없는 원룸은 스튜디오studio가 아니라 무간지옥 카테고리에 넣어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는 바라볼 것이 없다. 바라볼 만한 풍경 없이 질문들이 맴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해. 질문은 실망이 되어 공간을 채운다. 공간은 점점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창 없는 곳에서 선인장은 천천히 말라간다.

 

살인적인 집값에 질려 도시를 떠난다 해도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over와 tourism이 결합된 이 단어의 뜻은 공항에서부터 경험할 수 있다. 게이트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끝을 짐작키 어려운 길고 긴 줄…… 층층이 쌓인 배낭과 캐리어…… 내 눈은 삼차대전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현대판 엑소더스. 파국을 자처하는 인류의 모습. 인류가 한계를 기만하며 한계를 넘는 장면. 신의 차가운 경고가 연착 안내 방송으로 흘러나온다.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 트레비분수, 판테온, 베네치아, 파리의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당신이 경험하는 건 인기 도시나 관광지가 아니라 난생 처음 목격하는 인파다. 다행히 내가 유럽을 다니던 시기는 코로나 종식 전이라 그런 인파에 시달리진 않았다. 긴 줄을 서면 주말에도 입장할 수 있었고, 새벽이면 청소 트럭이 청소 트럭만한 쓰레기통을 비우고 갔다. 내가 유럽을 여행하던 시기는 운이 좋았다.

 

루브르박물관 입구 줄지 않는 긴 줄을 보고 근처 카페에 무작정 들어간 적이 있다. 작은 커피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는 원두를 그대로 갈아넣은 것처럼 썼다.

카페 테라스 차양 아래서 한손으로는 유모차를 끌고 한손으로는 아이 손을 잡고,

가끔 아이 혼자 걷도록 하면서 말보로를 피는 젊은 엄마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담배의 유해성이나 아이의 교육에 대한 운운 없이 쾌청한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새카만 에스프레소, 흘러가는 구름, 한 손에는 담배, 한 손에는 유모차를 밀며 내려가는 선글라스를 올리는 여자를 바라보며. 내가 원하던 건 수천 년 전 유물이나 건축물이 아니라 이런 정오였다. 그 구름 아래 시간들이 관람객들의 뒤통수와 눈가 외에는 볼 수 없는 모나리자 그림보다 더 나았다.

 

관광지가 있는 도시에 남은 정체성은 장엄한 상징이나 경이가 아니라, 관광객, 난민, 넘치는 쓰레기와 소매치기 뿐이다. 소매치기의 벌이는 내가 사는 나라의 작가 벌이보다 나을까. 적어도 무가치감에서 헤매는 일을 없지 않을까. 종종 글을 쓰다 그들을 떠올린다. 파리 지하철에서 만난 에스파냐계의 여자 쌍둥이들이나 바르셀로나에서 가방을 파는 케냐인들을.

 

 

세 명의 에스파냐계 쌍둥이

파리의 저녁 지하철. 한 역에서 에스파냐계처럼 보이는 여자들이 탔다. 그녀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세 명의 얼굴이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그녀들은 나를 둘러쌌다.

그중 하나가 어디에서 내리냐고 물었다. 나는 다음에 내린다고 대답했다. 또다른 그녀가 재빠르게 내 몸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자물쇠로 채워진 핸드백, 내 몸에는 훔쳐갈 게 없었다. 시선 끌기가 역할인 여자와 내 얼굴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내게서 무엇을 뺏으려는 자와 서로를 끌어안을 듯, 약간의 긴장이 감돌고

검은 머리칼

콧볼에 박힌 깨알만한 은빛 피어싱

껌을 씹는 도톰한 입술

이마에는 어떤 문양이 찍혀 있고 유럽에서 보기 드문 나만한 키의 여자

시선이 굵게 땋은 머리로, 작은 키에 믿기지 않는 풍만한 가슴으로 향한다.

‘굿 럭’ 그녀는 손짓하며 다른 그녀들과 다음 역에 내려 인파에 섞인다. 자기 나라 말로 낄낄거리며 어디론가 뛰어간다.

 

낯선 도시, 수천 년 전 제국과 왕국의 부흥기에 강탈했던 전리품과 유화를 멍하게 바라보는 타깃들. 광장 그리고 미술관에는 늘 부주의한 타깃들로 가득하다.

인종, 종교, 국적, 정치적 박해도 그녀들에게는 중요한 사안이 아닐 것이다. 그녀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면 그녀들은 비웃을 것이다.

 

20세기 말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21세기에 이르면 사야크 발렌시아Sayak Valencia의 그로테스크한 ‘고어 자본주의’로 확산된다. 21세기를 트랜스젠더퀴어의 시대라고 할 만큼 열정적인 트랜스 이론들이 이론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고 발렌시아도 그런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고어 자본주의는 폭력과 공모한 신체 장사를 통해 자본 축적을 이루는 자본주의 형태를 피 튀기는 공포영화 장르에 비견한다. 고어 자본주의에서는 인신매매, 장기매매, 성매매, 청부살인, 납치 등을 통해 취약한 신체가 대표적 상품이 된다.

 

북남미를 경계 짓는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는 ‘코요테’와 ‘닭장수’(멕시코 국경에서 인신매매범 을 부르는 말)로 넘쳐난다. 불법/합법의 경계가 무너진 곳에서 자본주의가 전시 한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자들은 범죄적 주체 스펙트럼에 속할 수밖에 없다 법과 삶이 붕괴된 곳에서 범죄행위는 자연스러운 직업 활동이 된다. *

 

계급적 평등과 소외 매커니즘에 대한 연구는 세기마다 있었다. 더 좋은 선택에 대한 윤리학, 성경과 종교, 뇌과학, 신경과학 분야에서의 획기적인 발견도 있었다.

병리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성취도 암석층처럼 퇴적되어 있다. 거대한 산업 발전 속에 전 세기에 이룬 연구는 시대의 신경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과학적 관점, 방법론, 실험, 경험…… 편향되거나 불분명한 단순 사고를 걷어내기 위한, 현대에 맞는 지혜와 근본적 통찰에 대한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사 직전에 놓인 황무지 하이에나들에게 철학적 질문은 당연히 멍청한 질문일 것이다. 먹고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은 그만두라는 핀잔으로 돌아올 것이다.

 

관광객들이 크루즈와 선박과 비행기를 타고 올 때, 난민들은 낡은 보트로 망망대해를 건너고, 흙먼지 길을 날짜도 잊은 채 브로커를 따라 걸었을 것이다. 더위와 추위를 버터며 목숨을 건 여정이 목적지에 다다른다. 마침내 고군분투가 끝나간다는 기쁨에 곁의 있는 이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동안, 여정의 길잡이를 해준 신과 다를 바 없는 브로커가 이마에 총구를 겨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정의와 공정, 너그러움이 아니라 자비 없는 현실임을.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태운 배가 가라앉는 장면, 총성에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시체들 중 하나가 언제 내가 될지 모르는 공포.

 

그녀들의 피부에 닿았던, 그것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던 눈동자와 냄새, 거기서 숨 죽여 내뱉던 호흡. 그 모든 것에 대한 빠짐 없는 각인만이 남은 현실일 것이다.

 

난민의 참극을 그린 아민 그레더의 그림책 『지중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익사 후에,

그의 몸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물고기가 기다리고 있는

바닥으로. **

 

 

첫 구절의 다음 장을 넘기면 바닷속에 가라앉은 사람이 나오고 가라앉은 송장으로 모여드는 물고기들이 나온다. 물고기들은 다시 그물에 잡혀 식탁에 오르고, 그 물고기를 팔거나 먹은 사람들은 총을 사서 나누어 갖고 전쟁을 벌인다. 마을이 불타오르고 사람들은 짐을 품에 안고 낡은 배에 몸을 싣는다. 피난민으로 빼곡한 배가 침몰하는 것으로 그림은 끝난다. 마지막 페이지의 그림은 마치 첫 페이지의 그림 같다. 그림은 반복을 가리킨다. 참극의 끝없음을. 약간의 구글 서치만 해도 난민에 대한 엄청난 양의 충격적인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시신들은 바다에서 건져진 뒤 다시 바다로 던져졌다. 물고기 밥이 되기 전까지 물살을 따라 떠다녔고, 흩어졌다. 알려진 바로는 몇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시신들은 물속을 떠다녔다…… 거대한 침묵은 지난 20년 동안 지중해에 침몰한 수많은 배를 감쌌고 (……) 유럽의 가장자리 바로 이곳에. 아민 그레더의 이야기는 그 출발점부터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진실을 짚는다. 그 진실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

 

이 현대판 엑소더스에 대한 몰이해는 이중 억압에 기초한다. 첫번째 억압은 바다를 떠돌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의 기본 인권에 대한 부정이다. 남자든 여자든, 이들은 이름도, 성도 없다. 그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떤 언어로 소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집단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들은 신문 기사의 정확하지 않은 통계의 차가운 숫자로 나열될 뿐이다. 그리고 모든 좋은 여정의 끝에는 사람이 남듯이 이 대학살 끝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이야기, 고유의 꿈, 각자의 사랑, 트라우마 그리고 목소리를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개성, 모든 삶의 유일성이 난민이라는 이유로 부정되어왔다.

 

(……) 왜 수천 명의 남자와 여자, 청소년, 어린이들이 그렇게 쉽게 바다에 가라앉는 배에 오르고 심지어 비용까지 치를까? 그들이 뒤에 두고 떠나온 곳은 지옥보다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이 인과관계를 참고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여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분석─이 이유는 경제적, 혹은 사회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또한 억압의 과정에서 그들을 피해자로 전락시킴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난민은 끝없는 내전, 무자비한 독재정권의 수립 그리고 테러와 혼란을 불러왔던 초국적 권력의 야합이 만든 결과물이다. (……) 사람들의 탈출을 역사적, 시간적 측면을 탈색시키는 순간, 파도가 삼켰던 모든 것을 따라 망각 속으로 표류하면서 이같은 “과거”는 사라진다. (……) ***

 

 

경찰에 잡혀도 난민들에게는 돌아갈 나라가 없다. 여권도 법도 그들을 강제할 수 없다. 고국이 재건되어도 그녀들은 여성에게 무자비한 법과 극악의 삶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새소리처럼 이곳을 불법적으로 부유하고 날아다닐지언정.

 

 


 

* 임옥희, 「병리적인 시대에, 다른 상상으로」,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78~79쪽.

** 아민 그레더, 『지중해』, 내인생의책, 2020.

*** 같은 책.